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1995년 1월 18일. 아침 신문을 보면서 박기범 차장은 깜짝 놀랐다. 일본 고베에서 진도 7.2의 강진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는 신문을 읽어보았다.
[일본 대지진. 사망자 2600명 수준]
헤드라인만 읽은 후,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지하철을 타고 회사로 출근했다. 지진이 일어난 지역은 고베와 그 인근. 그곳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박기범 차장은 아무런 생각없이 회사로 왔다.
“좋은 아침.”
자금팀 파티션 안으로 걸어 들어오자 심각한 표정으로 비서실 직원과 대화를 나누던 류성환 대리가 다가왔다.
“차장님. 사장님께서 오늘 8시 비행기로 일본으로 출국하셨답니다. 이를 어쩌죠?”
“뭐 자금계획은 전무님 승인을 받아야겠지. 그거 말고 뭐 있나? 근데 왜 하필 일본으로 가신거야? 하기사 일본열도 전체에서 지진이 난 건 아니니까.”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며 가방을 책상에 내려놓자 류 대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아니라. 일본에서 지진난 것 모르세요?”
“알지. 신문에서 봤는데.”
의자에 앉아 서류를 꺼내고 컴퓨터를 켜자 류 대리가 다시 말을 꺼냈다.
“지진이 난 고베로 사장님이 가셨답니다.”
“뭐라고?”
그제야 왜 류 대리가 비서실 담당자와 대화를 나누었는지 알 수 있었다.
“황 전무님은?”
“이 사실 아시고 계십니다.”
“그래? 신문에서는 뭐래? 해당 지역 피해상황이나 그런거 말이야. 얼마나 되지?”
다급한 마음으로 류 대리의 책상으로 가서 거기에 놓은 신문을 집어들고 내용을 읽어보았다. 신문을 읽어나갈수록 이번 지진이 대단한 규모라는 점을 재확인했다. 피해규모도 상당히 컸으며 일본 산업계에 미친 충격도 컸다.
“아니. 사장님이 여길 왜 가셔?”
그 말에 비서실 직원이 대답했다.
“저도 모릅니다. 오늘 새벽 5시에 김포공항으로 택시를 타고 가셨거든요. 이유야 모르죠.”
“비서실이 모르면 누가 알아?”
호통치듯 비서실 직원을 꾸짖었을 때, 황 전무가 다가왔다.
“난 알고 있지. 그리고 비서실이 모르는게 당연해.”
“아. 전무님. 알고 계십니까?”
“알아.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어. 어쨌든 사장님은 안전하시니 그리 알게. 아는 사람이 고베에 살기 때문에 가신거야. 다들 허둥대지 말고 일이나 하게.”
황 전무의 명령에 박기범 차장도 자리로 돌아가 일을 처리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번 지진으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될지, 무등그룹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18일 오후 1시. 도쿄 킨키상사 본사 25층 대회의실. 지진 소식에 세계최대 종합상사인 킨키 상사는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올해로 65세의 사토이 타츠야 회장은 근엄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임원들을 둘러보고 나서 회의를 주재했다.
“한신-이와이 대지진으로 피해가 막심한 모양인데, 고베 지역은 얼마나 파괴된거요?”
“정확한 피해규모는 알 수 없지만 사망자가 최소 3천명에 육박합니다. 아침 출근시간이 아니라서 다행하게도 지하철이 탈선하거나 고속도로가 무너지면서 출근길 차량이 파괴되는 등의 이유로 죽은 사람은 거의 없지만 주로 집에 있다가 뭐가 떨어져서 맞아죽은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절반 이상의 사망자가 노인들이라고 합니다.”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는 한 전무급 임원이 답했다. 사토이 타츠야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다시 말했다.
“우리 회사의 전체적인 피해규모는 얼마나 되지?”
그 말에 에너지 본부장인 효도 전무가 즉각 대답했다.
“현재 고베지역이 파괴되면서 물동량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규모는 보험으로 처리된다고 하지만 심각한 건 고베 앞바다에 있는 우리 정유시설입니다. 정유시설이 셧다운 되면서 재가동까지 한달이나 걸리고 그곳 저장탱크에 쌓아둔 휘발유 60만 킬로리터가 모두 타버렸습니다.”
“60만 킬로리터면 얼마나 되는 양이지?”
사토이 타츠야 회장이 물었다.
“대략 3770만 배럴입니다. 우리나라의 하루 석유소비량이 550만 배럴정도니 6일치에 해당하는 양입니다.”
“엄청난 양이군요. 게다가 우리회사가 가지고 있는 원유 저장량이 다해서 1억 배럴이니 37%가 마비된 것입니다.”
다른 임원이 말했다. 킨키 상사의 유일한 정유시설은 고베에 위치해있는데 설비가 정지하고, 재가동까지 한달이나 걸린다는 말은 기업으로서는 큰 재앙이나 다름없는 소식이었다.
“저장한 원유를 방출하면 어떨까?”
“그건 안됩니다.”
회장의 말에 효도 전무가 부정적인 의견을 표명했다.
“지금 우리 회사가 보유한 저장 원유를 방출한다 해도 소용이 없는게 휘발유 보유량은 5천만 배럴인데 그 중 3770만 배럴이 전소했으므로 남아있는 양을 전부 공급한다고 해봐야 얼마 가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남은 5천만 배럴은 원유입니다. 정유공장이 멈췄기 때문에 그 원유를 가공해서 휘발유니 뭐니 추출해 낼 캐파(Capacity : 용량) 자체가 현재로서는 아예 없습니다.”
“가공능력을 가진 누군가가 해주어야만 휘발유의 공급이 가능하다는 소리인가?”
“네. 현재 일본의 산업구조를 보면 자동차는 대형 화물트럭을 제외하면, 전부 휘발유입니다. 디젤연료는 급한게 아닙니다. 많이 쓰지도 않으니까요. 전체 자동차의 3%미만이 디젤입니다. 따라서 휘발유와 난방 및 발전으로 쓰이는 케로신, 벙커 C유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누가 해줄 수 있을까요?”
효도 전무의 마지막 말에 모두들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일본내에서는 충분한 캐파를 가진 회사가 없었고 미국쪽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중국은 아직 생산능력이 안되고, 남은 건 한국뿐이었다.
“우리가 접촉할 수 있는 한국에 석유관련업체가 있나?”
사토이 타츠야 회장의 말에 모두둘 서로만 쳐다보았다. 마땅한 업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회장은 자기 앞에 놓인 서류 한 장을 보았다.
일본열도 전체에 분포된 킨키 상사의 직영 주유소에 보관된 휘발유 재고량은 고작 2일분.
자칫하면 석유판매시장의 대부분을 다른 상사들에게 빼앗길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속이 타들어가는 타츠야 회장은 다들 아무 말이 없다는 점이 불만이었다.
“아. 한 회사가 있습니다.”
에너지 본부장인 효도 전무의 말이었다.
“무등그룹입니다.”
“무등그룹?”
사토이 타츠야 회장이 말했다. 그는 왜 그런지 물었다.
“지난 1985년에 한국의 무등그룹이 100억 엔 대출을 한신은행을 통해 받았습니다. 그 때 무등그룹이 생산한 석유로 대출금을 갚았거든요. 한신은행은 우리에게 석유를 넘겼고 그 휘발유를 팔아 이익을 얻었지요.”
“좋아. 그렇다면 무등그룹과 연락하게.”
============================ 작품 후기 ============================
고베대지진 : 1995년 1월에 발생한 지진으로 한신-이와이 대지진이라고도 합니다. 실제 사망자 수는 7천여명인데 지진발생초기 집계된 수치는 대략 2600명이었고 그래서 당시 신문기사를 인용해서 실제 사망자 숫자보다 적었죠.
진짜로 사망자의 60% 이상이 노인들인데 집에서 자다가 뭐가 떨어져서 맞아죽거나(실제로 제 침대 위에는 벽시계가 있죠. 얼굴위에) 장롱이 쓰러지면서(붙박이가 아니라면) 깔려죽은 경우가 많죠. 방이 작다면 쓰러져도 다른 벽에 걸리니 깔려죽지는 않겠지만.
원래 고베는 당시 세계적 항만인데 이 지진 이후 물동량의 상당부분을 부산에게 빼앗기게 되죠.
재미있는 건 이 당시 환율이 1달러당 80엔까지 치솟았죠. 피해복구를 위해 일본의 보험사나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해외자산을 매각해서 엔화로 바꾸는 바람에요. 왜냐면 이 당시에도 일본은 세계최대채권국겸 세계에서 가장 많은 대외자산을 보유한 나라여서요.
그래서 95년 일본은 제로성장을 하게 되지만 1인당 GDP가 42800달러까지 치솟죠. 이 때 미국은 28,000달러에 불과했죠. 이후 96년에는 피해복구가 이루어지면서 96년 1/4분기 14%라는 경이적 성장을 하고 전체로도 5%대의 성장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