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박기범 과장은 퇴근 후 지하철을 타고 아마미 타카코 기자가 근무하는 도쿄 경제신문 서울지국이 위치한 서울역으로 향했다. 퇴근시간이라 붐비는 만원열차에서 내린 박 과장은 미리 약속을 해 둔 근처 카페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어. 참 얼굴보기 힘드네."
아마미 타카코 기자가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엔 무슨 일로 날 불러낸거야?"
여전히 쾌활한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며 박기범 과장은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오자마자 서두르는 법이 어디있어요?"
"그래. 기업인들은 항상 서두르잖아."
커피를 한모금 마시면서 아마미 기자가 답했다. 박기범 과장은 곧바로 용건을 말했다.
"그거 알아요? 우리 무등도 물론이고 팔공도 일본으로 진출한다고 하던데?"
"그개? 그건 몰랐어?"
박기범 과장은 안경을 치켜 올렸다.
"미국에 수출하는 우리 무등그룹의 나일론 스타킹. 한 세트에 15달러 받아요. 미국에서 우리 제품은 고가로 팔리지. 하지만 일본에서는 오퍼상들이나 보따리 상들에게 팔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한 세트에 고작 5달러를 겨우 받아요."
"음. 도쿄에서 사서 뉴욕가서 팔면 되겠네."
경제신문 기자 답게 경제학적 지식을 뽐내는 아마미 기자였다.
"그래서 우리도 본격적으로 일본에 진출해야 제값도 받고 일본의 선진 금융시스템을 활용해 발전을 하려고 하는데, 내가 일본을 몰라요. 거시적 지표는 알지만 들어가도 될지 뭐 그런 것들."
"들어온다면 당장 건물도 임대해야 하고 창고도 새로 짓거나 그래야겠네."
"물론이죠. 난 팔공을 따돌리고 싶은데 잘 모르겠어요. 사장님은 폴스 플래그 작전을 써보라고 하시는데 감을 못잡겠으니."
아마미 기자는 몇초 동안 생각하더니 밝게 웃었다.
"뭘 그런 걸로 걱정해? 팔공더러 일본엘 먼저 가라는 거 아니겠어? 거기서 깨지든 뭐하든 그럼 그쪽도 눈이 있으니 팔공이 실수한것만 보완하면 되는거 아니야?"
맞는 말이었다.
"결국 그 소리였군."
종업원이 다가오자 커피를 주문한 그는 머리를 한번 긁고 나서 재차 입을 열었다.
"이번 기회에 팔공을 파산시킬 수는 없을까? 아주 끝장내버리게."
"어려운 주문을 하는군. 왜 그렇게 그 회사에 집착을 하지?"
"기업인으로서 경쟁사를 없애려는 것 뿐이야."
하지만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아마미 기자가 아니었다.
"뭔가가 있군. 아무리 경쟁사라고 해도 망하게 작전을 구사하지는 않을텐데."
박기범 과장은 그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치열한 기업전쟁을 벌이는 일본의 종합상사들도 그렇게는 하지 않아. 상도덕이란게 있거든. 그렇게 까지 팔공을 죽이고 싶은 이유라도 있어?"
하지만 박기범 과장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야구 좋아해요?"
"무슨 소리야."
"난 뉴욕 양키스 팬이거든요. 원래 베이브 루스를 좋아했거든. 76년에 행크 아론이 그 기록을 깨기 전까지 미국 최고의 홈런왕이었죠. 미국인들은 정말 야구를 좋아해. 물론 나도 그렇지만."
"하긴. 프로야구가 한국에서도 인기니까."
아마미 기자는 시큰둥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도 센트럴리그 엄청 좋아하지."
"전라도 팀이 경상도 팀에게 방망이를 휘둘러도 경찰이 가만히 있으니까."
대략 눈치를 챈 아마미 기자는 약간 화제를 돌렸다.
"요즘 일본경제가 눈부시게 번영을 구가한다는거 잘 알고 있지? 1987년부터 줄곳 연평균 5%의 실질경제성장률을 보여왔으니까. 미국의 경제규모가 4.4조 달러. 우리가 1.9조 달러. 하지만 국민들 개개인의 소득과 생활수준은 우리가 훨씬 더 높지."
"그런건 말 안해도 잘 알아요."
"그런데 일본경제의 큰 문제가 바로 지나친 주택과 주식가격의 급등이야. 내가 봐도 도쿄 증시가 뉴욕 증시보다 더 크다는게 이해가 가질 않아."
아마미 기자는 여기까지 말하고 슬쩍 떠보았다.
"아직도 감을 못잡았나? 팔공더러 일본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를 하라고 하는건 어때? 어차피 지금 거품의 절정기인데."
"설마?"
그 말에 아마미 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일본의 개인투자자들은 주식을 사고 싶어도 못사. 큰손이 아니면. 너무 비싸서 말이야. 특히나 NTT도코모, 부동산신탁회사들이 가장 인기인데 이들 주식은 정말 못사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팔공이 이들 기업의 주식에 무리하게 투자를 하게 하면 폭락기에 완전히 박살나게 해줄 수 있을거야."
아주 솔깃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팔공이 말려들게 하는 방법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잠시 주저하고 있자 아마미 기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85년에 일본에 와서 대출하느라 고생할 때 한국의 한 경제신문이 특별기고를 하지 않았나? 당신네들의 해외차입이 문제 뭐 그런 논조의."
"맞아. 어떻게 알았죠?"
"기자 월급은 날로 먹는 줄 알아? 그 기고를 쓴 당시 한국 은행감독원 국장이 지금 개발공사 총재야. 팔공그룹의 거대한 스폰서."
"개발공사."
중얼거리고 난 박 과장은 아마미 기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기자에게 팔공과 마찬가지로 무등그룹 역시 일본에 사운을 걸고 진출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럼 개발공사와 팔공을 다 없애버리지. 일단 사장님께 말을 해보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주문한 커피가 오기도 전에 나가버렸다. 이 모습을 보면서 아마미 기자는 중얼거렸다.
"뭔가 일을 저지르겠군."
다음날 출근한 박기범 과장은 자금보고를 하러 황영식 상무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마미 기자와의 대화내용을 은근슬쩍 건넸다.
"음. 듣자하니 꽤 좋은 아이디어인데?"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황영식 전무는 계속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결재를 받은 후에 자리로 돌아와서 자금팀 부장인 장현주에게도 승낙을 받았다.
"그런 문제는 자네가 알아서 하게. 그런 문제는 자네가 나보다 더 뛰어나니까 말이야. 필요한거 말만 하라고."
장 부장은 이런 문제에 신경쓰고 싶어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부장님."
박기범 과장은 자리로 돌아가서 이번에는 기획실과 함께 오 사장이 지시한 폴스 플래그 작전을 실행할 채비를 갖추었다.
"박 과장. 그럼 그 일본 기자를 이용하자는 건가?"
"그렇습니다."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한모금 마시면서 대답했다.
"뭐 난 그 기자를 잘 모르니까. 당신이 잘 알아서 해봐."
차 부장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뭐 내가 돕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니까. 아는 게 있어야지."
"저라고 별 수 있나요? 도쿄경제신문 기자 만나서 논의하는거지요. 그런데 상대는 기자라 중립을 취하겠죠."
아마미 기자가 탄 택시가 개발공사 앞 정문에 멈춰섰다. 15층 총재실로 향한 그녀는 최천식 개발공사 총재와 단독으로 대화를 가졌다.
"음. 도쿄 경제신문 기자라. 대단하군요. 키도 크고."
고급 소파에 앉은 최 총재는 기분좋게 기자와의 대화에 응했다.
"한국기업들이 정말 발전을 많이 해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입니다. 하하하. 드디어 1인당 국민소득도 3천 달러를 코앞에 두고 있으니 말입니다. 대단하죠. 그게 다 우리 개발공사. 재무부. 상공부 같은 정부주도 덕입니다. 하하하."
"이번에 일본에도 진출하신다는데."
그 말에 최천식 총재는 더 신이 난다는 듯 기분좋게 웃었다.
"한국경제가 성장을 하니 당연히 그래야겠죠."
"이번기회에 일본에 투자하신다면 현명하게 증권이나 부동산 같은 금융투자를 하시는 방향도 좋다고 들었어요."
"금융투자라."
"아시다시피 요즘 같은 세상에 보다 현명하게 돈을 운용해야 하지 않겠어요? 니케이에 투자를 하거나 하면 될걸요? 이제 사회주의도 완전히 무너졌으니."
그랬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89년 12월에 몰타에서 회담을 가졌고 이 자리에서 레이건은 동유럽의 민주화와 자본주의 이식을 요구했고 소련은 100% 이를 수용했다.
그 대가로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받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은 경제규모도 5조 달러에 달했으며 우방국인 일본 역시 3조 달러에 달하는 연간 산출량을 기록했다.
이 둘만 합쳐도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 전체의 경제력을 몇배나 능가했다. 이미 경제력에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해 게임이 되지 않았다.
거기에 유럽에서는 서독 혼자의 힘으로 소련을 제외한 동구권 전체를 능가할 정도의 경제적 파워를 자랑했다.
결국 더 이상 미국과 맞설 힘을 모두 잃어버린 소련은 미국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1917년 사회주의 정권이 인류역사상 최초로 들어선 이래 72년만에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저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제 인류가 추구해야 하는 모델은 오직 하나.
바로 튼튼한 경제력과 인간의 자유, 민주, 인권이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 미국식 시스템 뿐이었다.
지하에 있는 마르크스와 레닌은 통곡할지 모르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에서 자본주의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제 사회주의의 망령은 결코 인간 역사에 있어서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되는 것이 되어버렸다.
최천식 개발공사 총재는 팔공그룹 관계자들과 공동으로 출자를 해 일본에 투자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개발공사가 1조 3천억원을 출자하고 팔공그룹이 3천억원을 투자해 공동으로 펀드를 만들고 90년 1월 중순. 본격적으로 대일 투자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