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의 시대-45화 (45/159)

45화

1994년. 다시 자금팀 차장으로 복귀한 그는 신산업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다.

"뭐 없어?"

자금결재를 받으면서 황 전무가 말했다.

"신산업 말이야."

"글쎄요. 저도 딱히 아이디어가 없네요."

박기범 차장이 대충 얼버무리듯 말했다.

"그래도 독일까지 갔다 왔으니 뭐라도 있어야지."

"거기도 뭐 별게 없어서요. 유럽이 뭐 별게 있나요? 독일과 영국, 프랑스를 다 합쳐야 일본과 맞먹는 다면서요. 거긴 이제 끝났어요."

짜증난다는 듯 황 전무는 서류에 대충 도장을 찍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사장님이 신산업을 외치세요?"

"아니. 정부도 지금 신경제 운운하면서 날뛰는데 우리도 신산업 해야지. 어쩌겠냐고."

"원래 정부랑 엇박자 내는걸로 우리 무등그룹이 유명하죠."

황 전무는 책상위에 있는 라디오를 틀었다. 음악이 때맞춰 흘러나왔다.

-이번 시간에는 미국 빌보드 차트 1위곡을 연도별로 들어보겠습니다. 제 방송을 들으시는 분들은 다 아시죠.

모타운(Motown : 디트로이트를 약칭. Motor Town의 줄임말로 슬라이 더 패밀리스톤, 다이애나 앤 슈프림스 같은 흑인 뮤지션들이 주로 활동한 지역), 미국 펑크 락, 웨이브, 재즈. 이번에 들으실 노래는 1966년 빌보드 차트 1위곡들입니다. 66년 빌보드 차트 전쟁의 포문은 사이먼 앤 가펑클의 사운드 오브 사이런스가 열었죠. 다음은 역시 비틀스가 이어나갔죠.-

"비틀스 좋아해?"

황 전무가 물었다.

"그럼요. 66년이면. 프랭크 시나트라의 딸인 낸시 시나트라가 빌보드 1위에 진입한 연도잖아요. 제가 팝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요즘은 머라이어 캐리나 흑인 가수들이 많이 나오긴 하지만 역시 최고의 팝은 64년부터 85년까지겠죠."

"좀 아는구만."

안경을 고쳐쓰면서 다시 추억에 잠시 잠겼다.

-66년 히트곡중 하나인 마마스 앤 파파스의 먼데이, 먼데이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성 보컬 중 하나인 캐스 엘리엇은 지난 74년에 죽었죠. 심장마비로. 그러니까 살좀 빼라니까. 자. 듣도록 하지요.-이윽고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Monday Monday, so good to me,

Monday Monday, it was all I hoped it would be Oh Monday morning, Monday morning couldn't guarantee That Monday evening you would still be here with me.

Monday Monday, can't trust that day, Monday Monday, sometimes it just turns out that way Oh Monday morning, you gave me no warning of what was to be Oh Monday Monday, how yould cou leave and not take me.

순간 아이디어가 번개처럼 스쳤기에 박기범 차장이 입을 열었다.

"전무님. 좋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뭔데?"

그는 손가락으로 라디오를 가리켰다.

"이거 팔죠."

"라디오? 이미 팔잖아. 쓰레기라 그렇지."

박기범 차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음반을 팔자고요. 무등화학에서 카세트 테이프를 만들고 거기에 이 빌보드 음반을 담아 팔면 되죠. 법적인 거래는 무등 미국본부에서 일괄진행하고요. 그러면 대박이지요. 영어공부 어쩌구 하면서 가사까지 조그만 핸드북으로 곁들여 팔면 나름 팔릴걸요?"

"얼마나 팔리겠어?"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박기범 차장은 확신했다.

"대학가에 팔면 되잖아요. 게다가 팝에 대한 관심은 지금도 아주 높으니 잘하면 돈 좀 벌겠죠. 어차피 카세트 테이프는 우리 무등 화학도 만들어 파니까요. 그건 잘팔리잖아요."

"그럼 무등 미국본부를 쪼면 되겠군."

"그렇죠. 당장 미국음반협회랑 손잡으면 되죠. 미국본부 사람들이 가장 잘 알겠죠."

황 전무는 10초 동안 생각을 하더니 결정을 내렸다.

"좋아. 해보자고. 필요한 자금은 우리가 대야겠지?"

"네."

"그런데 말야. 수출은 못하잖아. 집집마다 이 음반세트를 가지고 있지는 못할 것이고. 수출 못하면 소용없어."

"굳이 수출을 한다면 우리 노래를 가지고 미국으로 가야겠죠."

"야. 한국말로 된 노래를 누가 듣니? 너 소련노래 들을래? 미국노래 들을래? 게임 끝이잖아."

일리 있는 말이었다. 어찌보면 국내 시장에 음반을 파는 것은 너무 이윤이 적을 수 있고 미국시장 진출을 위해 우리의 음반을 파는 것은 미친 짓에 가까웠다.

"그럼 우리가 무등 레코드를 설립하고 우리 가수들을 영어공부 시켜서 내보내죠. 스웨덴의 아바처럼요. 제가 1964년부터 1985년까지 빌보드 차트 1위곡을 모두 분석해보니까요."

"쓸데없는 짓한다."

"미국 빌보드에서 1위 하려면요. 무조건 영어로 노래가사를 써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당연하잖냐. 미국인들이 외국어를 알겠어?"

"왜요. 우리나라 차트 1위는 한때 마이클 잭슨이 휩쓸었잖아요."

"우리랑 미국이랑 같니?"

맞긴 했지만 반박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 무등 레코드에서 키운 가수들이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해서 미국으로 가는거죠. 여성 보컬로 구성되거나 아바처럼 남녀 혼성 그룹으로요. 철저한 미국화를 하지 않으면 안돼죠. 좋든 싫든 생긴 것도 조금이나마 백인스럽게, 행동하는 것도 백인스럽게 해야 살아남잖아요. 전무님도 생각해보세요. 요즘 세상에 누가 꽹가리 치는 소리를 들어요? 차라리 킴 칸스의 허스키한 보이스를 듣지."

황 전무는 여기까지 듣고 오남현 사장실로 뛰어들어갔다. 아이디어를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5분 뒤 그는 박기범 차장을 불렀다.

"사장님이 찾으셔. 가 봐."

"뭐래요?"

"나 엄청 깨졌어."

여기까지 듣고 주눅이 든 채 그는 사장실로 들어갔다.

"박 차장 왔어?"

"네."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바로 오 사장의 질책이 가해졌다.

"어이. 박씨. 쥬글랭?"

"잘못했습니다."

"매출액이 1조 5천억에 달하는 거대 기업인 우리 무등그룹이 고작 음반따위나 팔아? 그런 헛소리는 하지도 말고. 당장 가서 일이나 해. 그럴거면 신산업 하지를 마."

고개를 숙이고 사장실을 빠져나왔다.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했다. 신산업 프로젝트를 하느라 머리를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박 차장."

기획실 차장급 직원 하나가 다가왔다.

"왜. 사장님한테 너 죽을래하고 협박받았는데."

"음반 팔자고 하니까 그렇지. 차라리 신디 로퍼(Cyndi Lauper 1953~. 미국의 팝 가수. 80년대 마돈나와 쌍벽을 이루던 가수. 83년 빌보드 1위곡인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이 있음) 내한공연을 추진하는게 더 나을거다."

"아이. 그놈의 음반. 아주 너한테도, 사장한테도, 다 깨지는구나. 이거 몇 달 가겠구만."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그가 투덜거렸다.

"그렇겠지. 그러니까 그냥 아무 말 안하고 물어보면 하고 있습니다. 어렵네요. 하고 둘러대야지. 그러다가 월마감 시점이 오면 또 일하느라 바쁘니 그런걸로 괴롭히지도 않고."

"그걸 잘 넘어가야 하는데."

기획실 차장의 말에 박기범 차장이 대답했다.

"직장생활을 더 능구렁이처럼 해야 하는데."

아쉽다는 듯 박기범 차장을 입맛을 다셨다.

"내가 배운게 재무파트니까 회사의 여윳돈으로 주식투자나 하자고 제안할까?"

이 말에 기획실 차장은 비웃었다.

"짤리고 싶어 발악하는거야?"

하지만 그는 진지했다.

"봐. 자네도 컴퓨터 쓰잖아. 운영체제가 뭐야.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3.0아니야? 도스(DOS - Disk Operating System)거나?"

"그렇지."

"마이크로소프트 주식사자고 제안하자. 한 몇백만 달러만."

이상하게 쳐다보는 기획실 차장의 눈을 뒤로한채 그는 급히 황 전무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전무님."

"뭐야? 아까 깨지고 금방 또 들어와? 무슨 자격으로?"

"전무님. 진짜 좋은 겁니다. 노 리스크, 하이 리턴이죠."

"아니기만 해봐. 빌딩에서 던져버릴거야."

툴툴대듯 황 전무가 말했다.

"주식투자입니다."

"거봐. 빌딩 아래로 떨어질 준비 해."

황 전무는 잘 만났다는 듯이 와이셔츠 소매를 걷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주식을 사는거죠. 그리고 전 콜라를 좋아하니 코카콜라 주식도. 4년 전에 개발공사를 완전히 엿먹였잖아요. 거기는 거품이 끼었을 때 뛰어들었고 우리는 미국의 기술집약 회사에 투자를 하는거죠."

"그런데 왜 하필 코카콜라야. 마이크로소프트는 이해가 가는데."

"제가 콜라를 좋아해서요."

"이런 썅."

황 전무가 화를 벌컥 내자 박기범 차장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니죠. TV못보셨어요? 러시아 사람들도 보드카 대신 콜라를 마셔요. 말보로 피고. 즉 콜라, 말보로는 미국의 문화상품이잖아요. 이제 전세계가 미국의 영향력 아래 지배가 되는 만큼 우리도 콜라를 더 많이 마시겠죠. 새로운 동구권 시장도 콜라소비가 늘겠고요."

"그럼 말보로 제조사도 투자를 하라는거야?"

"간단하게 가죠. 코카콜라, 마이크로소프트, 말보로. 이 회사에만 투자하고 말죠. 각각 100만 달러 정도만요."

박기범 차장의 말에 황 전무는 차분하게 생각을 하기 위해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미국 자동차는 안되나?"

"일본차한테 처발리는 걸 왜 사요? 그 놈을 20년 뒤면 파산할겁니다."

확신에 차서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황 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사장님한테 말을 해보지. 가서 일이나 하라고."

자리로 돌아간 그는 다시 일에 열중했다. 한시간 정도 지난 후 전화벨이 울리고 전화를 받았다.

"자금팀 박기범 차장입니다."

비서실에서 부르는 전화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곧바로 사장실로 향했다.

"박 차장. 이번엔 좀 제대로 하는구만. 논리적으로 탄탄해. 그리고 나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어."

오사장의 말에 마음을 놓았다.

"내 큰아들이 미국유학을 갔잖아. 거기서 장학금 받고 뭐 해서 번 돈 5천 달러를 미국 증권에 투자했다는군. 그게 하필 코카콜라야. 꽤 재미를 본 모양이더라고. 장기투자를 하면 무조건 벌게 되어있으니까."

박기범 차장은 조금 더 부연설명을 했다.

"우리는 증권 회사가 아니니까요. 적당히 봐 가면서 투자를 해야겠죠. 그리고 종목도 담배, 콜라, 소프트웨어. 이 정도만 하죠."

"그럼 추진해 봐. 총 투자금액은 6백만 달러. 우리나라의 인플레이션이 미국보다 높으니 5년 안에 1달러당 1000원을 돌파하게 될지도 몰라. 그럼 환차익도 두둑할거야."

"알겠습니다. 그런데 사장님. 왜 하필 6백만 달러를."

"3의 배수잖아. 거기다가 파라 퍼셋의 남편을 내 아내가 좋아해서."

'당신이 파라 퍼셋을 좋아해서잖아.'

속으로 말을 한 뒤에 그는 밖으로 걸어나갔다. 원래 미국 드라마 '미녀 삼총사'의 광팬이었던 오 사장은 무등그룹의 미국 모델로 파라 퍼셋을 쓰려고 했었다. 경영진들이 다 반대해서 그 꿈을 접었지만.

사장의 허가가 떨어진 만큼, 그는 기획실로 가서 미국 증권시장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다.

"사장님께서 정말로 그렇게 말씀을 하셨단 말이지. 코카콜라, 말보로 만드는 회사, 마이크로소프트라"

기획실 차장이 말했다.

"이번 주 내로 자료는 구할게. 그런데 어느 증권사를 통해서 할지 생각해봤어?"

"어차피 국내 증권사는 미국까지 투자할 전산망이나 그런 것들이 구비가 안 되어있을테니까. 현재 국내에 들어와있는 미국계 증권사를 이용해야지. 아니면 일본쪽 증권사들도 좋고."

"음반회사들도 사."

"음반은 왜? 콜롬비아 레코드?"

그 말에 기획실 차장이 미소를 지었다.

"올해 94년 빌보드 전쟁의 포문을 누가 연 줄 알아?"

"머라이어 캐리잖아. 날 바보로 아니? 내가 1970년에 용돈 헐어서 레코드 사모았다가 아버지한테 연탄집게로 두들겨 맞고 공부해서 서울대 간 사람이야. 이거 왜이래. 빌보드 1위곡은 다 내 머릿속에 있다고."

"야. 이거 서울대 안나온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회사 다니겠어?"

"같은 차장인데 뭐. 사회나오면 똑같지. 그나저나 원래 빌보드는 엄청나게 복잡해야해. 93년을 보라고. 깨끗하잖아. 소수가 독점하는데 그건 아니야."

다시 자금팀으로 들어온 그는 또 서류를 하나씩 검토하며 도장을 찍었다. 일단 믿을만한 정보통이 필요했다.

약간 시간이 났을 때, 그는 컴퓨터를 통해 미국증시에 대한 정보를 또한 찾아보았다. 하지만 상당한 양의 정보가 제한적이었다. 그랬다. 1994년의 세계는 지금과 판이하게 달랐다.

무엇보다 정보가 많이 부족했다. 원하는 데이터를 쉽게 찾는 건 막대한 비용을 수반했다.

'어디가서 찾는 담.'

다행히 그에게는 끈이 있었다. 9년 전 돈을 빌렸던 일본의 한신은행. 이곳은 93년. 서울에 지점을 내고 주로 한국에 진출한 일본기업을 대상으로 기업뱅킹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리고 지난 92년. 한신증권을 설립하고 자회사로 편입시킨 한신은행은 93년 초. 미 재무부 국채를 5억 달러 어치 사들이는 등 국제금융시장에서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을 알고는 있었다.

'한신은행'

시간을 내어 한신은행을 통해 어느 정도 정보를 얻으리라 마음먹은 그는 또 결제해야 할 서류가 한뭉치 오자 한숨을 내쉬면서 도장에다가 인주를 듬뿍 묻혔다.

"젠장. 수은 중독 되겠구만."

============================ 작품 후기 ============================

파라 퍼셋 (1947~2009) - 미국의 영화배우. 1976년 미녀삼총사 (Charlie's Angel)로 스타덤에 오름. 남편이 리 메이저(Lee Major)로 6백만 불의 사나이 주인공ABBA(1972~1982) - 스웨덴의 남녀 혼성그룹. Agnetha, Bjorn, Benny, Ani-Frida로 구성됨. 77년 전미 빌보드 1위곡으로 'Dancing Queen'이 있음.

킴 칸스(1945~) - 미국가수. 1981년 'Bette Davis Eye'로 전미 빌보드 10주연속 1위차지. 81년 앨범 판매 1위왕. 허스키한 보이스로 여성 로드 스튜어트라는 별명이 있음. 금발미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