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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시대-29화 (29/159)

29화

“상무님. 그 쪽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답니다. 일단 도장을 받으라는 서류는 준비가 되었고요. 이제 남은 것은 금액은 네고(협상 Negotiaton의 약어)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오 다행이군. 금액만 네고한다면 되는 것이군. 일단 100억 엔을 몽땅 다 받는게 가장 좋지. 그런데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니. 우리에겐 정말 다행인걸?”

“네. 아마도 한신은행이 재일교포가 세운 은행이고 주로 재일교포들의 예금을 받아서 그런 모양입니다.”

박기범 대리의 말에 황 상무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좋아. 서류 준비하고. 다 되면 보고하게.”

자리로 돌아가 앉은 박기범 대리는 황 상무로부터 오늘 만난 아마미 타카코 기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도쿄 경제신문 기자라. 잘됐군요.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겠습니다. 경제신문기자이고 하면 저희보다도 고급정보는 빠를 수 있겠군요. 잘만 활용하면 도움이 될겁니다.”

“응. 맞아. 팔공그룹과 손잡을 일본의 자동차회사는 더 이상없다고 하는군. 자네 말과 흡사했어.”

그 말에 미소를 지은 박기범 대리는 자신의 예측이 어느 정도 맞았다는 것에 대해 기뻤다. 팔공그룹 자동차 사업건은 일단 이 상태로 마무리지게 되고 남은건 한신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일에만 열중하면 되는 것이다.

박기범 대리는 서류를 봉투에 담아 우체국으로 가서 국제 특급우편으로 보내고 다시 본사로 돌아와서 텔렉스로 이 사실을 전송했다.

우편이 가는 시간도 있으니 다시 회신이 오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생각했다.

‘경제신문 기자라. 뭔가 얻을 좋은 정보가 있지 않을까?’

그는 상무에게 기자에 대해 물어보았다. 상무는 필요하다면 접촉해도 좋다고 말했고 실무 담당자인 박기범 대리는 직접 기자를 만나서 더 정보를 얻기로 마음먹었다.

이틀 뒤, 아마미 기자와 연락이 된 박기범 대리는 도쿄의 한 카페에서 기자를 만났다. 키가 꽤 큰 아마미 기자는 자신이 유명한 극단인 다카라즈카에서 활동했다고 했다.

그러다 기자로 우연한 기회에 전업을 했는데, 겉보기에는 30대 후반으로 보였지만 의외로 나이가 많다는 것에 놀랐다.

“1940년생?”

45살이라는 사실에 놀랐지만 동안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러려니 하고 기자를 대했다. 그는 기자를 만나 현재 한신은행과 대출협상이 잘 되어가고 있고 계획대로 된다면 종합 석유화학 및 화학섬유회사로 도약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한신은행은 아마 당신네 회사에게 잘해줄겁니다. 거기 창업자가 한국사람이어서요. 그리고 외국기업에게 빌려줄때는 더 높은 이율이 적용되니 해볼만 하겠죠. 무담보라면 기업의 미래를 믿고 빌려준다는데 그에 대해 잘 애기하시면 협상이 쉬울겁니다.”

“그런가요?”

“그리고 한가지. 최근 미일간의 통상마찰이 아주 격화되고 있어요. 올해만 해도 미국의 대일무역적자가 560억 달러에 육박할 거라고 하니까요.”

“미국이 경쟁력이 없는데 일본을 괴롭히는 건가요?”

일부러 기자에게 듣기 좋은 말을 했다. 물론 그의 생각도 그러했다. 솔직히 무역적자가 많다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기계, 자동차, 부품분야에서 경쟁력이 없는 미국은 일본으로부터 이런 제품을 사들이고 대신 비행기, 컴퓨터, 항공기 등 경쟁력이 있는 분야에 투자를 하면 되니까.

그리고 미국의 GM과 포드, 크라이슬러가 도요타에게 밀려서 파산하게 되면 미국인들은 도요타의 채권을 사거나 주식을 사서 떼돈을 벌테니까.

사람이란 그렇게 긍정적으로 사고를 해야지 미련하게 통상마찰을 거는건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장차 언젠가는 우리나라의 산업이 경쟁력을 갖게 되면 경쟁국인 프랑스, 미국 등이 한국의 장시간 노동등을 빌미로 삼아 통상마찰을 걸텐데, 제대로 자동차를 못만들어 적자를 내는 프랑스나 미국이 바보지 열심히 일해서 좋은 제품을 만들어 돈을 긁어모으는 우리나라가 잘못했다고는 보지 않았다.

“미국은 이 문제를 빌미로 서독과 일본에 화폐가치 조정을 요구하고 있지요. 즉 엔화가 약하니 수출이 너무 잘된다는 거죠. 서독 마르크 역시 달러에 비해 약세고요. 아마 이번 G7재무장관 회담에서는 서독 마르크화와 일본 엔화에 대한 가치조정이 있을거라고 하더군요. 그렇다고 미국의 무역적자는 해소되지 않을겁니다. 아무리 서독 마르크화 가치가 올라가도 미국차는 일본차나 독일차에 비하면 고철에 불과하니까.”

“가치조정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될까요?”

“뭐 쉽죠. 엔화가치를 의도적으로 높이는 겁니다. 정부간에 협상으로요. 솔직히 미국보다 물가상승률이 낮은 서독과 일본의 화폐가치는 달러에 비해 올라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말은 맞는 말이었다. 경제학 교과서에도 나오는 말이니까.

“그렇죠. 그러면 일본이 의도적으로 엔화가치 상승을 막나요?”

“솔직히 원자재를 수입하는 일본으로서는 엔화가치가 높으면 좋죠. 원유를 더 싸게 사올테니. 식량도 더 싸게 사오고요. 물가가 내려가죠.”

환율의 묘미였다.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과거 1960년대만 해도 달러당 환율이 200원선이던게 지금은 거의 500내지는 600원에 달하니까. 이유는 한국의 인플레이션이 미국이나 일본보다 월등히 높기 때문이다.

이렇게 높은 인플레이션이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달러당 천원대의 환율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날이 올거라고 내다봤다. 결국 원화가치가 자꾸 떨어져서 휴지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러화 환산 소득이 증가하는 이유는 경제성장으로 인한 소득증가가 환율상승으로 인한 감소분을 상쇄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아마 달러화 약세에 베팅을 한다면 돈을 만질 겁니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엔화가치가 크게 오를 테니 엔화를 가지고 있다면 이득을 보겠죠?”

이 말이 뇌리에 깊게 남았기에 회사로 돌아온 그는 황 상무에게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자네가 생각하는건 뭔가?”

“본사 차원에서 재무투자를 진행하는 겁니다. 여유자금 2~3억 정도를 가지고 엔화를 사놓거나 엔화 선물에 투자한다면 괜찮게 돈을 벌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울 외환시장에서?”

“그렇습니다. 달러약세, 엔화 강세에 베팅한다면 조금 벌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렇다면 기획해서 내게 제출해.”

황 상무의 지시에 그는 타자기 앞에 앉아 그가 생각한 바를 그대로 옮겨 적었다. 그의 아이디어는 이미 황 상무에게 말했다.

그것을 본사로 보내 실제 행동에 옮기도록 하는 것이다.

그날 야근을 하면서 서류를 작성한 후 다음날 황 상무의 결재를 받았다. 황 상무는 내용을 읽어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만일 어긋나면?”

“전 짤리는 거죠.”

살짝 웃으면서 대답을 하자 황 상무는 박기범 대리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좋아. 나도 짤릴테니. 자네가 내 인생을 책임지게.”

사람좋게 털털한 웃음을 지으며 결재란에 도장을 찍은 황 상무는 팩스로 그 서류를 본사로 보냈다. 아마 본사에서 확인을 한 후 오남현 사장의 결재를 받아 바로 행동에 들어갈 것이다.

“자네 그 아마마 타카코 기자랑 대화하고 얻은 정보인가?”

“물론입니다. 그리고 보아하니 미국도 대일무역적자문제를 가지고 G7때 말을 할 것 같습니다.”

조심스럽게 박기범 대리가 말하자 황 상무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래. 본사 자금팀에서 이 일을 하겠지. 돈을 좀 만졌으면 좋겠구만. 어쨌든 이 일은 본사에게 공을 넘기고 우리는 대출을 계속 하자고.”

“상무님.”

박기범 대리가 말하자 황 상무는 그를 쳐다보았다.

“환헤지는 안해도 되겠죠?”

“사장님이라면 하지 말라고 하실거야. 어차피 장기대출인데. 단기라면 환헤지 해야겠지. 우리는 최소 5년 이상 장기대출 아니야? 그렇다면 환헤지가 의미가 있겠어? 무엇보다 5년 짜리 장기 환헤지 상품은 없다고. 있다손 치더라도 배보다 배꼽이 더 클거야.”

황 상무의 말을 듣고 박기범 대리는 일단 환헤지는 생각하지 말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약간 마음한구석이 허전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환헤지는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엔당 3원선인 엔화환율. 하지만 일본의 인플레이션은 1~2%로 선진국 중 서독과 마찬가지로 최저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두자릿수의 높은 인플레이션이다.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고 해도 8~9%로 높았기에 화폐가치는 한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것으로 보았다.

그렇게 되면 1엔당 3원이 4원. 5원. 점차 늘어간다. 일본인은 동일한 1엔을 가지고 더 많은 한국돈을 가져가는 것이다.

‘수출기업은 좋겠지만.’

박기범 대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장기대출이라고는 하지만 10년 뒤에 환율 때문에 갚아야할 돈이 급증한다면 그것도 문제였다.

다만 회사가 고도성장을 하면서 환헤지를 하지 않아도 리스크가 자연히 낮아지기를 기대하는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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