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회사로 가는 길은 다소 무거웠다. 그도 그럴 것이 팔공그룹이 본격적으로 진출을 했기 때문이다. 이곳 일본에서 팔공그룹은 자동차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준비중이다.
그런데 본사의 지령은 이 사업계획을 무산시켜야 하는데 그것 자체가 어찌 보면 쉽지 않은 일일뿐더러 현재 진행중인 대외차입문제도 걸려있었다.
‘한신은행에서 돈이 대출받아야 하는데.’
길을 걸어가면서 그는 석유화학공장의 신규건설이 다행히 승낙을 받았지만 그 성공요건은 바로 대외차입이다. 회사에 도착하자 오늘은 황 상무가 모처럼 일찍 와 있었다.
“오늘 늦군.”
“네?”
그 말에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농담일세. 한신은행 대출건은 어떻게 된지 좀 파악해야겠어.”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이따가 은행영업시간이 되면 한신은행측에 전화를 넣어보려고요.”
그 말에 황 상무는 고개를 젓고는 박기범 대리에게 지시했다.
“아냐. 당장 요코하마로 가서 직접 확인을 해 와. 전화로 말하면 조만간 알려주겠다고 말을 할 게 뻔하지. 직접 기업금융 담당자를 만나서 담판을 짓고 오도록 해.”
황 상무는 주머니에서 차 열쇠를 꺼내 아직 황 상무의 책상 앞에 서 있는 박기범 대리에게 던졌다. 열쇠를 받고 나서 박기범 대리는 주머니에 넣었다.
“차를 타고 갔다오게. 아 참. 차에 기름이 다 떨어졌어. 가는 길에 채우게.”
“바로 갑니까?”
박기범 대리의 말에 황 상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그럼 그 팔공그룹건은?”
“일단은 내가 팔공그룹 일본사무소의 위치를 파악할테니. 자동차 협상관련건은 내 선에서 어떻게든 해 볼테니 자네는 일단 대출문제나 해결하고 와. 일단 뭐라도 하나 끝을 내야 하지 않겠어?”
담담히 사무적으로 말을 한 황 상무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 나갈 채비를 했다.
“뭐해? 나가자고. 자네는 요코하마로. 난 팔공그룹 사무소를 찾아 나서야지.”
황영식 상무는 건물 바깥으로 나갔다. 건물 지하주차장에 있는 레오파드에 올라탄 박기범 대리는 차를 운전했다.
곧바로 요코하마로 향했다. 차를 타고 가면서 심심해서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에서는 뭐라고 일본어가 막 나왔지만 그는 하나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뭔지는 몰랐지만 경제에 관한 것이라는 것쯤은 눈치껏 알 수 있었다.
-니혼노 지혼지유카와 ...쇼와 욘주 니넨.-대충 듣게 된 말이지만 일본의 자본자유화가 일본달력기준으로 쇼와 42년. 즉 1967년을 거점으로 시작되었다는 말로 이해했다.
그도 그럴 듯이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일본은 중공업부문과 기계산업에서의 막강한 경쟁력을 바탕으로 서독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에 등극한다.
하지만 거대한 경제권을 이루었음에도 다소 폐쇄적인 시장의 문을 열기위해 미국은 자본자유화를 요구했고 일본역시 기업의 해외진출을 가속화하기 위해 본격적인 자본자유화의 시대를 열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우리나라였다. 아직까지도 단자회사를 통해서만 기업이 해외자본을 끌어들일 수 있는데다가 외국기업이 국내에 투자하는 것 역시 쉽지 않는 상황에서 과연 1985년의 시점에서 기업이 해외차입을 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지 의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은행으로 들어가 기업금융부서를 찾았다. 지난번 거래를 검토해보겠다고 말하던 은행원이 자리를 지키도 있었다.
“아. 그 때 그 손님이시군요.”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오늘은 저희 회사의 경영데이터를 가지고 왔거든요.”
그 말에 은행원이 대답했다.
“그렇군요.”
은행원의 태도가 조금 머뭇거리고, 뭔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을 때, 박기범 대리는 ‘이번 은행도 틀렸구나’라고 생각했다.
“원래 한신은행이 연락할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저희가 조금 급해서요.”
박기범 대리는 가방에서 서류철을 꺼냈다.
“서울 본사에서 가져온 경영관련 데이터입니다. 재무제표라고 보시면 됩니다.”
“재무상태표, 현금흐름표, 손익계산서.”
서류를 하나하나 넘겨 가면서 은행원은 중얼거렸다. 조금 불안하기는 했어도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박기범 대리는 은행원을 쳐다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자. 당신은 이제 내 말을 듣습니다. 듣습니다. 우리 회사에게 대출을 합니다. 100억 엔을 8%로 대출해줍니다. 대출해줍니다. 대출서류에 도장을 찍습니다. 어서 찍어.’
그 소원이 통한건지는 몰라도 은행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를 챙기고 기업금융부서장실로 갔다. 대략 한 시간이 지난 후, 부서장실에서 그 은행원과 부서장으로 보이는 높은 지위의 사람이 같이 걸어나왔다.
“한국에서 오셨다고요.”
부서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한국어를 아주 잘했다.
“네.”
박기범의 대답에 부서장이 말했다.
“조춘석이라고 합니다. 한신은행 요코하마 지점 기업금융 부서장입니다. 일본이름은 이마니시 켄이라고 하지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부서장에게 인사를 한 박기범 대리는 과연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기대했다.
“저희 직원의 말을 듣자하니 참 오래 기다린 모양이십니다. 뭐 그건 어쩔 수 없어요. 저희도 검토를 해야 하니까요. 다만 여기 기초자료에 의하면 전반적으로 우량한 사업구조를 가졌고 재무상태도 건실합니다. 그래서 긍정적으로 검토를 하려고 합니다.”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박기범 대리는 조춘석 부서장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어려웠던 관문이 뚫리는 것 같았다.
“일단 대출서류를 드리겠습니다.”
부서장은 말하고 서류를 몇장 챙긴 후에 연필로 여러 군데에 동그라미를 살짝 그렸다.
“여기다가는 법인인감을 받아오셔야 합니다. 가끔가다가 잘못 받아오시는데 법인인감 받으시고, 법인인감증명서도 가져오셔야 합니다. 이런저런거 다 하면 대략 최소 2주 내지는 한달이니 그 동안 금액에 대해서는 일단 더 자세히 말을 하지요.”
“그런데 담보는 딱히 없습니까? 단지 저희 재무제표로 그렇게 큰 대출을 결정해 줄 수 있으신지요?”
“뭐 그동안 저희도 알아는 보았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희로서는 아주 위험한 대출결정이지요. 아시다시피 한국의 산업은행이나 정부의 지불보증도 없이 대출을 한다는 것이 걸리지만 저희 은행 본사 판단도 귀사에게 대출해주는건 리스크가 조금 낮다고 하더군요. 물론 금액은 처음 요청하신 100억엔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야합니다. 그건 서류준비하시면서 교섭하는 것으로 하지요.”
아침시간. 아카사카로 택시를 타고 간 황 상무는 어제 팔공그룹 사람들이 들렸던 요정을 찾아갔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었기에 앞에서 서성거리던 그를 본 한 여자가 다가왔다.
“가방을 놓고 갔나요?”
황 상무가 고개를 돌려보니 단발머리의 30대 후반쯤 되어보이는 여자가 카메라가 든 가방을 들고 말했다.
“아. 예.. 뭐 뭐 그렇죠.”
“아니. 어제 차 밖에는 나가시지도 않은 분이요?”
순간 황 상무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어제 그를 보지 않고서는 차 안에 가만히 있었다는 것을 알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걸 어떻게?”
“전 기자거든요. 도쿄 경제신문의 아마미 다카코 선임기자입니다. 국제기업부에 있어요.”
그녀는 핸드백에서 명함을 꺼내 황 상무에게 건네주었다.
“혹시나 해서 여기로 왔는데 제 추측이 맞았군요. 제가 맞다면 아마 그 쪽은 한국의 무등그룹이거나 아니면 팔공그룹 사람이죠? 제가 맞나요?”
“무등그룹 황영식 상무입니다.”
넥타이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제가 알기로 팔공그룹과 무등그룹은 라이벌관계라고 해서요. 아마도 팔공그룹이 일본의 자동차 회사와 손을 잡고 조립생산하려는 계획에 대해 알아보려는 것 같군요.”
그 말에 황 상무는 다시한번 깜짝 놀랐다. 그는 그 기자를 붙들고 말했다.
“혹시 그 사안에 대해 뭐라도 아는게 있다면. 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기자는 살포시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기자는 언제나 중립을 지켜야 한다구요.”
“그렇다면. 앞으로 무등그룹이 진행하는 사업에 대해 우선권을 주도록 하죠. 특종거리를 무조건 주겠다 이겁니다. 무등그룹의 숨겨진 비밀같은거 모르시죠?”
그 말에 기자는 눈을 번뜩이며 황 상무를 쳐다보았다. 특종거리를 늘 찾는 기자의 입장에서 기업이 기삿거리를 스스로 제공해 준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었다.
순간 황 상무는 기업을 활용한다면 팔공그룹은 물론 재무부와 상공부도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재무부가 사자라면 일본언론은 하이에나야.’
“에. 일단 어디 앉아서 인터뷰를 하죠. 내가 팔공그룹과 무등그룹. 그리고 한국 정부의 관계등 기삿거리가 될만한 것들을 말하겠어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여기자를 데리고 근처 카페로 발걸음을 옮긴 황 상무는 자리에 앉자마자 커피를 주문하고는 바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황 상무는 어릴 적부터 시청공무원인 아버지덕에 일본친구들을 많이 사귀었고, 이름까지도 카라사와 스스무로 바꿨을 정도여서 기자와 대화할 정도의 일본어실력은 있었다.
“한국정부는 특정 기업들을 밀어주죠. 그리고 그 댓가로 돈을 받습니다. 아마 알면 놀랄거에요.”
이렇게 서두를 시작한 황 상무는 그가 아는 한국정부와 팔공그룹간의 정경유착, 기업들간의 유착관계, 특정지역에 기반을 둔 기업에 대한 의도적 차별등을 설명해나갔고 기자는 그 내용을 받아쓰기 바빴다.
대략 한 시간 정도 열성을 다해 설명을 한 황 상무는 기자에게 말했다.
“내가 했다고는 하지 말아요. 한국에 돌아가면 아마도 안기부가 날 죽일거요.”
“잘 알고 있습니다. 취재원보호를 해야죠. 지난 1973년에 도쿄에서 김대중선생을 중앙정보부가 납치했던 건 아주 충격이었죠.”
당시의 일이 기억난다는 듯 아마미 타카코 기자는 두터운 노트를 응시했다.
“73년 당시 사회부 기자로 그 사건을 담당했었거든요.”
“그렇군요. 헌데 팔공그룹이 일본의 어느 자동차 회사와 손을 잡을 건지는 아는가요?”
황 상무의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본내에 그들과 손잡을 회사는 없어요.”
박기범 대리가 했던 말과 비슷했기에 의아한 생각이 든 황 상무는 왜 그렇게 대답을 했는지를 물어보았다.
“간단하죠. 도요타는 지금 고급차 개발에 여념이 없어요. 서독의 벤츠나 BMW를 능가할 고급차로 미국시장을 석권할 생각을 하거든요. 닛산도 마찬가지고요. 혼다는 내년 쯤에 미국시장에 자체 고급브랜드를 출시한 생각입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자력으로 성공한 회사지요. 굳이 외국회사랑 손잡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거기에 더해 한국시장은 이제 CKD로 들어가기엔 의미가 없는 시장이 되었죠. 소득수준의 향상으로 현대의 포니나 엑셀처럼 고유모델이 성공하는 시장이 되어가니까요. 아시겠어요?”
설명을 한 후 아마미 타카코 기자는 재차 말을 이어나갔다.
“어쨌든 정부와 기업간의 유착관계는 참으로 놀랍군요. 이런 미개한 일이 아직도 이어지다니. 아. 무등그룹이 일본에서 엔화차입하는 문제는 어떻게 되었나요?”
“진행중입니다.”
“잘되면 연락주세요. 언론에서 터트리면 아마 더욱 잘될겁니다. 처음에 대출은 까다로워도 한번 성공하면 채권, 전환사채 등 다 잘될 테니까요.”
“아. 혹시 팔공그룹이 도쿄에 사무소를 냈다는데 어딘지 압니까? 아시면 알려주세요.”
가방에서 메모지를 꺼낸 그녀는 팔공그룹 도쿄 사무소의 위치를 적어서 그에게 건넸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마미 기자는 계산대로 걸어가서 커피값을 먼저 계산했다. 황 상무가 급히 다가가자 아마미 기자가 말했다.
“이번에는 제가 살게요. 저한테 빚을 졌으니 좋은 기삿거리를 알려주셔야 해요.”
키가 170cm가 넘는 그녀는 멀리 사라졌어도 황 상무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라지는 기자의 모습을 보며 팔공그룹을 꺾을 기회를 확보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팔공그룹 오피스를 확인하기 위해 택시를 잡아타고 그리로 향했다. 위치를 대충 둘러본 후 다시 택시를 타고 회사로 향했다. 차에서 내리고 안으로 들어오자 이미 박기범 대리가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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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해설>
쇼와 : 일본애들은 지금도 지네 왕의 연호를 쓴답니다. 우리로 치면 2013년은 근혜 1년. 뭐 이딴 식이죠. 따라서 1985년 생은 두환 5년생. 그쵸? 대학교 졸업을 2011년에 했다면 명박4년 대학졸업. 뭐 이런 별 거지같은 것입니다.(욕해서 죄송)쇼와천황은 히로히토입니다. 그 나쁜 XX(일본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아카사카 : 도쿄의 대표적 유흥가. 게이샤위주의 요정이 많은 곳.
포니 : 1976년 현대가 독자적으로 만든 자동차.
엑셀 : 포니의 후속으로 1985년 등장.
소설 속 아마미 타카코 기자는 우리나라에서도 꽤 이름이 알려진 일본TV배우를 모델로 했습니다. 맞추시는 분은 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