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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시대-27화 (27/159)

27화

황 상무의 닛산 레오파드에 올라탔다. 차는 급히 출발했고 혼잡한 도쿄 시내를 가로질러 하네다 공항으로 향했다.

2시 15분에 차를 탔지만 워낙 막혀 간신히 4시 30분에 하네다 주차장에 차를 댈 수 있었다.

“자. 어서 가자고. 5시에 도착하니까.”

“어라?”

차 문을 닫고 공항로비로 가려던 박기범 대리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뭐야? 왜 그래?”

“저길 보세요.”

박기범 대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공항근처 주차장 입구였다. 검은색 승용차 세 대가 이미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해 멈춰 있었다.

“야쿠자일거야.”

황 상무는 귀찮다는 듯 내뱉고 공항으로 뛰어갔다.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5시에 도착예정인 대한항공 보잉 747기가 서서히 착륙을 위해 기어를 내리고 있을 무렵, 비행기 1등석에는 팔공그룹 자금과장인 장준성이 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부사장으로 승진한 박상기 부사장이 옆에 앉아있었다.

“일본은 처음인가?”

“예. 부사장님.”

장준성은 대구사투리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표준어로 이야기를 했다. 박 부사장은 창문 밖을 잠깐 내다보았다.

“자네 생각에 일본에 있는 자동차 회사들 중 어디와 접촉을 하면 좋겠나?”

“글쎄요.”

장준성이 뜸을 들이면서 말했다.

“도요타나 닛산이 좋을 듯 합니다.”

“어째서?”

박상기 부사장의 물음에 장준성은 차분한 어투로 대답했다.

“우리나라의 자동차 시장은 포니 엑셀 등 소형차가 나오지만 여전히 비싸고 부자들만 차를 이용할 거라는게 지배적인데 그렇다면 도요타의 크라운을 도입해 로얄과 경쟁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닛산은 세드릭과 글로리아라는 고급차량이 있으니 이걸 들여와도 되고요.”

“그렇구만. 난 기획실과 자네의 생각과 달라. 이제 앞으로 자동차가 보급되면 아주 싼 가격에 탈 수 있는 소형차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가정주부도 장보러 갈 때 잠깐 탈 수 있거나 자영업자들이 배달갈 때 잠깐 배달나갈 수 있는 작은 차. 그렇다면 스즈키가 적격이겠지.”

“하지만.”

반박을 하려고 할 때, 비행기 승무원이 다가왔다.이 들려왔다.

“손님. 이제 곧 비행기가 하네다 공항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안전벨트 확인해 주시고 자리 점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중간에 말을 끊었기 때문에 장준성 과장은 할 말을 잊어버렸다.

“이제 도쿄에 가면 도쿄출장소 사람들이 와 있겠지. 이제 식사도 해야하잖아. 자네 게이샤 한번도 못 봤지.”

“네 그렇습니다.”

“오늘 저녁도 먹을 겸 아카사카로 가자고. 게이샤도 보고 식사도 하고 말이야.”

비행기가 땅에 닿자 곧바로 내린 장준성과 박상기 부사장의 모습을 한눈에 알아본 황영식 상무는 박기범 대리에게 말했다.

“누군지 확인했지?”

“네. 저쪽은 부사장이 왔군요. 그나저나 아주 공을 들이는 모양입니다.”

“맞아.”

인파 속에 파묻혀 있던 터라 팔공그룹 관계자들은 황 상무와 박기범 대리의 모습을 알지 못했다.

“따라가보죠.”

박기범 대리의 말에 그 둘은 주차장으로 급히 걸어갔다. 주차장에 이미 있었던 검은색 고급차 세대가 공항로비로 움직였다. 세 대 모두 닛산 세드릭이었다.

“저 차. 세드릭 아닌가요?”

“그런데?”

“혹시 닛산과 손을 잡으려고 하는 건 아닐까요?”

“글세. 그것만 가지고는 알 수 없지 않겠어?”

닛산 레오파드에 올라탄 황 상무는 시동을 켜고 박 부사장과 장준성 과장을 태운 세드릭을 따라갈 채비를 했다. 세드릭 3대가 출발하자 황 상무는 급히 페달을 밟아 차를 출발시켰다.

“안 들키게 거리를 확보할테니 너무 걱정 말라고.”

박기범 대리를 슬쩍 쳐다보면서 황 상무는 차를 몰았다. 다행히 차 앞으로 택시 한 대가 끼어들었다. 차선을 바꿔 옆으로 이동하자 세드릭 3대가 나란히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어차피 저 쪽도 정신없겠죠?”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옆좌석에서 초조하게 앞을 응시했다. 레오파드 앞에서 움직이는 세드릭 안에서 박 부사장은 장준성 과장에게 말했다.

“닛산과 손을 잡아도 되겠어. 아니면 CKD로 부품을 조달하는 방안도 괜찮을 거야.”

“문제는 닛산이 우리와 손을 잡을까입니다.”

박 부사장의 말에 장준성 과장이 말했다. 그 말은 일리가 있었다.

“잡도록 해야지. 자네가 닛산하고 접촉해서 무조건 하게 만들라고. 닛산과 도요타를 다 접촉해서 부품을 조달해오던 직수입하던 하게.”

“어려운 일이군요.”

차는 이동하면서 아카사카에 위치한 고급 요정에 도착했다. 일본식 정원이 멋들어지게 잘 가꾸어진 곳이었다.

넓은 마당에는 자갈이 깔려있어서 차가 지나갈 때 타이어가 자갈과 부딫히는 소리가 마음을 편하게 했다.

요정안으로 들어가자 미리 예약을 했기에 시각위에 한 상 멋들어지게 차려져 있었다. 자리에 앉고 나자 박 부사장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들 수고했어. 우리는 비록 10명이지만 이제 우리 팔공그룹이 국제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는데 앞장서는 우수인력들 아닌가?”

“부사장님. 여긴 비쌉니다.”

먼저 일본에 와 이었던 일본법인 직원이 말했다.

“나도 알아. 그래봤자 얼마나 된다고. 마음껏 먹으라고. 그 정도 돈은 괘념치 않으니까 말이야.”

한편 바깥 차에서 잠시 기다리던 박기범 대리와 황 상무는 서로를 한번 쳐다보았다.

“이제 갈까? 이거 뭐 여기서 더 기다린다고 소용이 없는 것 같고. 우리도 가자고.”

황 상무는 차를 운전했다. 박기범 대리는 차 안에서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은행들간의 관계. 팔공그룹의 자동차 사업구상을 깨뜨려야 한다 그것도 단 2명으로.

차는 먼저 박기범 대리의 맨션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그는 황 상무에게 말했다.

“들어가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TV를 켰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TV에서 나오는 소리가 그나마 빈 집을 채워주는 것 같았다.

넓은 맨션에서 혼자 지낸다는 건 특히나 외국인이 가족과 떨어져 사는건 싫었다. 그래도 회사의 명령이 어쨌든 가야했다.

회사는 직원에게 가끔 부당한 지시를 내리기도 하지만 그 대신 돈을 주니까.

TV에서는 영화를 하나 해주고 있었다. 몇 년 전에 그 역시 극장에서 본 적이 있는 할리우드 영화였다.

영화에서 나오는 영어가 그나마 친숙했기에 마음이 편안했다. 냉장고에서 맥주캔을 하나 꺼내서 소파에 주저앉았다.

“차이나 신드롬이네.”

몇 년 전에 봤기 때문에 기억이 되살아났다.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어난 사소한 사고. 하지만 막대한 돈이 들고,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신경 쓰는 건설업자의 이해관계가 맞물리고, 이를 막고 원자력 발전소의 위험성을 말하는 발전소장은 결국 경찰에 의해 죽고만다.

“마이클 더글러스는 지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잘생겼어.”

어릴 때부터 영화를 많이 보았기 때문에 커크 더글러스와 마이클 더글러스가 부자지간이고 정말 쏙 빼닮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아버지인 커크 더글러스는 유태인답지 않게 게르만족처럼 멋진 턱을 가진 미남인데 그 아들은 좀 못한 것 같았다.

‘원래 자식세대로 가면 갈수록 더 좋아져야 하는데 반대로도 가네. 이상한 일이야.’

TV를 보다보니 이제 잠이 스르르 오기 시작했다. 소파에 앉은 채로 그냥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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