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의 시대-48화 (48/159)

48화

다음날, 도쿄경제신문에서 재경원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기사가 실렸다. 한국 재경원의 꽉 막힌 태도에 대한 기사였다.

그러나 재경원은 정작 아무런 반향이 없었다. 새로 은행국장으로 부임한 유찬세는 언론플레이 따위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경원이 움직이질 않네요."

박기범 차장이 말했다. 일단 미국 외환은행에 예금한 1500만 달러조차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아무리 재경원에 MMF같은 상품투자를 통해 이윤을 얻을 수 있다는 근거를 내세워도 허가가 떨어지지 못했다.

"미치겠구만. 원래 투자금액을 3천만 달러로 잡아놓았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있으니. 오 사장님은 뭐하느냐고 닦달만 하시고. 우리로서도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 같고."

황 전무는 짜증이 난다는 듯한 눈초리로 말했다.

"아마미 기자를 이용해서 재경원에 불리한 기사를 써도...."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고작 신문기사 하나에 넘어갈거라고 본다면 자네가 정신줄 놓은거야. 아마미 기자가 해준게 뭔데? 고작 팔공그룹하고 개발공사 엿먹일때? 정신차려. 신문 따위가 정부를 움직일 수는 없다고."

호통을 치면서 그가 말했다.

"박 차장. 요즘 너무 해이해졌어. 좀 나사가 풀린 것 같다는 말이야. 대체 일본 기자 이용해서 무슨 덕을 보겠다는거야?"

황 상무는 의자에서 거칠게 일어났다.

"자네가 일단 자금팀 최고 책임자이긴 하지만 좀 정신을 차리란 말이야. 자금지출건. 특히나 물품대 같은 건 빼고 자질구레한건 과장들에게 넘겨. 우선적으로 1500만 달러. 송금제한조치를 풀어야 한다고."

"그걸 풀기 위해 뇌물을 준다면 안되잖아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거야? 우리는 원래 그런거 없는 회사야. 박 차장. 그런거 잘했잖아. 지난 83년인가? 한일경협자금 받아낸것 처럼 뭔가 든든한 백을 쓰든지. 어쨌든 우리는 정부규제를 뚫어야 한다고."

황 전무는 박기범 차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전무실을 빠져나온 그는 착잡한 심정이었다. 1985년. 일본에서 엔화대출을 받을 때는 정부가 그다지 규제를 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국내였다.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대외송금을 막아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외환관리법에 얼마나 저촉이 될지, 그 세부사항은 다 몰랐지만 일단은 재경원이 규제를 풀도록 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는 것은 확실했다.

"미치겠네."

얼마전에 아내와 함께 본 비디오가 떠올랐다. 아파트 근처 비디오 방에서 빌려본 영화 '플래시댄스'. 아이린 카라의 'What a feeling'과 마이클 셈벨로의 'Maniac'이 절묘하게 겹치며 감동을 준 영화.

아내는 주인공 여배우인 제니퍼 빌즈를 보고 흑인이라고 했고 그는 백인이라고 우겨댔다. 그들에게는 흑인 아니면 백인이라는 양분된 관념만이 있었다. 주인공 여배우가 흑인인지 백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1994년 현재까지도) 상당히 감동적이었다.

"젠장. 그 영화처럼 부잣집 남자가 도와주기라도 하면 모를까. 이건 답이 없네."

그는 혼잣말로 투덜거리면서 의자에 앉았다. 그날 오후. 퇴근길에 그는 잠시 집 근처 레코드 가게에 들렀다. 주인은 박기범 차장을 잘 알고 있었다.

"자주 오시네요. 음반 새로 나온거 사시게요? 머라이어 캐리?"

"아니요."

그는 축 늘어진 어깨를 힘겹게 일으켜 세우면서 말했다.

"루퍼트 홈스 앨범 있나요?"

"오래된건데. 찾으시는 분들이 아직도 있네요."

"그래도 명색이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던 노래라서요. 원래 빌보드 1위만 들으니."

주인은 미소를 지으며 테이프들이 가득 쌓여있는 다락 맨 위에서 먼지가 많이 쌓인 테이프를 하나 꺼냈다.

"참 오래됐죠."

다른 테이프 사이에 끼여있던 터라 테이프 커버가 변색되지 않았지만 제목이 적힌 그래서 노출이 된 부분은 많이 색이 바랬다.

"그거 줘요."

박기범 차장은 테이프 값을 지불하고 가방에 넣은 채 집으로 왔다. 아파트에 들어가자 아내가 남편을 반겼다.

"오늘은 일찍왔네."

일찍왔다고 말은 했지만 시계를 보니 8시였다. 그날은 정시에 퇴근을 했는데도 8시에 도착했다.

"정시퇴근했거든."

양복 웃옷을 벗어서 옷걸이에 건 후, 사온 테이프를 카세트 플레이어에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I was tired of my lady,

we'd been together too long.

Like a worn-out recording,

of a favorite song.

So while she lay there sleeping, I read the paper in bed.

And in the personals column, there was this letter I read:

"If you like Pina Coladas, and getting caught in the rain.

If you're not into yoga, if you have half-a-brain.

If you like making love at midnight, in the dunes of the cape.

I'm the lady you've looked for, write to me, and escape."

루퍼트 홈즈의 목소리가 무등전자에서 만든 카세트플레이어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러는 동안 박 차장은 노래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재경원의 압박으로부터 도망치면 되는 것이다. 재경원이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도록 말이다. 그리고 관련법규가 없다면 어떠한 이유로도 정부는 무등그룹을 제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규제를 피하가면 하면 된다. 그렇다면 주식투자라고 하지 말고 다른 방법으로 적당히 둘러대고 도망치면 된다. 이미 미국의 헤지펀드들이 사용하는 이른바 '조세 회피'에 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와서 밥 먹자."

아내가 불렀다. 기분 좋게 웃으면서 그는 식탁으로 갔다. 아내가 차려준 저녁을 평일에 먹는 것도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외식이라도 할걸 그랬어."

"뭐 먹게?"

"랍스터라도 먹어?"

"우리나라에도 수입이 돼? 미국사람만 먹는거지."

그는 한번 미소를 짓고 아내가 정성들여 만들어준 저녁을 먹었다.

회사로 출근한 그는 자금결제 승인을 받으러 황 전무에게 갔다. 그리고 결제파일들과 함께 말을 건넸다.

"전무님. 제가 어제 생각했는데,"

"뭔생각?"

서류를 들여다보며 도장에 인주를 듬뿍 믇힌 황 전무는 그를 쳐다보았다.

"재경원의 단속을 풀 수 있는 방법 말입니다."

"정말이야? 무슨 좋은 아이디어라도?"

"물론입니다."

황 전무는 눈을 크게 뜨고 박기범 차장을 쳐다보았다. 황 전무는 그의 입에서 뭐라도 희망적인 말이 나올까 기대했다.

"미국으로 투자를 한다면 재경원이 반대하겠지만 페이퍼 컴퍼니를 세워서 그것을 인수하는 걸로 바꾸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인수대금은 미국에 증권투자를 하도록요."

"그런데 그게 가능할 것 같아? 페이퍼 컴터니라. 미국에 세운다면 그것도 쉽지는 않을거야."

"제가 알기로 페이퍼 컴퍼니 설립은 쉽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나 이런 국가가 아니라 저기 멀리 있는 버진 아일랜드나 그런 곳이요."

이 말에 황 전무는 미소를 짓고 가죽 시트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알겠어. 얼마전에 이코노미스트 영문판에 나오더라고. 오프쇼어 택스 이베이전(Off-shore tax evasion. 역외세금회피)"

"그거 좋죠."

황 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내가 알아보도록 하지. 자네도 알아는 봐."

"알겠습니다."

박기범 차장은 대답을 했다. 황 전무가 도장을 찍은 후, 서류를 가지고 다시 자금팀으로 돌아와서 그 결재결과대로 자금을 집행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 책상에 가득 쌓인 서류를 또 검토했다. 그러면서도 페이퍼 컴퍼니를 세우는 방법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그래서 자신을 가리켰던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를 찾아갔다.

졸업 후 거의 14년만에 찾아오는 학교였다. 지금은 대기업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여기 학교를 다시 보니 뭔가 기분이 새롭고 과거의 추억이 다시 떠올랐다.

"대학때, 맨날 술만 마셨는데."

한번 미소를 짓고 그는 경영대학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 안에서 그는 교수실이 명기된 커다란 간판을 보고 자신을 가리켰던 재무담당 교수를 찾았다.

"이 양반. 아직도 교수질하네. 참 오래도 해먹어."

고개를 한번 갸우뚱거리고 그 교수의 연구실로 향했다.

"이게 누구야. 정말 오랜만이군요."

교수는 여전히 존댓말을 썼다.

"교수님. 오랜만입니다."

"그래요. 대기업 근무한다고 하더니만."

"여기 제 명함입니다."

명함을 받아든 교수는 기쁘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무등그룹 자금팀 차장이라. 어이구. 이거 학교에서 배운거 다 필요없죠? 원래 재무관리 심도있게 배워도, 투자론 A+맞아도 기업에 가면 다 무용지물이에요. 그러라고 배우는거지."

"그건 맞습니다. 오히려 투자론 배우면서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보다는 기업명 알고, GDP등 거시지표 분석하는 법, 차라리 이런 통계기초지식이 더 유용하더군요."

멋쩍게 웃으며 그는 의자에 앉았다.

"그래. 차장님께서 어인 일로 저를 찾아오셨나요?"

"교수님. 오프쇼어 택스 이베이전. 아시죠?"

"오. 역외 탈세지역이군요.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그 개념이 확실하지 않죠. 모르는 기업들도 많을겁니다."

"저희가 이번에 투자를 하려고 해서요. 역외 탈세 지역은 정부도 어떻게 조치를 못한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 쪽과 연락을 하거나 뭔가 정보루트를 뚫을 수는 없나요?"

그 말에 교수는 귀를 한번 후볐다.

"정확하게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저도 모르죠. 저는 교수로서 그런 회피 시에 세금처리나 회계처리에 관한 연구를 하는 거죠. 아마 현행법으로는 기업이 조세회피구역에서 벌어들인 돈에 대해 세금을 거두거나 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말 그대로 조세회피지역이라서 국세청이 파악을 할 수도 없죠. 말 그대로 국세청, 재무부로부터 완전히 해방된다고 할 수 있죠. 우리 기업이 탈세를 하는 과정에서 미국에 있는 법인이 엮이면 미국국세청과도 공조를 하겠지만 조세회피구역은 미국IRS도 건드리지 못하거든요."

이 말에 박기범 차장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걸 제가 알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연락을 하고, 이런건 모릅니다."

"교수직함도 맹탕이군요. 하하하."

"맞아요. 다만 차라리 나를 찾아오지 말고 골드만삭스나 JP모건 같은 외국기업을 찾아보는게 어떤가요?"

"어차피 그러려고요."

교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좋을 겁니다. 나중에 제가 개설한 과목중에 실무기업인 초청이 있는데 한번 오시죠."

"생각해 보겠습니다."

박기범 차장은 그렇게 말을 하고 교수실을 나온 후 택시를 타고 한신은행 서울지사의 김현섭 부장을 찾았다.

"무등그룹 박기범 차장입니다."

"네. 저희가 보내드린 자료는 검토해보셨나요?"

"맞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조세회피? 그 오프쇼어 택스...."

"오프 쇼어 택스 이베이전요?"

"맞아요. 그거요. 저희회사가 하려고 하는데 어떤 방법을 써야 하나요?"

"어려운거 아닙니다. 일단 무등그룹은 어떻게 하려고 하시는데요. 뭔가 구체적인 계획을 알아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구체적인 거라니요?"

의자에 앉은 박기범 차장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듯 말을 했다.

"별거 아닙니다. 거기에 페이퍼 컴퍼니를 세우는 것인지, 페이퍼 컴퍼니를 인수하려는 건지."

"저희는 페이퍼 컴퍼니 인수건을 고려합니다. 그래서 1500만 달러 정도를 빼내려고요."

그 말에 두 손을 기도하듯 모으고 생각에 잠긴 김현섭 부장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혹시 지난 번 해외투자건과 연관이 되어있다는 것 아니겠어요? 재경원은 현재 해외증권투자보다는 해외원자재개발, 공장건설위주로 외환반출을 허락하잖아요."

박기범 차장은 김현섭 부장의 시장을 바라보는 시선에 혀를 내둘렀다. 그도 그럴듯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김현섭 부장은 연봉이 거의 9천만원에 육박할 정도로 고소득을 올리는 외국대학출신 엘리트였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경제에 대한 전반적인 상황을 꿰뚫고 있었다.

"맞아요. 우리도 그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어서요."

"저희 한신은행도 이번에 조세피난처에 서비스를 개시하려고 합니다. 어려울 것 없습니다. 스위스로 결정하시죠. 미국에 증권투자를 하신다면 스위스의 OBS가 또 거대한 투자은행이니까요."

"일단 우리 전무님과 의논을 하고 연락드리죠."

박기범 차장은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그러지 말고 오늘 저녁때 한번 뵙죠. 식사도 하실겸. 어차피 하시려면 제대로 해야죠."

============================ 작품 후기 ============================

아이린 카라 (1959~) :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1980년 영화 Fame에 출연해서 유명해졌고 83년 영화 flashdance에 삽입된 what a feeling은 1983년 빌보드차트 6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83년 전체 누적순위 3위에 오름.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거냐면 83년 누적 음반판매량 2위가 마이클 잭슨의 Billie Jean이었음. 1위는 Police의 Every breath you take 마이클 셈벨로 (1954~) :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필자의 블로그에 자세한 설명이 있음. 참고 바람. 그의 Maniac역시 플래시댄스의 OST로 쓰였고 83년 2주 연속 빌보드 1위에 83년 누적차트 9위를 기록.

루퍼트 홈즈 (1948~) : 영국 출신의 가수. Escape(Pina Colada song)은 1979년 빌보드 1위를 기록했음. 12월달에 2주 연속 1위. 그리고 이듬해 1980년 1주 1위를 기록. 그래서 1980년도 전체누적차트 11위를 한 노래임. 1980년 빌보드 전체 누적1위는 블론디의 'Call Me'임. 2위가 핑크플로이드. 음악은 안좋아할지라도 이 정도는 알아야 함. 코스모폴리탄의 상식임.

제니퍼 빌즈 (1963~) : 미국 영화배우. 1983년 플래시댄스로 스타덤에 오름. 예일대 출신. 2004년부터 2009년까지 L워드에서 주연을 맡음. L워드 엄청나게 재미있음.

빌보드 : 미국의 음반누적순위. 일본의 오리콘이나 영국빌보드 같은 허접한 차트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인류역사상 가장 권위있는 음반 차트임. 여기 1등은 세계인이 다 알아야 할 정도임. 여기 빌보드 100위 안에만 들어도 평생먹고 살고 1위만 하면 배터지게 먹고 사는것. 그래서 1위를 밥먹듯이 한 가수들은 다 집 마당에 활주로 있고 자가용 비행기 타고 다니는 것.

스타크래프트밴이나 타는 우리나라의 가난한 가수들과는 비교가 안됨. 빨리 싸이가 빌보드 1위를 해야만 세계 음반사에 기록됨http://blog.naver.com/ltd1977 : 필자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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