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1993년 10월 1일자로 기획실 차장으로 발령받은 박기범 차장은 짐을 챙겨가지고 경영지원실 옆에 있는 기획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류준혁 부장이 그를 맞이했다.
“오래간만이야. 박 차장.”
“류 부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황 전무한테도 말을 많이 들었어. 자네 대단하다고 하더만.”
그 말에 멋쩍게 미소를 지은 박기범 차장이 답했다.
“뭐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고요. 과찬이십니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로 업무를 인수인계받고 기존 은행 담당자들에게도 전화를 걸어 부서가 바뀌었다고 말을 했다. 그 사실을 모르고 전화를 걸어 업무요청을 하거나 할 때 생길 수 있는 혼란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여보세요? 김 지점장님? 저 무등그룹 박기범 차장입니다. 예. 이번에 기획실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금관련해서 이제 저한테 전화 안하셔도 됩니다. 그 말씀 드리려고요.”
고려은행 기업금융부서에서 무등그룹과도 밀접한 업무관계를 맺고 있기에 전화를 한 것이다.
“그런가요? 박 차장. 안타깝군. 아. 맞아. 혹시 다음주 주말에 시간 되나요?”
“무슨 말씀이세요?”
다짜고짜 묻는 말에 이상하다고 생각한 박기범 차장이 말했다.
“같이 바다낚시나 갑시다. 위도로 가서 바다낚시하죠. 지금 좋아요. 난 자주 가는데 스트레스가 싹 풀리더라고. 이병택 부장에게는 내가 말해 놓지. 오인혁 과장하고 같이 갑시다. 우리 김춘식 과장도 같이 갈거요.”
“좋습니다. 일정 확정되면 알려주세요.”
전화를 끊은 후 박기범 차장은 바다낚시라는 말에 마음이 설렜다. 뒤에서 류준혁 부장이 다가왔다.
“바다낚시 가나?”
“예.”
“위도가 좋아. 나도 작년에 갔는데 해볼만해. 비록 난 낚시해서 뭔가 걸리나 했더니 폐타이어가 올라오더라고. 하하하.”
“폐타이어요? 심했군요.”
박기범 차장이 말하자 류준혁 부장은 신이 났는지 계속 말했다.
“더 웃긴건 뭔 줄 알아? 옆에 있던 사람이 타이어회먹자고 하더라고. 그 때 다들 웃었어. 그 사람은 낚싯대가 걸려나오더라니까. 정말 재미있었어.”
이후 여러군데 전화를 더 하고 본격적으로 업무에 투입이 되었다. 그는 이제 무너진 기획실을 복구하고 기획업무에 치중하도록 기능을 재정비하는 임무를 가지게 되었다. 그 업무중에는 인사기획도 포함이 되어있었다.
“박 차장 불쌍해. 오자마자 인사기획도 해야 하다니. 가장 짜증나는게 인사업무인데.”
인사팀 유원식 부장이 말했다.
“일을 좀 알려주시고 시키세요.”
“차장이 그것도 몰라?”
비꼬는 듯한 유 부장의 어투에 투정부리듯 말했다.
“전 이 업무에 대해서는 신입이라고요.”
“헤헤. 다 이렇게 흙탕물에서 배우는거지.”
“아니. 난 세금전표 끊는 법도 몰라요. 인사팀에서 노동부 환급받은거 전표처리를 해야 하는데 그걸 못한다고 내가 데리고 있던 수금사원한테 혼나야 돼요?"
"봐. 자금이 갑이잖아. 그동안 자네도 인사팀 많이 괴롭혔으니 당해보라는거야. 아이구. 속이 시원하다."
"아이고 부장님. 저 이제 차장입니다. 차장이나 돼서 인사팀 사원들한테 알려달라고 측은하게 다녀야 해요? 수금사원. 내가 부리던 친구한테도 혼나고.”
“잘해봐. 차장으로서 가오도 내세우고.”
박기범 차장의 어깨를 툭툭치면서 말했다.
“전 가오가 없잖아요.”
“그럼 박박 기어야지. 히히히.”
전사의 발전을 위한 새로운 인사기획업무였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처럼 인사업무는 전사의 발전에 중요했기 때문이다.
왜 해야 하는지는 알지만 어떻게가 문제였다. 그걸 몰랐다.
박기범 차장이 구상한 인사기획은 기존과 방향이 달랐다. 대학 전공과 상관없이 뽑는 것이다. 무등그룹의 경우 경영지원실은 경영학과나 경제학과 위주로 선발해왔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위주였다.
1993년 현재까지 무등그룹의 이사급 이상 임원진들은 전부 서울대학교 출신이었다. 오남현 사장도 경성제국대학(서울대 전신) 상과대학, 황영식 전무도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장현주 이사도 서울대 경제학과 등등 대부분이 서울대학교 출신이었다.
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고 보았다. 지금은 경공업본부로 내려간 김상국 차장만 해도 사학과를 졸업하고 회사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김상국 차장도 서울대학교 사학과 출신이라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그래서 경영지원실부터 대학교와 전공무관하게 뽑고자 했다. 오히려 문.사.철이라 하여 문학과 역사학, 철학을 전공한 학생들에게 우선권을 주는 방안도 고려해보았다.
인간이란 역사를 되돌아보고, 철학적인 사색을 통해 발전해왔다면 기업의 입장에서도 이를 활용하지 말란 법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대학은 서울소재라면 일단 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굳이 서울대학교가 아니더라도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인사기획을 해나가기로 했다.
"인사기획 어렵네요."
"그렇지? 인사팀도 힘든 부서야."
박기범 차장의 말에 인사팀 부장이 답했다.
"이번 주에 놀러간다면서?"
"아. 네. 위도로 낚시하러 갑니다. 은행 관계자들하고 가요. 낚시를 해본 적이 없어서요."
"아이고. 회사원이 낚시하는거 그냥 웃으러 가는거지. 잘 걸려나오면 회를 좀 배터지게 먹고, 아무것도 없으면 그냥 사먹으면 돼. 그냥 자연을 벗삼아 쉬다 오는거야. 별거 없어."
"부장님도 거기 자주 가셨나요?"
"나야 친구들하고 모임이 있으니까. 지난주에는 여수 다녀오고. 이번주에는 거제도로 가. 고등학교 동기가 대우조선소 부장이거든."
"거제도. 좋죠. 77년에 무전여행갈 때 그 때 옥포 조선소를 막 짓고 있었는데."
과거를 회상하면서 박기범 차장은 다시 일을 하기 위해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10월 9일 토요일. 저녁 6시에 서울역에서 모여 바다낚시 일행과 함께 가기로 되어있었다.
“여보. 그렇게 입으니까 낚시꾼은커녕 더 이상해.”
청바지에 면티를 대충 받쳐입었다. 낚시 전용 복장이 없어서였다. 아내가 박기범 차장을 슬쩍 보았다.
“당신도 차장되니까 낚시 다니는구나.”
“뭐 결국 업무 아니겠어?”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니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4시간 뒤면 일행들과 완도로 낚시를 가기 위해 열차를 타야한다는 생각을 하니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가서 뭐 하나 큰거 잡아올게.”
“바다 물고기가 뭔지는 알아?”
“뭐 던지면 뭐 하나 낚이겠지. 또 알어? 고등어가 잡힐지.”
그 말에 아내는 큰소리로 웃었다.
“이 사람아. 고등어는 동해에서만 잡혀요. 당신 타이어 건지고 그걸로 회떠달라고는 하지마.”
“쳇. 타이어와 물고기를 구별은 한다고.”
아내의 장난기 어린 말에 같이 따라웃으며 대답을 했을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박기범 차장이 받았다. 고향에서 온 전화였다.
“기범이냐? 아버지가 크게 다치셨다. 지금 목포 중앙병원에 계시거든.”
“아니 형. 어떻게 된 거에요? 아버지가 왜?”
“지붕에 열린 호박 따시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지셨어. 원래 내가 해야 하는데 오늘 보충수업 때문에 늦었더니 아버지가 직접 하시다가 그렇게 된거야. 내가 영범이한텐 전화할테니 그리 알아라.”
“알았어요 형. 내 바로 내려갈게요.”
3년 전에 퇴직을 하신 그의 아버지는 집에서 농작물을 기르는 것이 취미였다. 특히나 지붕에 열린 커다란 애호박은 잘못하면 따다가 다칠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지만 전혀 개의치 않으시다가 변을 당한 모양이었다.
“젠장. 모임도 있는데.”
그는 먼저 이병택 부장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바로 이 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장님. 저희 아버지께서 지붕에서 떨어지시는 사고를 당하셔서요. 지금 바로 목포에 내려가보아야 되겠습니다. 상황봐서 바다낚시는 중간에라도 합류하겠습니다. 나중에 머무르시는 여관전화번호 저희 집사람에게 남겨주시면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아. 뭐가 죄송해? 아버지가 다친게 더 큰일이지. 그런거 신경쓰지 말고 어서 가게. 내가 다 잘 말하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고는 곧바로 목포로 가기 위해 서울역으로 향했다. 저녁때가 되어 목포역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중앙병원으로 향한 박기범 차장은 아버지가 계신 병실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