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의 시대-52화 (52/159)

52화

박기범 차장은 전무실에서 황 전무로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사장님이 왜 일본에 가셨는지 아나?”

“아니요. 그건 잘 모릅니다.”

그 말에 황 전무는 대답했다.

“자네가 오 사장님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는 모르나. 그 분이 과거 일제 시대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가게의 점원으로 일을 하셨지. 해방 후에 일본으로 돌아간 그 주인과도 계속 연락을 하며 지내신 모양이야.”

“그렇다면 그 분들이 고베에 사신다는 건가요?”

그 말에 황 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황 전무의 말을 듣자 박기범 차장은 이해가 갔다. 오남현 자신을 키운 일본인 주인을, 그 사람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일본으로 바로 날아간 오남현 사장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이해하기 어려운, 착잡한 심정이었다.

전무실을 나와 자기 책상에 앉았다. 무등그룹 경영지원실 자금팀의 실무책임자는 박기범 차장 자신이었다. 지난 1993년 자금팀 부장이던 이병택 부장이 사망한 이후 부장자리는 공석이었다.

그가 독일에 나가있던 6개월간 회계팀의 정윤환 이사가 임시로 맡았지만 그 역시 박기범 차장이 돌아오자마자 경공업사업본부장으로 영전했다.

“웃어야할지. 울어야 할지.”

일제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오남현 사장역시 극악한 일제시대. 총명한 머리 덕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착실히 일을 하여 실력을 인정받고 경영을 배웠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해방 후 쫓겨간 일본인 주인의 가게를 고스란히 물려받았고 이는 오늘날의 무등그룹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일제와 맞서 싸우다가 못 배우고 지금도 빈곤한 생활을 하는 반면, 친일 아닌 친일을 한 오남현 사장은 거부가 되어 대한민국 재계 12위의 대기업을 일구어낸 것이다.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기계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감사합니다. 무등그룹 자금팀 박기범 차장입니다.”

들려온 목소리는 오남현 사장이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사장님. 무사하십니까?”

그는 벌떡 일어나서 전화를 받았다. 오남현 사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괜찮네. 저기 황 전무 바꾸게.”

“알겠습니다. 전화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는 전화를 돌려 황 전무실로 연결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그는 의자에 다시 앉아 그가 처리해야 할 서류들을 검토했다. 10여분 뒤, 전무실 문이 열리고 황 전무는 박기범 차장에게 다가왔다.

“박 차장.”

“네. 전무님.”

“여기 이 계좌로 3천만 엔을 보내게. 전표는 내가 처리할테니까 오늘 당장 보내도록 하게. 스위프트 코드(국제적으로 약속된 은행코드. 해외송금시 보다 정확한 거래를 위해 사용)는 내가 확인했고, 특이사항은 없을거야. 3천만 엔이야. 3천만원이 아니고.”

금액과 스위프트 코드, 해당 은행계좌가 적힌 메모지를 고이 받아든 박기범 차장은 류 대리에게 갔다.

“류 대리. 전무님이 보내라고 하시거든? 해외송금건이니 보내고. 전표는 전무님이 직접 작성하신다니 그리 알고. 월마감때까지 혹시라도 안되어있으면 애기해. 내가 전무님께 말씀드리게”

“알겠습니다.”

류 대리는 즉시 은행측에 전화를 걸고 해당 금액을 보내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다시 책상으로 돌아온 박기범 차장은 자기 책상으로 팩스 한 통이 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어로 적힌 팩스를 본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Request of Assist.

From : Kinki Corporation Energy Department Hyodo To : Mudeung Group Management Service Team Because of severe earthquake, Kinki Corporation's oil refinery system temporarily SHUTDOWN. We request that Mudeung could support oil for us. If Mudeung could do that we repay later.

We need Gasoline, Kerosine, and LPG gas.

이렇게 적힌 종이 맨 아래에는 킨키 상사 에너지 본부장인 효도 전무의 서명이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킨키 상사의 로고가 뚜렷하게 보였기에 박기범 차장은 그 팩스를 들고 황 전무실로 향했다.

“전무님.”

“그래. 돈은 다 송금했나?”

“류 대리가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황 전무에게 팩스용지를 건넸다. 그것을 읽어본 황 전무는 박기범 차장을 쳐다보고 전화기를 들어 킨키 상사로 걸었다.

연결이 되자 유창한 일본어로 누군가와 대화를 한 후, 전화를 끊고 나서 황 전무는 박기범 차장을 쳐다보았다.

“이거 대박이겠군.”

“대박이요?”

“그래. 지금 킨키 상사의 석유생산이 완전 셧다운 됐어. 좋은 기회야. 한신은행에 갚아나갈 물량을 제외하고도 남는 휘발유 재고가 꽤 되는데 비싸게 팔아버려야겠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은 황 전무를 보면서 박기범 차장은 다른 생각을 했다.

“전무님. 좋은 기회이기는 한데, 이 때 어려움에 처한 킨키 상사를 상대로 장사를 하지 말고, 무상으로 필요한 물량을 다 지원해주면 어떨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생뚱맞다는 듯 황 전무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진으로 어려운데 비싸게 팔아도 될텐데.”

“아닙니다. 이 기회에 도와주면 더 좋을 겁니다. 그들도 양심이 있다면 우리가 도와주었을 때 보답을 하겠죠. 일본인들은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답을 하니까요. 잘하면 이를 계기로 킨키 상사와도 거래를 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박기범 차장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 기회에 석유재고를 팔면 돈을 두둑히 벌 수 있다는 생각이 황 전무를 사로잡았다. 그것을 간파해내기라도 하듯 박기범 차장은 말했다.

“전무님. 석유를 파는건 일시적인 판매증대입니다. 하지만 일본에서 처음 돈을 빌릴 때 한신은행의 뒤에 킨키 상사가 있다는 점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킨키는 지금 아쉬운 판인데 우리가 잘해주면 그 이상으로 보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 그럼 여기 용지에 적힌대로 가솔린과 케로신, LP가스만 공급하면 되는 거잖아.”

황 전무는 생각에 잠겼다. 그가 의사결정을 내리는데는 단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전화기를 들어 내선번호로 버튼을 눌렀다.

“어. 나 황 전무야. 지금 우리 남아있는 나프타 재고량이 며칠치야. 어. 12일치라고. 좋아. 최 본부장. 지금 휘발유 재고가 상당히 많을거야. 그거 전량 배에 싣고 수출준비하게. 일본의 킨키 상사로 보낼거야. 그리고 지금부터 원유를 정제하여 LPG, 휘발유, 케로신만 뽑고 나머지는 다 전량 소각하게.”

황 전무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는 계속 말했다.

“다 태워버려. 대형 소각로에 디젤을 퍼붓고 불을 댕겨. 몽땅 태워. 휘발유하고 케로신, LP가스는 킨키상사에 다 보내. 무상으로 보낼 거니까 그리 알고. 그것 때문에 손실나면 다 내가 책임질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전화를 끊고 그는 수출입본부로 다시 걸었다.

“나 황 전무야. 지금 중공업본부에 말했어. 남은 석유재고를 일본의 킨키상사로 보낼테니, 통관준비하게. 공짜로 보내는 거니까 TT업무는 안해도 돼.”

박기범 차장은 자신의 의견이 관철된 것에 대해 미소를 짓었다. 황 전무는 그런 빅기범 차장을 바라보았다.

“그래. 일본인들과 거래하는거. 나도 잘 알지. 어쨌거나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내 선에서 책임질테니 그리 알라고. 한번 킨키 상사를 믿어보지.”

이 날 이후, 충남 서산에 위치한 무등그룹의 석유정제소는 풀가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거대한 소각로에서는 불필요하게 나온 디젤과 벙커 C유, 아스팔트 등의 잔여 부산물을 모두 소각했다.

높이가 100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굴뚝에서는 불꽃이 몇미터씩 용솟음치며 올라갔다. 그리고 그 위로 시커먼 연기가 뻗어나갔다.

“아깝네. 벙커C유야 본사 건물 난방으로 쓴다고 하지만 디젤까지 태우다니.”

현장 노동자 한 사람이 굴뚝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할 수 없지. 황 전무님의 결정인데 우리가 어떻게 하겠어.”

다른 직원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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