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세월은 흘러 1993년이 되었다. 1992년 대선에서는 드디어 사상최초로 민간정부가 등장하게 된다. 바로 김영삼 정부였다.
물론 1990년 3당합당으로 군사정권과 손을 잡은 야합의 결과라는 세간의 비난도 있었지만 군 출신이 아닌 민간정부의 등장은 이제 30년간 고도성장을 지속한 대한민국이 진정한 민주화를 이루어냈다는 신호탄이었다.
경제적으로는 88 올림픽 이후 중진국 반열에 오르게 되었고 이제 서서히 선진국의 개방압력이 점차 거세지기 시작했다.
1인당 GDP도 6~7천 달러 수준으로 높아지면서 거대한 경제력과 산업경쟁력을 가지게 된 한국은 이제 더 이상 구미 선진국이 돌봐주어야 할 국가가 아닌 중요한 시장이었다.
문민정부는 우루과이 라운드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시장개방, 경제자유화의 포문을 열었다.
1993년 9월 초.
“박 차장. 월례회의 준비해.”
“알겠습니다.”
박기범 차장은 회의 자료를 작성했다. 1990년을 시작으로 회사에도 본격적으로 컴퓨터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이 컴퓨터를 바탕으로 보다 더 효과적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엑셀 프로그램을 사용해 월례회의 자료를 작성한 그는 여러 부를 출력한 후 출력물을 들고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에는 과장급 이상 실무진들과 임원들도 있었다.
“모두들 왔나?”
오남현 사장이 묵직한 어투로 말했다. 1986년 7월 1일자로 과장이 된 박기범 차장은 1990년에 차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그는 결혼도 해서 아이도 하나 있었다.
“회의 시작하지.”
오남현 사장은 서류를 쳐다보면서 회의를 이끌어갔다.
“우리 석유정제소에서 나프타를 충분히 뽑고 그 부산물인 가솔린과 디젤을 한신은행에 팔아 대출금을 갚아나가고 있으니 회사의 재무구조엔 큰 영향이 없어. 이 점은 정말 다행이야.”
“그렇습니다. 그리고 안정적인 원료확보로 섬유도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점차 섬유부문의 경쟁력이 둔화되는게 좀 걱정스럽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하나 더 있다면.”
황영식 전무가 답했다.
“그 케로신(등유)의 경우는 우리가 난방용으로 팔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전부 소각하고 있는데 활용을 해야 할 듣 합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수출판로를 찾지 못한 터라 한신은행에게 대출금 대신 갚는 휘발유와 디젤 이외의 연료는 전부 거대한 소각로에서 태워버렸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수출처를 찾기는 했지만 그 쪽에서 요구하는 물량이 워낙 커 무등그룹이 댈 수 없는 수준이다. 가끔 국내 석유회사들이 구매해주는 것을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그냥 태워버리는 것이다.
“그래. 우리는 구조적으로 중공업이 많이 약해. 아직도 섬유가 강하고 말이야. 이제 1인당 소득도 6천 달러 7천 달러를 오가는데 그에 걸맞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니.”
오남현 사장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말인데, 신규사업을 통해 사세를 확장해야겠어. 약한 중공업을 보완하고, 또 안정적인 현금흐름으로 섬유를 대체해 나가도록 해야해. 그렇다고 해도 섬유는 우리의 핵심이니까.”
“솔직히 말해서 우리 회사의 섬유는 너무 비중이 큽니다. 1992년도에 드디어 매출 1조를 달성했는데 그 중 85%인 8500억원이 경공업사업본부에서 나왔으니까요. 더 흥미로운 것은 그 8500억 중에서 8000억이 섬유니까요.”
경공업본부장이 입을 열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뭐 우리 경공업이 전사를 이끌어나간다는 점은 자랑스럽지만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는 듯 합니다. 분필, 연필, 볼펜, 지우개 등 일반 소비재가 500억이니까요. 그것도 수출로, 덤핑판매로 이룩한 수치라서. 영업이익률이 고작 3%라는건 경영자로서 죄송한 수치입니다.”
말끝을 흐린 경공업본부장의 말에 바로 중공업본부장이 말을 이어나갔다.
“솔직히 말해 중공업분야가 1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는건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식품사업본부가 달성한 500억을 제외한다면 실제 중공업이 올린 매출은 500억 뿐이니까요. 중공업이 너무 약합니다. 전사적으로도 밀고 나가야 하는데 걱정입니다.”
“그래서 신규사업이 필요하다는 거야.”
오남현 사장의 말에 황 전무가 말했다.
“그렇다면 신규사업안에 대한 아이디어는 기획실에서 찾아야겠군요. 기획실이 뭔가 해야 우리 경지실도 일을 하지 않을까요?”
“황 전무. 그게 아냐. 여기 모인 모든 실무진들과 중역들은 각자 이이디어를 내놓도록 하게. 우리 회사를 더 발전시키기 위한 신규산업 말이야. 황 전무 자네부터 말해.”
뭐를 말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난 듯 잠시 침묵을 지키며 고민에 잠긴 황 전무가 말했다.
“수입차 사업은 어떨까요? 외제차를 파는겁니다. 미국의 캐딜락이나 일본의 렉서스나 크라운을 들여와서 파는거죠. 무등 자동차. 혹은 무등 모터스라는 이름으로요.”
황 전무는 진지했다. 수입차는 부유층들의 전유물로 비싸게 판다면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중공업본부에서 맡는다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오 사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자네. 캐딜락으로 깔아뭉개줄까? 헛소리 집어쳐.”
호통을 친 오 사장은 좌중을 둘러보았다.
“얼마나 팔거 같애? 뭐 그럴듯한 아이디어 없나? 회사의 발전을 위해 좀 그럴듯한 발전방향 말이야.”
아직까지도 외제차를 타는 사람은 국세청이 세무조사를 하거나 여론의 시선이 곱지 못한 상황이어서 그런 반응을 보이는 듯 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저기 건강식품산업은 어떨까요? 정력제 같은거. 이거 대박아닐까요? 미국에서 사슴뿔을 사다가 파는겁니다. 곰발바닥이나.”
기획실 류준혁 부장의 말이었다.
“류 부장. 내가 월급대신 그 정력제를 줄까? 헛소리 하지 마.”
“그럼 영어학원은 어떨까요? 학원은 돈이 되니까요.”
다른 기획실 직원의 말에 오 사장은 바로 대답했다.
“자네 회사 짤리고 학원강사하고 싶은 모양이군.”
“사장님.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자금팀 오인혁 과장이 말했다.
“그게 뭐냐면 영화배급을 하는 겁니다. 작년에 샤론 스톤이 나왔던 원초적 본능 같은 영화만 배급하면.... 돈은 그냥.”
“그래. 내가 그냥 얼음송곳으로 마구 찔러줄까? 죽고 싶어?”
여기에 모인 사람들의 말에 불만인 듯 투덜대듯이 대답한 오 사장은 박기범 차장을 불렀다.
“박 차장. 뭐가 좋을거 같애?”
사실 박기범 차장은 오 사장의 반응에 킥킥대며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사장이 묻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어. 그게. 그게. 지금 생각이 잘 안납니다.”
“뭐야? 그것도 대답이라고 한거야? 아 두뇌는 폼으로 달고 다녀? 생각하라고 있는 게 머리 아닌가? 머리는 장식이 아니야.”
소리를 높인 오 사장은 짜증이 난 듯 박기범 차장을 쳐다보았다.
‘생각이 나야 말이지.’
박기범 차장은 고개를 푹 숙이고 혼자 쫑알쫑알 대다가 입을 열었다.
“요즘 국제화가 큰 이슈 아닙니까? 영어 학원을 운영하게 되면 학원건물에도 투자해서 부동산 차익도 얻을 수 있겠죠.”
하지만 오남현 사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래. 시멘트 거푸집에다가 자넬 처박아 주지.”
불만인 듯 입을 씰룩거린 오남현 사장이 말했다.
“다들 이번 주 금요일까지 아이디어 제출해.”
말을 툭하고 던진 후 오 사장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임원진을 쳐다보았다.
“저 사장님.”
기획실의 김상국 차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일단 섬유에 더 치중을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건 또 무슨 생뚱맞은 소리야? 그걸 탈피하려고 하는 거잖아.”
오남현 사장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김상국 차장은 맞은편에 앉은 박기범 차장을 슬쩍 보고는 말했다.
“1990년에 공산권이 개방되지 않았습니까? 공산주의 국가들이 이제 문을 열고 그 시장이 우리에게 뚫린 겁니다. 특히 공산권 국가들은 경공업이 약해서 사람들이 우리처럼 옷도 마음대로 구하지 못한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섬유를 팔면 대박을 칠 수 있어요. 제가 들은 바로는 동구권은 분필도 없어서 교사 1인당 하루에 분필을 한 개만 지급한다고 합니다. 러시아니 폴란드니 다 그거죠.”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건가?”
오남현 사장은 충분히 이해를 하지 못한 듯해보였다.
“지금 분필만 해도 악성재고가 많이 쌓였습니다. 이거 싹다 팔아버리면 재고도 해결되고 돈도 들어옵니다. 신산업도 좋지만 가지고 있는 자원을 활용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다고 봅니다.”
“공산권이 그렇게 사정이 나쁜가?”
황 전무가 말하자 박기범 차장도 김상국 차장을 거들기 위해 입을 열였다. 같은 입사동기이기도 해서 친분이 있던 터라 조금 도와주기로 했다.
“많이 나쁘다고 들었어요. 워낙에 물자가 부족한 나라라서요. 폴란드니, 헝가리니, 다들 생활이 어렵지요.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신산업아이디어는 일단 보류하기로 하지. 더 급한 것부터 처리해야하니까. 하긴 김 차장 말이 맞아. 신산업도 좋지만 있는 자원을 활용하라니. 황 전무의 외제차보단 멋진 말이군.”
흡족한 표정을 지은 오남현 사장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일단 동유럽쪽 오파 잡고 다 수출해. 신규채용도 동구권언어 전공자들 죄 뽑아. 모스크바 지사도 설립하고, 폴란드에다가도 지사를 하나 만들어.”
사장의 말에 모두들 속으로 안도 했다. 적어도 신규산업을 구상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아이 다행이다.’
박기범 차장은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 주어진 업무를 하는 것도 바빠 죽겠는데 무슨 놈의 얼어죽을 새로운 산업구상이야? 그나마 다행이구나.’
하지만 오 사장은 그러나 바로 말을 바꾸었다.
“아니. 아까 지시한 프로젝트 진행해. 아이디어 무조건 내. 악성재고 수출은 수출이고 아이디어는 아이디어야.”
그 말에 다시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박기범 차장은 속으로 짜증이 올라왔다.
‘아. 하기 싫은데.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엄청 깨질텐데. 사장님한테 보고 하기 전에 전무님한테 된통 깨질거야. 맨날 깨지기만 하고. 난 또 깨질거야. 맨날 깨지기만 하는 인생. 내 돈만 있어봐라. 당장 회사 때려치지.’
오 사장이 직원들 얼굴을 둘러보고는 급히 회의실 바깥으로 나갔다. 분위기가 싸늘해진 회의실에는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거 참. 어떻게 하라는 거야?”
분위기를 깬 사람은 황 전무였다. 그는 서류를 책상에 거칠게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회사의 성장은 서서히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중공업본부는 자동차용 부품등을 생산하고는 있으나 경쟁력이 없었고 경공업본부는 아직도 자질구레한 저가 제품과 섬유에 치중하고 있었다.
그 역시 사장에게 깨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솔직히 밑에서 올라오는 프로젝트나 제안서에 대해 꼼꼼하게 따지고 혼낸다고 다들 무서워하지만 그 역시 잘 몰랐다. 일단 호통부터 치고, 자꾸 캐묻다보면 좋은 제안서를 가지고 오니까.
그나마도 섬유가 회사의 수익을 이끌고 있었다. 1985년에 박기범 차장이 일본에 가서 빌려온 돈 100억엔 중 20억 엔을 투자하여 일본에서 최신 섬유제조설비를 사들여 생산성을 높여나갔다. 1989년에 또 다시 40억 엔을 투자하여 대규모 섬유제조라인을 건설한 덕에 돈을 벌고는 있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새로운 산업으로 뛰어들어야 하지만 힘들었다. 중공업본부는 지난 1988년 전자산업부서를 신설하고 컬러 TV를 생산했으나 무등그룹 직원들도 외면하는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1990년에 야심차게 내놓은 무등 15인치 컬러 TV는 고객들이 사용하다가 전기누전으로 자체발화하는 사건이 생겼으며 채널을 너무 자주 돌리면 브라운관이 터지는 사고도 발생했다.
1991년부터 엄청난 소비자불만과 리콜사태에 시달린 무등전자는 550억원이라는 엄청난 적자를 냈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거의 원가수준에 멕시코, 베네주엘라등 남미의 후진국에 덤핑으로 팔고 있었다. 이로 인해 삼성전자등 국내 다른 전자업체들의 강한 항의를 받기도 했다.
“우리 회사는 지금 정체기야. 다들 좋은 아이디어를 하나씩 내라고.”
한번 전무로서 위엄을 드러낸 황 전무가 말을 던지고 회의실 밖으로 나가자 모두들 그제야 일어나고 나갈 채비를 했다.
“에휴. 차장이라고 벌써 마구 쪼이는구나.”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면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 박기범 차장은 자기자리로 돌아와서 의자에 몸을 던지고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엑셀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전표정리 및 자금계획을 검토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2부입니다. 배경은 1993년입니다. 그동안 제가 너무 늦게 올려서 죄송했습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2부를 더 가다듬고 내용을 보강해서요. 1부보다 분량이 너무 적은 것 같아서 계속 수정했지만 워낙 조아라에 업데이트하는 속도가 빠르다보니 집필속도가 쫓아가지 못했습니다.
많이 기다리셨던 분들 정말 죄송합니다. 너그럽게 양해해 주세요. 독자분들 의견도 반영토록 할테니 아이디어 있으시면 코멘트로 알려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