53화
고베대지진이 일어난지 3개월째 접어들고 있었다.
1995년은 연초부터 시끄러웠다. 1월에는 고베 대지진이, 4월에는 오움진리교 신자들이 도쿄의 지하철에 독가스를 살포하여 13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미국에서는 오클라호마 연방정부청사에 폭탄이 터져 3백여명이 사망하는 일도 일어났다.
“세상이 아주 난리로군.”
신문을 보면 황 전무가 중얼거렸다. 황 전무에게 서류 결재를 받으러 온 박기범 차장은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미국이나 일본은 정신병자들이 저런 일을 저지르지만 우리는 저런 반사회 불순분자들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서울지하철은 안전하니까요.”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닌가?”
“글쎄요.”
박기범 차장이 대충 대답을 얼버무렸을 때, 황 전무가 말했다.
“우리나라는 물론 광신도는 없지. 연방정부청사를 날리는. 물론 지하철에 독가스를 퍼붓는 놈도 없어. 하지만 그런 놈은 있지. 공수부대 투입하는 놈. 지 말 안듣는다고.”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미친나라인가요? 여기 자금계획입니다. 도장 찍어 주세요.”
황 전무는 서류를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다행히 분량이 많지 않아서 금방 내용을 본 황 전무는 결재란에다 도장을 찍었다.
“아까 일본에서 연락이 왔어. 킨키 상사의 사토이 타츠야 회장이 한국에 온다는군.”
“그게 정말입니까?”
박기범 차장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쪽 말로는 대단한 선물을 가져올거라는 모양인데?”
“언제쯤?”
“4월 27일날 온다는 군.”
대단한 선물이라는 표현에 잔뜩 고무된 박기범 차장은 웬지 모르게 신이 났다. 3일 후인 1995년 4월 27일. 아침 비행기로 서울에 온 사토이 타츠야 회장의 벤츠가 신라호텔에 도착했다.
이미 기자들이 가득 호텔 로비를 메웠다. 기자들은 플래시를 터트리며 일본 재계의 거물인 사토이 타츠야 회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신라호텔 기자회견장. 가뜩 긴장된 표정을 한 오남현 사장, 황영식 전무, 박기범 차장이 지정된 좌석에 앉아있었다.
아마미 타카코 기자를 제외한 다른 국내외 기자들은 얼굴이 익히 알려진 오남현 사장과 황영식 전무를 제외한 박기범 차장이 누군지 알 수 없어 고개만 갸우뚱 거렸다.
키가 180cm가 넘는 큰 키의 사토이 타츠야 회장이 가운데 좌석에 앉고 바로 기자회견이 시작되었다. 그는 메모지를 꺼내 읽어나갔다.
“지난 고베대지진 이후, 일본경제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달러당 80엔수준으로 떨어지는 고환율속에서도 수출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인간의 과학기술과 경제력은 자연재해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으며 자연재해는 전체 경제에 미미한 수준 밖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재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지진 발생 직후, 석유공급이 중단된 우리 킨키 상사는 많은 석유정제능력을 갖춘 기업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그 요청에 응한건 무등그룹뿐입니다.”
이 말에 기자들은 거의 동시에 플래시를 터트렸다. 무등그룹이라는 말이 들리자 산업부 및 경제부 기자들은 열심히 내용을 받아적기 시작했다.
“어려울 때 돕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라는 옛 말이 있습니다. 이를 잘 보여준 무등그룹은 우리 킨키 상사의 진정한 동반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킨키 상사는 두가지를 제안하겠습니다.”
이 말을 통역담당자가 해석해주자 박기범 차장은 황 전무를 쳐다보았다.
‘과연 무슨 말이 나올까?’
사토이 타츠야 회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기자들과 무등그룹 관계자들을 모두 놀라게 했다.
“첫째 오퍼는 전세계에 뻗어있는 킨키 상사의 수출망을 무등그룹이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수출시 어려운 점이 있다면 킨키 상사가 책임지고 수출망을 뚫어주려고 합니다. 신용 보증인 셈이죠. 둘째는 무등그룹이 요청한다면 최대 50억 달러를 연 2%의 저리로 50년간 대출해주도록 하겠습니다.”
순간 모두들 1~2초간 멍한 표정으로 사토이 타츠야 회장만 쳐다보았다. 이 조건은 그야말로 엄청난 제안이었다. 거의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미국 CIA보다 더 촘촘한 수출망을 가진 킨키 상사의 네트워크는 엄청난 자산이었으며, 세계최대 은행인 미국의 맨하탄 은행을 배후에 두고 있는 킨키 상사의 자회사인 킨키 은행의 자금조달력과 신용은 세계최고였다.
항간에서는 맨하탄은행은 FRB를 움직일 수 있다고 했다. 즉 최악의 경우 발권력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기자회견장에서 이를 취재하던 아마미 타카코 기자는 사토이 타츠야 회장의 발언에 빙그레 웃었다.
“무등그룹. 스고이네.(대단한데)”
이윽고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기자들은 너나할것없이 질문을 해댔고 이 엄청난 특혜조건에 대해 묻는 질문이 대다수였다.
“신라경제신문의 오영세기자입니다. 킨키 은행의 50억 달러 조건은 어느 상황에서나 통하는 것입니까?”
“물론입니다. 이미 우리는 킨키 은행이 최대주주로 있는 맨하탄 은행에게 50억 달러를 대출준비하도록 지시해두었습니다.”
사토이 타츠야 회장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발해일보의 박성진 기자입니다. 무등그룹이 어느 정도의 도움을 주었기에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인지요?”
“우리가 제안한 것보다 더 파격적인 제안을 했기에 우리도 상상을 뛰어넘는 파격제안을 하는거죠. 두 회사 모두 서로간에 파격제안을 하는 격이라고 할까요?”
“에. 사토이 타츠야 회장님이 서로간에 파격제안을 한다고 하는데 저나 우리 황 전무는 파격제안을 할 수준이 안되지만 여기 경지실 박 차장이 무료로 석유를 제공하자고 했고, 저와 황 전무는 모두 승낙을 했습니다. 박 차장의 공이 크지요.”
순간 기자들의 플래시는 박 차장의 얼굴에 집중되었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무등그룹본사는 환호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이 소식은 외신을 통해 전세계로 타전되었고, 킨키 상사가 무등그룹의 신용을 보증한다는 점 때문에 그날 하루만 해도 무등그룹의 각 사업본부는 대박을 쳤다.
본사로 돌아가자 경지실 뿐 아니라 다른 사업본부의 담당자들 역시 박 차장에게 다가와 악수를 건넸다. 경공업사업본부의 김상국 차장이 가장 먼저 달려왔다.
“대단하구만. 자네 덕에 섬유수출이 활기를 띄겠어.”
“뭘 그런걸 가지고. 회사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건데.”
“킨키 상사가 신용보증을 한다고 한 순간, 프랑스에서 500만 달러어치 섬유수출계약을 땄어. 킨키 상사라면 100% 믿는다는군.”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거대한 킨키 상사의 네트워크를 통해 무등그룹의 제품들은 전세계로 무한정 뻗어나갈 수 있었다.
게다가 언론에서도 GATT체제 대신 미국 주도의 WTO체제가 도입된다고 야단법석이었는데, 세계시장이 완전히 열리는 WTO체제 아래에서, 든든한 네트워크를 갖는다는 것은 정말 좋은 기회였다.
============================ 작품 후기 ============================
오움진리교 : 일본에 있던 이상한 사이비 종교로 사린가스를 도쿄 지하철에 살포해서 13명이 사망하는 큰 사건. 이후 경찰의 대대적 수사로 모두 검거함.
오클라호마 연방정부청사 테러 : 같은 해 일어난 사건으로 티모시 맥베이라는 역시 사이비 종교 광신도가 연방정부청사 건물에 대해 폭탄을 터트린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