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의 시대-30화 (30/159)

30화

그로부터 며칠 뒤. 요코하마에 위치한 한신은행에서 전화가 왔다. 전에 요청한 서류가 모두 완비되었다면 서류를 가지고 본사로 오라는 것이었다. 전화상으로 전해진 대략적인 금액은 50억엔. 이 금액에 대해 이자만 확정하면 되는 것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황 상무와 박 대리는 차를 타고 요코하마로 향했다. 뜻밖에도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 일본지사를 85년 6월에 세웠으니 고작 3달만에 이러한 결과가 도출되어서 아주 기뻤다. 선진국에서 후진국의 기업이 돈을 빌리는게 쉽지는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다행이네요. 50억 엔이라고 해도 그게 어딥니까?”

차를 운전하면서 박기범 대리가 입을 열었다.

“뭐 그게 대수라고. 아. 정주영 회장은 거북선이 그려진 오백원짜리 지폐를 보여주고 8천만 파운드를 빌려왔는데. 그거에 비한다면 별거 아니지. 근데 금액 맞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 돈으로 세계최대규모의 조선소를 지었으니 대단한 양반이죠.”

뒷좌석에서 말하던 황 상무는 가로로 누웠다. 그리고 중얼거리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올해 85년은 기념비적인 해가 될거야. 해방 40주년에. 무등그룹이 해외차입을 실현한 날이지. 이제 재무부 은행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우리의 신용으로 돈을 빌릴 수 있게 된거야.”

“그렇군요. 우리는 그 역사적인 순간에 있나봅니다.”

“그렇지.”

황 상무가 맞장구쳤다.

“아. 드디어 진짜 상무가 되는건가? 이사에서 상무로. 하하하.”

차가 곧 도착하고 급히 한신은행으로 향한 황 상무와 박기범 대리는 한신은행 직원들과 최종 협상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50억 엔. 그 밑으로는 불가요. 이자율은 10%. 8년 거치 4년 상환 조건으로 합시다.”

한신은행 전무가 담배를 태우면서 말했다. 재일교포 2세인 그는 한국기업에게 도움이 되는 대출을 해주고는 싶었으나 국적은 이미 일본이었다. 오히려 그에게는 자기가 근무하는 은행에게 더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협상을 주도하려고 했다.

“음. 조건을 바꾸도록 하죠.”

황 상무는 은행 담당자의 값싼 애국심에는 기대하지 않았다. 당연히 서로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이끌고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은행이 일본은행들처럼 까탈스럽게 밀고 나가는 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70억 엔. 이자율 9%. 7년 거치 5년 상환.”

이 말이 나오자 전무는 다른 몇몇 관계자들과 귓속말로 대화했다. 그 말은 일본어였다. 전무가 담배를 한모금 내뱉으면서 중얼거린 말을 황 상무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우리에게 너무 불리하잖아. 칙쇼”

박기범 대리는 그 순간에도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본사로 보낸 엔화강세 대비 재무투자안이 더 마음에 걸렸다.

‘엔화가 달러당 200엔에서 150엔 수준으로 내려가면 어떻게 될까? 수출기업은 작살이 나겠지. 그렇다면 정부나 중앙은행은 이를 막기 위해 경기부양을 할테고. 막대한 돈을 시중에 공급하는 유동성확대를 통해 엔화가치를 방어하려 할테고. 그러면 막대한 유동성 공급으로 주가와 부동산이 폭등.’

그는 가방에서 작은 노트를 꺼내 그래프를 그렸다.

‘그렇게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치솟다가 어느 순간 박살이 나면 전부 부실채권이잖아. 은행도 아작나는거고.’

“어이. 박 대리. 무슨 생각하는거야?”

“상무님. 그럼 전환사채도 불가능하죠?”

뜬금없는 말에 황 상무는 깜짝 놀랐다.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황 상무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에 잠겼다.

“상무님. 그 카드를 쓰면 어떨까요?”

“뭔데?”

“재무투자안이요. 엔화가치가 폭등하면 장기적으로 은행은 아작날테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황 상무는 깜짝 놀라면서 박기범 대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어차피 지금 난항에 빠진 상황에서 일단 박 대리를 믿어보기로 했다.

“좋아. 자네가 그럼 설득해봐.”

고개를 끄덕이고는 박기범 대리가 협상 전면에 나섰다.

“저희 조건은 100억엔. 8%. 5년 거치 7년 상환입니다.”

순간 황 상무는 은행 담당자들과 박기범 대리 모두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거치기간이 짧고 상환기간이 길면 좋았다. 7년 상환이라면 7년간 나누어서 갚는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원리금상환부담이 더 줄어드니까.

“이봐요. 어째서 우리가 그런 당신네 조건을 따라야 한단 말이요? 우리가 갑이고 당신들이 을이야.”

“모토우라 전무님. 이번에 G7정상회담이 어떻게 될 걸로 보시나요? 제 견해로는 분명히 미국정부의 압력에 의해 달러가치가 떨어지고 엔화가치가 폭등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수출대기업들의 채산성이 약해지고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금리인하, 중앙은행의 통화공급 등으로 유동성을 늘리려고 할 겁니다.”

“당신의 경제분석이요?”

모토우라 한신은행 전무는 콧웃음을 쳤다.

“그렇게 되면 일본에서는 분명히 주가가 상승하고 부동산 가격이 크게 오르겠죠. 특히 부동산 담보대출을 해주는 은행은 주택가격이 더 오를 것이라 내다보고 계속 대출을 하겠죠. 아마 당신 은행도 담보대출을 늘릴겁니다.”

“그래서?”

“그런데 주택의 가치가 영원히 오르겠습니까? 제가 일요일에 둘러보니 30평형 아파트 가격이 천만엔이더군요. 60평짜리 2층 주택이 4천만엔 정도 하고요. 그게 얼마까지 더 오르겠습니까?”

순간 전무의 눈썹이 씰룩거리는 것을 눈치챈 박기범 대리는 이 여세를 더 몰고 밀어부쳤다.

“결국 부동산거품이 꺼지면 은행이 떠안게 되는 부실채권이 은행을 쓰러뜨릴 겁니다. 이참에 보험 드는 셈치고 우리 무등그룹에게 빌려주시죠. 비록 5년 거치 7년 상환. 100억 엔. 8%지만, 이 일을 계기로 무등그룹은 기업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돈을 한신은행에서 지속적으로 차입하는 등 거래를 장기간 트도록 하지요.”

하지만 전무는 말없이 뭔가 불만으로 가득찬 표정이었다. 그것만 가지고는 설득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박기범 대리는 뭐라고 더 말해서 전무를 설득시킬 방법을 찾도록 했다.

“저희가 제출한 사업계획서를 보시면.”

이 말에 모두들 무등그룹의 사업계획서를 펼쳐보았다.

“100억 엔을 빌려 그 중 80억으로 석유화학단지 건설에 투자할 계획입니다. 여기 화학단지에서는 원유를 정제하여 나프타와 같은 원료를 뽑아냅니다. 그리고 그 원료를 가지고 우리 회사의 주력인 섬유에 공급하려고 합니다. 수직계열화가 완성되는 것이지요.”

“수직계열화라.”

모토우라 전무는 울얼거리며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자동차 기업의 경우 차의 원료가 되는 철을 생산하는 능력을 갖추고, 운반하는 운송능력을 갖게 되면 완벽한 수직계열화가 되는 것이다. 다른 회사의 제품을 살 필요없이 자체 생산을 하면 되니까.

이 회사도 화학섬유분야에 진출하기 위해 원료가 되는 나프타를 직접 공급하고자 석유화학단지를 짓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나프타만 생산하겠지만 조만간 휘발유와 디젤도 추출한다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일 것이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했다.

“좋소. 그럼 나머지 20억 엔은?”

이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박기범 대리는 대답했다.

“저희가 드린 사업계획서를 한번 보시죠. 그 계획서를 보시게 되면 저희는 20억 엔으로 기계를 도입해 화학섬유 부문에서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7페이지를 일단 보시지요.”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모든 이의 시선이 7페이지에 집중되었다. 그 내용은 박기범 대리 자신이 첨가한 내용이었다.

“이걸 보시게 되면 일본과 우리나라의 1인당 소득에 관한 그래프가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1달러 블라우스를 수출하며 섬유분야에서 많은 이익을 번 일본의 경우 이 시기가 대략 196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그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곧 박 대리의 말투가 바뀌었다.

“하지만 일본의 소득이 급증하고 64년 도쿄 올림픽을 전후하여 섬유는 경쟁력을 잃게 됩니다. 그러다 거가의 석유화학섬유로 변경하지면 결국 급증하는 노동비용과 후발주자들의 저임금을 따라잡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섬유산업은 60년대 중후반이 되면 몰락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 20억으로 섬유에 투자를 하겠다는 거요?”

모토우치 전무가 날카로운 말투로 되묻자 박기범 대리는 자기 앞에 놓은 거피를 한모금 마시고 바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최신기계 설비를 사서 후발주자의 추격에 대비할 것이고 장차 보다 적은 노동력으로도 충분히 이익을 낼 수 있는 구조로 바꿀 것입니다. 20억 엔으로 현재 무등그룹의 화학섬유 생산라인의 두배나 되는 공장을 건설해 현재 생산능력의 3배로 확충하지만 직원들 수는 20%밖에 늘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기획실의 분석에 따른 것이었다. 말처럼 된다면 1인당 생산성이 무려 2.5배나 증가하는 것이었다. 이 수준이라면 임금이 2배가 뛰어도 유지가 되는 수준이었다.

“현재 이런 생산설비는 일본에서 도입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지속적인 설비투자를 통해서 한국의 소득증가에 따라 상쇄될 수 있는 경쟁력 약화를 방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박기범 대리가 건넨 기획서를 대충 읽어본 모토우라 전무는 팔짱을 끼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말이 그렇지 100억 엔이라는 돈을 한번에 지불하는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가파르게 성장하는 한국에 투자를 하는 것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무등그룹 역시 수출위주의 회사이므로 날로 강해지는 한국의 수출경쟁력을 본다면 이번 베팅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걱정이 되는 건 한국의 산업은행이나 정부가 지불보증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등그룹은 이미 충분한 생산설비를 보유하고 있었고 석유화학공장은 장차 폭증하게 될 한국의 석유수요를 감안한다면 돈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좋소. 그렇다면 100억 엔. 8.5%. 5년 거치 7년 상환으로 갑시다. 이 조건이면 되겠죠?”

모토우라 전무의 말에 박기범 대리는 고개를 돌려 황 상무를 바라았다.

“80억으로는 석유화학 공장을, 20억으로는 섬유공장을 짓는다라. 한 가지 조건이 더 있는데, 당신네 회사는 정부의 압력 때문에 휘발유나 디젤은 팔지 못한다고 알고 있소만. 그래서 석유정제공장이 완성되면 우리에게도 석유를 공급해주시오.”

그 말에 깜짝 놀란 황 상무는 말했다.

“당신들에게 석유를 공급해주면 누구에게 팔려고요?”

“아. 우리 한신은행과 제휴를 맺은 회사중 하나가 킨키 상사요. 그곳 석유부는 늘 석유공급을 갈망해서 당신네한테 사들인 석유를 되팔려고요.”

“되팔아요?”

황 상무의 말에 모토우라 전무는 길게 대답했다.

“그래서 당신네 공장이 완성되면 국제휘발유 가격의 75%에 우리에게 파시오. 어차피 당신들은 국내시장엔 팔지 못하지 않소? 그리고 우리는 얼마든지 사줄테니. 그리고 원리금 상환은 휘발유로 해도 됩니다.”

마지막 말에 황 상무는 빙그레 웃었다. 어차피 공장건립의 목적은 안정적인 나프타 원료공급이었고 애초에 휘발유와 디젤에 대한 판매는 생각지도 않았다.

남는 부산물은 적당한 가격에 해외에 팔아치우거나 해야 하는데 판매망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남는 휘발유는 전부 재고로 쌓인다.

물론 휘발유는 중요한 연료이기 때문에 결국은 다 팔리겠지만 이미 막대한 석유정제시설을 갖춘 국내 석유회사들이 그 물량을 사들일 이유는 없었다.

남는 연료를 팔기 위해서는 해외로 나가야 하는데 국제 가격의 75%라고 해도 한신은행에 팔고 그만큼 원리금 부담이 줄어든다면 상당히 괜찮은 조건이라고 보았다.

“좋소.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이자는 8%로 0.5%만 낮춰주세요. 그러면 나프타만 뺀 나머지 원료는 다 국제가격보다 싸게 드리죠. 당신네들이 되팔아서 이익을 남길 수 있도록.”

“그렇게 합시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나프타만 뽑으면 곤란해요.”

모토우라 전무가 웃으면서 농담을 건네자 황 상무 역시 웃으면서 악수를 하기 위해 몸을 앞으로 밀면서 대답했다.

“아이구. 어떻게 아셨어요? 어쨌거나 원유에서 100%나프타를 뽑지는 못해요. LPG도 받나요?”

협상은 순조롭게 끝났다. 바로 개설한 한신은행의 기업통장으로 100억 엔이 들어왔고 황 상무가 돈을 무등그룹의 외환 기업통장으로 송금하는 동안 본사로 전화를 걸어 그 내용을 전달했다.

전화상으로 들리는 목소리는 벌써 환호성이었다. 전화를 더 붙들고 있자 본사 자금팀 부장이 전화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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