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다음날 오후, 택시를 타고 한신은행 한국지사에 도착했다. 그 때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1990년에 추방된 아마미 타카코 기자였다.
"아니. 이게 누구야. 다시 돌아왔네."
박기범 차장은 반갑다는 듯이 말했다.
"어제 왔어. 역시 정권이 바뀌니까 다시 들어올 수 있더라고."
"근데 왜 여기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날 뒤쫓아온 건 아닐테고."
"한신은행 취재온거야. 한국채권시장에도 발을 들여놓는다고 하니까. 자세한 걸 알아야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둘은 같이 은행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아마미 기자는 취재일정에 잡힌 담당자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고 박기범 차장은 기업뱅킹 부서에서 한신증권 담당자와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한신은행 김현섭 부장입니다."
"네. 무등그룹 박기범 차장입니다. 저희 회사에서 해외증권투자를 계획하고 있어서요. 자세한 자료를 얻고 싶어서요."
"해외증권투자라. 어디요? 일본에요? 아니면 미국엘?"
"미국증권투자입니다."
그 말에 한신은행 부장은 놀란 듯 말을 했다.
"미국투자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세계최대의 자본시장이니만큼 가치는 있겠죠"
"네. 물론 계획이라서요. 검토해보고 안할 수 있습니다만. 일단 좀 알아야 의사결정을 내리지 않겠어요."
"그렇군요. 어떤 정보를 저희가 드리면 될까요?"
그 말에 박기범 차장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미국주식정보죠. 저희가 지금 보고 있는 미국주식은 크게 세 개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코카콜라, 필립모리스죠."
"음. 의외네요. 컴퓨터와 음료, 담배 관련 종목이라."
김현섭 부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렇죠. 미국을 대표하는 거 아닙니까? 제가 아무래도 수출을 주로 하는 대기업의 자금담당 차장이다보니 그런걸 많이 느낍니다. 반미를 외치는 중동국가 시민들도 콜라를 마시니까요. 무엇보다 제가 콜라를 좋아해서."
"일단 그 데이터는 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1993년 재무제표와 주식거래가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기본적인 데이터는 확보되는 셈이지 않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어차피 저희는 한신은행과도 거래를 트고 있으니 고객거래차원에서도 잘 좀 도와주세요. 제가 알기로 미국 국채시장에서도 큰 영향력을 가지는 게 한신은행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뭐 필요하신 데이터는 충분히 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에게 명함을 전달한 박기범 차장은 인사를 하고 한신은행을 빠져나왔다.
한달이 넘게 지나서야 한신은행으로부터 서류가 가득 담긴 두터운 우편물이 도착했다. 봉투를 뜯자 그가 요청한 기업들의 재무제표가 들어있었다.
맨 위에 놓인 재무제표는 코카콜라의 것이었는데 두터운 재무제표를 전부 다 읽을 수 없어서 표와 숫자 위주의 자료를 찾는데에만 집중을 했다.
코카콜라의 재무제표를 본 박기범 차장은 깜짝 놀랐다. 이 회사의 매출액은 139억 5천7백만 달러. 영업이익은 31억 달러. 순이익은 21억 7천6백만 달러였다. 그는 책상 옆에 있는 계산기를 집어들었다.
"순이익이 2176. 매출액은 13957. 그러면 매출액 대비 순이익률이 몇 퍼센트?"
퍼센트 기호가 쓰여진 버튼을 부르자 15.59가 계산기에 표시되었다. 15.59%라는 뜻이다. 이 말은 회사가 100원어치 물건을 팔아 세금내고 직원월급주고 원자재값 내고 남은 순수한 이익이 15.59원이라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엄청났다.
무등그룹의 경우 93년 매출액 1조 2800억. 순이익 870억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엄청났다. 무등그룹의 매출액 대비 순이익률은 고작 6.79%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메모지에다 볼펜을 들고 숫자를 적었다. 92년도 코카콜라의 매출액은 130억 달러. 단순 계산으로도 6%나 매출액이 늘었고 순이익도 16억 달러에서 늘어났다. 불과 2년 치 재무제표에 불과했지만 코카콜라 주식은 사 놓아도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박 차장."
황 전무가 그를 불렀다.
"전무님. 오셨어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전무는 다가와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 미국주식 투자건 말이야. 자네한텐 미안하지만."
순간 투자중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박기범 차장은 생각했다.
"사장님이 자네의 분석능력을 신뢰를 못하셔서 미국의 골드만삭스를 통해 정보를 얻었나봐. 그리고 6백만 달러가 아니라 3천만 달러 투자로 늘리라고 하시더라고. 코카콜라에 천만 달러, 마이크로소프트에 천만 달러, 필립모리스에 천만 달러."
"잘됐네요. 오히려 더 좋은 기회죠."
"문제는 당신 능력을 못 믿는거지. 아이디어는 물론 좋지만 말이야."
"약간 서글프군요. 지금 분석중인데."
"그래. 분석 결과는 뭐야?"
"코카콜라는 무조건 사라는 것이죠."
황 전무는 콧웃음을 치면서 대답했다.
"자네도 산소만 낭비하는 인간은 아니구만.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부터 진화했어. 어쨌든 무조건 사라고 하시더군. 한 3~4년만 기다리면 떼돈벌거라고 하시니까. 그건 좋은 것이지."
황 전무는 그리 말하고 곧 자리를 떴다. 미국 수출대금 중 1500만 달러는 외환은행 뉴욕지사에 예치시켜놓았고 이제 1500만 달러를 환전해서 입금시켜야 했다.
"외환관리법에 저촉이 되는지 잘 따지고."
황 전무의 지시사항에 박기범 차장이 대답했다.
"일단 1500만 달러는 환전을 미리 해두었습니다. 외환은행에 예치시켰고 뉴욕으로 보내기만 하면 됩니다."
"좋아."
하지만 곧 문제가 발생했다. 재경원이 시비를 건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미국주식에 투자를 한다는 것 자체를 허가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국 뉴욕 외환은행 지점에 입금된 1500만 달러, 서울 지점에 있는 1500만 달러는 모두 무등그룹의 본업인 섬유, 석유정제업에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손에 쥔 황 전무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아니. 이 자식들. 왜 시비를 거는거야?"
"글쎄요. 충분히 설명했는데도 이런다니."
황 전무는 화가 난 듯 책상을 내리쳤다.
"지금은 1994년이야. 아직도 우리가 5등 국민인줄 아는 모양이지?"
이 말에 박기범 차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쨌든 재경원의 허가를 받아야 미국으로 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일단 미국에서 주식은 사들이고 있잖습니까?"
"재경원 서류는 본거야? 미국에서 주식투자 하지 말라고 하잖아. 원자재 결제대금과 딜러망 인센티브를 제외한 모든 금액은 국내송금하라는 재경원의 명령이야."
"안지켜도 되죠. 적어도 미국에 있는 돈은 주식을 사도 되죠. 문제는 국내에 있는 돈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죠."
"이봐. 이봐. 은행에서 송금을 시키지 않는다고. 설령 정부의 조치를 어기면 그랬다가 세무조사 당하려고? 국세청이 트집잡으면 세금폭탄 맞아."
"우리는 그동안 세법대로 충실히 내지 않았습니까?"
"박 차장. 국세청에서 남자를 가리켜 여자라고 하면 여자가 되는거야. 무소불위의 국세청이 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황 전무가 호통을 쳤다. 미국에서 주식은 빨리 사야 하고, 필요한 대금을 납부해야 하는데 송금자체를 하지 못하니 갑갑할 따름이었다.
이게 은행간의 송금시스템의 문제나 전산문제가 아니라 단지 정부의 허가때문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고작 1500만 달러라."
박기범 차장은 투덜대면서 의자에 앉았다.
"에이. 망할놈들. 아주 기업을 문 닫으라고 하는구나."
재경원이 쉽게 허가를 해줄지는 몰랐다. 친구인 송영찬이 비록 재경원 부국장으로 있지만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는 은행국에서 근무하지 않아서였다.
"젠장. 또 아마미 기자를 써먹어야겠군."
박기범 차장은 급히 정장 웃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걸어나가면서 과장급 직원에게 말했다.
"외근나가니까 전화오면 메모해줘요. 늦을지 모르니 자금지출결제건은 자네 선에서 도장찍고 전무님께 보고하고. 나 외근나갔다고 하면 아실거야."
"알겠습니다."
박기범 차장은 회사 건물 밖으로 나갔다. 뭔가 갑갑했다.
'왜 기업을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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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모리스 : 미국의 담배회사. 2003년에 사명을 알트리아로 개명. 말보로 담배를 만드는 유명한 기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