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회사를 이끌어갈 신산업?”
솔직히 말해 뭐라고 말할 건덕지가 없었다. 이미 무등전자는 텔레비전 분야에서 경쟁력을 완전 상실했고 그나마 수출망을 통해 미국의 저소득층을 상대로 하는 덤핑수출로 연명하고 있는 상황이니 새로운 사업이라 할만한건 없다시피했다.
“TV도 덤핑이고, 제대로 된 수출상품은 섬유가 거의 전부고.”
중얼거리면서 모니터를 보다가 생각이 하나 떠오른 듯 자리에서 일어나 전무실로 향했다. 전무실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전무님.”
“박 차장. 왜?”
황 전무 책상앞으로 다가간 박기범 차장이 말했다.
“전무님. 사장님이 말한 신산업말입니다.”
“뭐라도 좋은 아이디어가 있나?”
그 역시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혹시나 박기범 차장이 뭔가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을지 기대하는 눈치였다.
“무등전자가 지금 어렵지 않습니까?”
“그래. 중공업본부장이 엄청 이번일로 깨진 모양이더군.”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컴퓨터 산업에 뛰어들면 어떨까요? 모니터야 CRT니까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쓰고 뭐 저가라도 좋으니 컴퓨터를 만들기만 하면 괜찮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 말에 황 전무는 떨떠름한 눈치였다.
“그럴 바에야 외제차를 사오는 게 더 낫겠어.”
속이 답답한 듯 자리에서 일어난 황 전무는 손님접대용 테이블에 놓인 컵에다 주전자에 담긴 물을 따라 담았다.
“목이 바짝 타는데?”
컵에 담긴 물을 마시고 나서 황 전무는 박기범 차장을 쳐다보았다.
“박 차장. 솔직히 신산업은 기획실의 몫이고, 자네는 일단 다른 일을 해보지 않겠나? 우리에게 신산업아이디어는 어려워.”
"그래도 해야죠."
"됐어. 오 사장 잘 설득해서 그런건 다른 팀에게 떠넘기자고. 나만 해도 관리회계, 회계, 자금 이끄느라 바빠. 현장에서도 보고가 늘 들어오는데 가뜩이나 피로해서 죽을 것 같은데 말이야."
경영지원실은 오퍼레이팅 업무에 치중을 하고 있었고 기획실은 과거 80년대 중반까지 보여주었던 모습을 잃고 단순 오퍼레이팅에 치중하고 있었다. 석유정제소 건립들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던 기획실의 직원들은 이제 승진과 더불어 관료적인 구조에 갇혀버렸다.
뿐만 아니라 몇몇 촉망받는 직원들은 80년대 후반들어 삼성이나 현대와 같은 국내 우수기업으로 대거 이탈해감에 따라서 기존의 기획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회사가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그가 일본에서 돌아온 1986년부터 1993년까지 7년 동안 연 30%씩 성장한 무등그룹의 주력은 섬유분야였고 중공업부문은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나마도 성장을 이끈 건 박기범 차장과 황영식 전무가 일본에서 빌려온 돈으로 신규투자를 해 국내 섬유업계 중 압도적인 생산성을 보여준 덕이었다.
“어이. 박 차장.”
일에 열중해 있을 무렵,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자금부장인 이병택이었다.
“부장님.”
자리에서 일어서자 부장이 괜찮다고 손짓을 하고는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애기 좀 하자고.”
박기범 차장을 불러낸 자금부장은 옥상으로 그를 데리고 올라갔더니 담배를 하나 물고 불을 붙였다.
“박 차장. 이번에 오 사장이 내게 준 2가지 과제가 있어. 그게 뭐냐면 첫째, 기획실로 자금팀 직원을 하나 보내는 것, 그리고 자금팀 업무를 컴퓨터로 연결하는 것이지.”
“무슨 말씀이신지?”
이야기의 의도를 잘 알 수 없었기에 자금부장은 천천히 설명을 하듯 다시 말을 했다.
"자네도 수금 해봐서 알잖아. 언제까지 전표를 일일이 때려박고 있을 거야? 가상계좌 같은 시스템으로 연결해서 한번에 처리하면 되는 거지. 그런 거 잘 아는 사람이 장현주 이사인데 지금 미국법인장으로 갔으니."
"실력이 있으시니까요. 그러고 보면 제가 모시던 분들은 다 잘되더라고요. 황 전무님도 그렇고."
"그래? 그럼 나도 이사 되는건가?"
이병택 부장이 좋다는 듯 웃었다.
"그래야죠. 부장님이 이사 다셔야 저도 부장으로 올라가잖아요."
"하긴. 자넨 요즘 성과가 없었지."
커피를 한모금 마신 이병택 부장은 빌딩숲을 한번 쳐다보았다.
“자네. 기획실 가서 일해보고 싶나? 아니면 자금에 남아서 자금 시스템 개선을 해보고 싶나?”
“시스템 개선이라. 어려운 주제인데요?”
그 말에 부장은 흥미를 보이면서 대답했다.
“관심있나? 안정적인 자금시스템 구축이 선결과제인데.”
“해보고는 싶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건 제가 컴퓨터 쪽을 하나도 모릅니다.”
“내 말이 그거야. 자네. 기획실로 가게. 거기 가서 과거의 기획실 명성도 되찾고, 회사의 방향도 잘 찾도록 하게.”
"기획실이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자금통으로 일했기에 다른 팀으로 가는 것은 쉬운게 아니었다.
"가능할까요?"
"봐. 나도 기획실에 있던 사람이야. 인사팀에서 인사기획하고. 영업관리부서에서 일하고 자금으로 오니 다 알잖아."
자금팀에서 13년간 일한 박기범 차장을 기획실로 가라는 것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기획실 역시 전사의 방향을 정하거나 나름의 중요한 오퍼레이팅 기능이 있으니까.
“사실 말이야. 기획실의 최상국 차장을 경공업본부로 보낼거야. 본인이 거기에서 일하고 싶다고 워낙 강력하게 요구를 해서. 좋은 인재인데 회사의 중추인 섬유를 더 키우고 싶나봐. 원래 섬유에 있다가 3년전에 기획실로 온 거니까.”
부장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박기범 차장은 기획실로 가서 일을 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럼 제가 가도록 하지요. 김상국 그 친구. 섬유가서 실적을 많이 올렸죠?”
“응. 이번에 독일 베를린에 유럽본부를 세울거야. 그 친구는 거기가서 유럽을 뚫겠다는군.”
드디어 회사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뻗어나가려는 것을 느낀 박기범 차장은 자신도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