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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시대-47화 (47/159)

47화

그는 택시를 잡아타고 과천 정부청사로 향했다. 재경원 청사건물에 도착한 그는 기업금융국으로 향했다. 무등그룹에게 해외투자금지를 내린 담당자를 만나보기 위함이었다.

안내데스크에서 용건을 말하고 출입증을 받은 뒤 대기실에서 담당자가 올 동안 기다렸다. 15분쯤 지났을 무렵,

"오래 기다리셨죠? 기업금융국 유찬세 국장입니다."

담당자로 보이는 공무원이 다가오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전 무등그룹 박기범 차장입니다. 저희 전무님께서 한번 가보라고 하셔서요. 저희 회사가 왜 외환관리법에 저촉되는지 모르겠네요."

국장급 공무원이 손님접대용 소파에 앉아서 말을 했다.

"무등그룹에서 오셨다고 했는데 대미투자건 때문에 오신 모양입니다. 물론 듣기로는 좋죠. 코카콜라나 필립모리스에 투자한다. 헌데 우리가 보기엔 위험하니까요."

"위험요? 말이 되질 않죠. 그 리스크는 다 우리가 부담하는 것이니까요."

"공장을 짓는다거나 원자재를 들여온다거나 하면 문제가 없겠지만 이런 경우는 글쎄요. 금액도 커서 쉽게 조치를 할 수 없는 경우죠. 어쨌거나 미국주식에 함부로 투자를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저희는 보고 있죠."

"망해도 저희가 망합니다."

박 차장이 발끈하면서 말했다. 그 말에 한번 크게 웃은 공무원이 말했다.

"하하. 결국 달러지 않습니까? 외환보유가 중요한데 그걸 기업이 함부로 쓸 수는 없죠. 원자재 구입이라든지, 공장건설 등의 국익에 맞게 해야지 해외증권투자라. 그것도 금융기관이 아닌 수출기업이? 무등그룹이 이 기회에 해외투자로 전업하시려나 보죠?"

"결국은 우리 책임하에 하는 거죠. 손해를 봐도 우리 잘못, 이익보면 우리가 잘해서. 그러니 그걸 외환관리법으로 묶는건 말이 안되죠."

박기범 차장의 말에 공무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가 충분히 검토한 바에 따르면 하지 말라는겁니다. 기업은 자기의 이익만 추구하지만 정부는 국가전체의 이익을 생각하지요.

그러니 하지 말라면 하지 말아요. 뭔 말이 이렇게 많아."

순간 박기범 차장은 기분이 아주 나빠졌다.

"그렇군요. 그래서 툭하면 보도블럭을 갈아엎나봅니다."

"요즘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사농공상 몰라요? 우리가 하지 말라면 그냥 하지 말아요. 귀찮게 와서 따지고 말이야. 그것도 맨손으로. 예의도 없고, 너무하단 생각 마 안하는기요?"

한번 숨을 크게 내쉰 후, 박기범 차장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하지만 표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국장님. 일단 알겠습니다."

"이렇게 숙이는 맛이 있어야지. 난 바빠서 이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박기범 차장이 말했다.

"국장님. 혹시 팝 좋아하세요?"

국장은 그 말에 의아해하면서 일단 자리에 앉았다.

"글쎄요. 뭐 그닥 좋아하진 않네요."

머리를 긁적이면서 그는 대답했다.

"저는 엄청 좋아합니다. 제가요. 이래봬도 1959년부터 1985년까지 빌보드 차트 1위를 다 꿰고 있습니다."

"그런 취미가 있는 줄 몰랐네요."

그냥 한번 농담이나 하자는 듯 편안한 마음으로 소파에 몸을 기댄 국장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전 특히 1970년대가 그야말로 최고의 기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한가지 말씀드리자면,"

어느덧 즐거움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말을 하는 모습을 본 국장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가볍게 판단했다. 그러나 그는 박기범 차장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70년대를 마감하는 79년이야 말로 최고의 시기였죠. 79년 미국 빌보드 1위한 노래가 어떤 게 있는지 아세요?"

"글쎄요. 난 잘 모르겠는걸?"

나름 흥미가 있다는 듯 대답했을 때, 박기범 차장이 말했다.

"글로리아 게이너의 "아이 윌 서바이브(I will survive)"

순간 국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노래 가사는 원래 중요하지 않아요. 제목이 중요하지. 아-이-윌-서-바-이-브. 1979년 최고의 노래였죠. 그래서 제가 79년을 사랑합니다."

박기범 차장은 손을 마구 흔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나갈 채비를 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기 전 그가 뒤를 돌아보면서 한마디를 더 했다.

"아. 전 마이클 잭슨의 광팬입니다. 가장 좋아하는 마이클 잭슨의 노래는요. 역시 79년 빌보드 1위곡인 '돈 스탑 틸 유 겟 이너프'에요. 충분히 가질때까지 멈추지 마라. 얼마나 멋져요? 그래서 제가 마이클 잭슨 음반 다 가지고 있죠. 우리 무등그룹도 마이클 잭슨의 팬이랍니다. 그럼 이만."

문이 닫히자 국장은 책상에 놓인 컵을 문에다 던졌다.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을 때, 박기범 차장은 신난다는 듯 미소를 지으면서 기분좋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You light up my life, You give me hope, To carry on.. 데비 분. 77년 빌보드 1위. 팻 분의 딸이지."

건물 밖으로 나간 그는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이번에는 서울역에 위치한 도쿄경제신문 건물로 향했다. 도착해서 바로 아마미 타카코 기자를 만난 그는 근처 카페에서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신은행서 일주일전에 봤는데, 사실 우리는 미국에 증권투자를 계획중이거든."

그 말에 그녀는 다급히 수첩을 꺼내들었다.

"총 투자금액은 3천만 달러. 코카콜라, 필립모리스, 마이크로소프트를 살거야. 그런데 정부가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몰아서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방금 재경원가서 약올려주고 왔지."

"당신은 참 배짱도 좋아."

"거기 인간들도 영어를 알더라고. 물론 내가 해석까지 해 주었지만."

"대체 뭐라고 했기에 그런거야?"

아마미 타카코 기자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당신도 팝 좋아해?"

"갑자기 뭔 소리야. 빠가야로."

그 말에 한번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랬지. 난 글로리아 게이너의 'I will survive'를 좋아한다고. 그리고 덤으로 마이클 잭슨의 'Don't Stop til You Get Enough'도 좋아한다고."

"아하. 알겠어. 재경원하고 싸우자는 선전포고였구나."

"거기도 고시를 붙을 정도의 머리는 되는지 이해는 가더라고. 내가 또 그랬지. 노래는 가사가 중요하지 않다. 제목이 중요하다."

"똑똑하군."

미소를 지으며 아마미 타카코 기자는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그 쪽은 누구 좋아해? 비틀스와 엘비스 프레슬리 정도는 알겠고."

"누굴 바보로 알아? 나도 고등학교 시절에는 비틀스 팬이었다고. 일본공연할 때 많이 갔었어. 물론 올리비아 뉴튼 존이 좋더구만."

"81년 빌보드 1위인 physical?"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박기범 차장이 말했다.

"밝히긴. 노처녀라 그렇구나. 일단 이 정도면 보상이 됐지? 기사 좀 잘 써줘. 혹시 알아?

내가 어떻게든 올리비아 뉴튼 존 내한공연 티켓 구해다 줄지."

(81년 올리비아 뉴튼 존의 'Physical'의 뮤직비디오에서 근육질의 보디빌더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 섹슈얼한 내용이 많아서 논란이 되기도 했었음. 유튜브에 가서 확인해보세용)

"퍽이나."

"그래서 좀 도와줘요. 신문에다가 재경원을 마구 비난해. 기업의 해외투자를 막는 존재라고. 내일 신문에 안나오면 내가 뉴욕타임즈에다가 보낼거야."

"그래. 그 정도는 해주지. 원래 우리 도쿄경제신문의 모토가 '자유, 인권, 민주주의를 지향하라'니까."

"그렇다면 자유시장경제의 지원자일테니. 그렇게 해줘. 난 대학에서 자유시장경제야 말로 사회적 약자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고 기득권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제도라고 배웠거든"

"대체 어느 대학을 나왔기에?"

그렇게 대답하는 아마미 기자를 뒤로하고 그는 황급히 카페를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다시 회사로 복귀했다. 다시 돌아온 회사에서는 해야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뭉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유(서류) 라이트 업 마이 갓 댐 라이프"

그는 재빨리 서류업무를 끝냈다. 이미 7시를 넘긴 시각. 오늘도 야근을 해야 했다. 그러나 저녁을 먹고 오면 왠지 일을 하기 싫기 때문에 부하직원에게 간단하게 먹을 샌드위치를 하나 사오라고 부탁을 했다.

"수고 좀 해줘. 저기 영수증은 꼭 가져오고. 그리고 다음에 점심 한끼 사줄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역시 직장인은 야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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