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의 시대-43화 (43/159)

43화

미국영화를 보면 대도시 내부의 도심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단칸방에 그런 비좁은 듀플렉스에서 산다. 그런 수준의 작은 아파트였다.

하지만 믿음이 가는 구조였다 뭐랄까 적어도 거주자의 생명을 철저하게 보장하는 장소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의 방에는 작은 소형스테레오가 있었다. 이제 LP의 시대는 가고 CD와 카세트 테이프의 시대가 다가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독일에서 산 엘비스 프레슬리의 카세트 테이프를 넣고 버튼을 눌렀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한 박 차장은 본격적으로 일에 들어갔다. 본사에서 매달 돈을 보낼 수 있도록 직원들의 급여를 배분하고 각종 세금과 공과금, 사원경비 관련 예산을 짜서 팩스로 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TT송금, 은행업무, 통관수수료등을 다루는 일도 해야 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터라 독일인 직원들에게도 영어로 떠듬거리며 한국에서처럼 일을 시켰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박기범 차장은 독일 노동청의 통보를 받았다.

“이게 뭐라고 쓴거야?”

김상국 차장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그러자 내용을 읽어본 김상국 차장은 놀라서 박 차장을 쳐다보았다.

“독일 노동청에서 보낸거야.”

“노동청? 그게 뭐야? 여기도 그런게 있나?”

“근로시간 위반으로 고발조치 된다는데? 그래서 설명하고 행정조치여부를 판단한다고 하는 내용이야.”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김상국 차장이 해서 그런지 박기범 차장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 여기 또 있네. 개선되지 않으면 영업정지를 시키겠다고.”

“뭐여? 영업정지? 망할 우리를 말려 죽이겠다는 거잖아. 젠장. 그리고 근로시간 위반? 아니. 이 나라는 근로시간이 너무 길다고 이러는거야? 아니면 너무 짧다고 이러는 거야? 세상에 근로시간 위반이라는 것도 문제가 되는거야?”

“너무 길다고.”

김상국 차장의 말에 기분이 나빠졌다.

“그럼 일하지 말고 탱자탱자 놀라는건가?”

“이 나라는 그래. 철저하거든.”

“난 이해가 안가. 일단 노동청에 가서 대화를 해보자고. 난 서울에서처럼 독일직원들 야근시키고 새벽에 택시까지 직접태워 집에 잘 보내줬는데. 아니 나 같이 부하 잘 챙기는 상사가 어디있다고. 독일 노동청에서 표창장이라도 주던가.”

계속 툴툴거린 그는 김 차장과 독일어를 잘하는 직원 하나와 함께 독일 노동청으로 향했다. 담당 공무원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나름 높은 직급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는 노동청 공무원은 친절하게 박기범 차장 일행을 맞이했다.

“무등그룹 박기범 차장입니다. 근데 이 편지내용이 이해가 안가요. 무슨 말인지.”

이 말을 독일어로 번역하자 독일관료가 말했다. 그걸 또 번역해 주었다.

“말 그대로 노동시간 위반입니다. 무등그룹은 지나치게 많은 근로시간을 통해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이에요.”

“뭔 개소리야? 주당 50~60시간이 뭐 대수라고. 아침 8시 출근. 저녁 8시 퇴근. 그렇게 월화수목금. 토요일은 8시 출근 2시 퇴근. 얼마나 심플하고 계산하기도 쉬워? 겨우 주당 66시간인데. 마이클 밀켄은 주당 100시간을 일해도 미국 노동청이 아무소리 안하던데.”

하지만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담당 직원이 머리를 긁적이자 박기범 차장이 말했다.

“난 주당 66시간이 정상인줄 알았다고 그래. 그리고 마이클 밀켄은 100시간 일해도 미국이 가만있었다고. 미국 운운하면 꼼짝 못할거야.”

승리의 미소를 지은 박기범 차장은 직원이 독일어로 번역해주면서 말을 들은 독일 공무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미국은 그럴지 몰라도 여기는 독일이라는데요? 그리고 자신은 마이클 밀켄이 누군지 모른다네요. 독일은 주당 37시간 근무제라. 지난주에 50시간 일시킨건 노동법 위반이래요.”

“고작 50시간 가지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물론 근무시간이 길다는 것은 박기범 차장 자신도 인정했다. 구미 선진국은 우리나라에 비해 노동시간이 짧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나라는 선진국이 아니던가?

‘타이거 탱크를 만들고, 스투카 비행기를 제작해 미국과 전쟁을 벌인 나라인데.’

어릴 적 많이 본 전쟁영화에서 미군이 기관총을 한번 갈기면 독일군은 수백명이 쓰러지는 모습으로 스크린에 투영되고는 있지만 이미 20세기 초엽부터 독일은 유럽의 강자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급속하게 성장하는 나라였다.

1969년 미국이 인류최초로 달에 첫발을 내딛게 될 때 사용한 새턴 5호 로켓은 히틀러의 휘하에서 V1, V2로켓을 만들어 런던을 공포에 떨게한 장본인인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 : 1912~1977. 독일 출신의 미국 우주과학자)이었으며, 그를 비롯해 엄청난 과학자를 배출한데 이어 자동차도 처음 개발했다. 그 덕에 지금은 적은 노동시간으로도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아직 개발도상국인 상황에서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보다는 현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인당 소득이 3만 불이 넘어가는 선진국인 일본조차도 주당 41시간을 일한다.

미국 역시 주당 40시간 수준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근로시간이 주당 50시간이라고 해봐야 그다지 긴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신네 나라야 잘살고 그러니 근로시간이 짧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가 못해요. 동일한 잣대로 비교를 하면 안되지 않소. 우리나라는 1인당 소득이 7700달러로 당신네 독일의 25000달러에 비하면 너무 작아요. 그러니 당신네를 따라잡으려면 우리는 최소한 당신네보다 세배는 일해야 따라잡는다는 건데. 그 정도는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교적 자세한 수치를 들어서 말했다. 그 말을 전해들은 독일관료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해를 못하는 바도 아니지만 근무시간보다 효율을 높여서 적은 시간으로도 일을 하게 만들어야죠.”

“그러려면 엄청난 투자를 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럴 여유가 없어요. 경제가 성장하면 점차 근무시간이 줄어들테니 벌금을 매기고 우리가 법을 어겼다는 것은 지나친 처사 같소만. 만에 하나 우리 회사가 미국계 회사라면, 또 종사자가 백인이었다면 이럴지 의문입니다.”

미국을 들먹임으로서, 그리고 백인이라는 민감한 단어를 꺼내서 독일관료가 마치 자기보다 뒤처진 황인종 국가가 경제성장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걸 막는 그런 악한으로 분위기를 몰아가 유리하게 협상을 주도하려 했다.

박기범 차장에게는 불행하게도 그 독일 관료는 그 의도를 간파해냈다. 그래서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박기범 차장이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사업을 하려면 우리 법을 따라야 하고, 따라서 주당 37시간 이상의 근무를 시행한 무등그룹은 노동법을 위반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벌금을 물어야 합니다.”

난항에 부딪히자 일단 박기범 차장은 회사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이 사실을 본사에 보고하기로 했다. 돌아가는 자동차 안에서 박기범 차장은 내내 투덜거렸다.

“독일 관료들은 왜 저모양이지?”

장시간 근로시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박기범 차장 및 무등그룹 직원들에게 독일의 풍토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는 본사로 보낼 팩스 내용을 정리한 뒤 본사로 보냈다.

============================ 작품 후기 ============================

마이클 밀켄 : 1946~. 미국의 억만장자. 채권매니저. 80년대 당시 정크본드 매매로 갑부가 된 인물.

스투카 :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의 급강하 폭격기 타이거 탱크 : 2차 대전 당시 독일육군이 개발한 최고의 전차. 미군에 의해 파괴된(비행기 폭격, 탱크전) 타이거 탱크의 숫자보다 고장등으로 독일군이 자체 폭파시킨 대수가 더 많을 정도임93년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했었음. 일각에서는 장기간 노동이 무조건 나쁜 것으로 매도되지만 이 당시 노동시간을 줄였다면 경제가 발전할 수 없었음. 아니면 공장을 무지하게 짓고 첨단 설비를 사와야 하나 그럴 돈이 없었음.

노동시간이 적은 독일을 부러워하지만 이들도 1890년대에는 세계최장노동시간에, 14살 미만 아동도 하루 16시간씩 노동했기에 오늘날 번영이 온 것임. 이게 싫다면 어른들이라도 열심히 일해야 커버가 됨.

공부 전교꼴찌가 어느 정도 등수 올리려면 1등하는애가 하루 8시간 잘때 2시간 자도 따라가기 힘듬. 같은 원리라고 보면 됨. 고로 사장님한테 일 덜시키라고 하기 전에 스스로 일을 잘해야 함. 일은 개떡같이 하면서 노동시간이 길어요 하면 '나 짤라주세요'와 같음. 너무 당연함. 나라도 그런 직원 자를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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