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고개 숙여 인사를 한 후 박기범 대리는 길을 따라 사라지는 코로나 택시를 쳐다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순간 짧은 감회가 돌았다.
그가 태어났던 1955년은 6.25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지나간지 고작 2년 후. 경제가 피폐해진데다 심각한 물자부족으로 빈궁한 나날을 보냈다.
외갓집이 있는 충남 공주에 갔을 때, 1970년대 초까지 전후 복구가 제대로 되지 않아 6.25때 파괴된 건물잔해도 남아있었다.
그나마 항구도시에 복구가 이루어진 목포는 그나마 나았지만 내륙에 위치한, 경제발전으로부터 소외된 중소도시들은 상당히 발전이 더뎠다.
한때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가 지금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며 고도 경제성장을 이끌었고, 이제는 국민소득 3천 달러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선진국이라는, 세계 2위의 경제대국에서 당당하게 신용을 앞세워 자본을 조달한다는 것은 지난 23년간의 눈부신 경제성장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이제 2년이 지나면 제 1차 경제성장을 시작으로 고도 경제 성장을 지속한지 무려 25년. 4반세기가 되는 해이다.
이미 일본에서 접한 한국의 소식은 대학가의 민주화 시위와 사회전반적으로 분출되는 민주화 열기, 세계가 부러워하는 고도성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민주화열기를 막지 못하는 독재정권의 모습이 외신에 보도될 때, 그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뿌듯함을 느꼈다.
만일 이곳 도쿄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지지하는 재일교포나 한국주재원들의 시위가 열린다면 자신도 참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은 불가분의 관계이니까.
“택시.”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아 탄 후 그는 간토은행으로 가자고 말했다. 택시는 도로를 잠시 따라 가더니 유턴을 하여 반대방향으로 달려갔다.
25분 정도 달려 차가 멈추고 도착한 곳은 시부야에 위치한 간토은행 본점이었다.
5층 기업금융부서로 향한 그는 기업대출담당 데스크로 향했다.
“기업 대출 때문에요. 대출을 하려고 하는데 좀 알아보려고요.”
박기범의 일본어가 어눌했기에 한국인임을 단번에 눈치 챈 은행원은 한국어로 답했다. 그는 재일교포였기에 오히려 친근감을 느끼고 박기범을 대했다.
“한국인이시군요. 전 재일교포출신입니다. 그렇다면 그 쪽은 일본기업에 근무하시는 한국사람인가요?”
“아하. 아닙니다. 아니에요. 전 한국의 무등그룹이라는 중견 그룹사에서 왔습니다.”
낮선 땅에서 한민족을 만났다는 사실이 반가웠고 우리말을 쓸 수 있어서 무엇보다 더 좋았다.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일본어로 엉터리로 말을 하느니 차라리 한국어로 말하고 싶은 것을 분명하게 말하는게 더 좋았다.
“그러시군요. 무등 그룹에 대한 정보는 저희가 없네요. 저도 처음 들어보는 회사라서 감히 제가 왈가왈부하기는 어렵지만, 아마 저희 은행을 찾아오셨다는건 아마 우리가 개발도상국에 대한 대출을 해준다는 뉴스를 듣고 오신 모양이겠죠.”
은행원의 말에 박기범 대리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뭐 확실히.”
그 재일교포출신 은행원은 안경을 슬쩍 벗었다가 다시 고쳐썼다.
“개발도상국에 대한 대출은 우리가 하지만 우리 역시 신용과 담보 때문에요. 인도네시아의 국영은행에 5억 달러 대출을 해주고 연리 9.7%를 받았거든요. 10년짜리 장기 대출인데다 나중에 인도네시아가 돈을 못갚거나 할 때, 석유광구를 담보로 잡아서요.”
‘역시 이곳도 어려운가?’
박기범 대리가 침울해하자 그가 말했다.
“무등그룹은 담보가 없나요? 그런 데이터만 주신다면 검토하겠습니다.”
“그렇군요.”
힘 없이 답한 박기범 대리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에게 문득 말을 던졌다.
“혹시 조총련이나 민단에서 운영하는 은행은 없나요? 재일교포가 직접 운영하는 그런 은행이요. 거기라면 우호적일 듯 해서요.”
“있기는 한데. 좋습니다.”
은행원은 짧게 말하고 서류를 뒤적였다. 두터운 서류철을 하나 꺼내더니 내용을 열심히 찾았다.
“여기 있네요.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은행입니다.”
그 은행원이 건넨 서류철에는 교포은행이라는 한문으로 써진 종이가 하나 끼워져있었다. 한민족이 운영하는 은행이라 친근감이 간 그는 가방에서 메모지를 꺼내 옮겨적었다.
“한신은행? 여기가 교포들이 운영하는 곳이군요. 근데 꽤 머네요. 도쿄에 없고 요코하마에 있다니.”
“네. 카나가와 현에 사는 재일교포를 대상으로 하는 은행이라서요. 한국기업에서 왔다고 하면 잘 해줄겁니다. 다만 교포은행들은 생각보다 규모가 작아요. 무엇보다 한국인들이 70만 가까이 살지만 벌써 일본으로 귀화를 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저도 일본으로 국적으로 옮겼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일본에서 한민족이 완전히 사라질까 걱정은 돼요.”
은행원의 말이 끝나자 박기범 대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감사합니다. 좋은 정보 고마워요.”
급히 은행밖으로 나간 그는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잠시 보도블럭 위에 서 있었다. 돌아가면 그날 있었던 결과에 대해 본사에 팩스로 보내고 일본지사의 자금지출내역을 정리하는 등 남은 일을 처리해야했다.
‘그래도 난 편한거야. 본사 자금부는 아주 힘들텐데.’
택시를 탈까 했지만 조금 걷기로 했다. 20여분 정도 보도블럭을 따라 걷다가 택시를 타고 회사로 복귀했다. 차가 회사 앞 건물에 도착하자 마침 근처 지하철 역에서 올라오고 있던 황 상무가 먼저 그를 알아봤다.
“박 대리. 이제 오나?”
“예. 상무님. 간사이 은행은 어떻던가요?”
“소용없어. 산업은행의 지불보증이 없다면 안된다는데?”
그 말에 다소 실망한 듯 고개를 떨군 황 상무는 바로 고개를 들고 박기범 대리에게 말했다.
“어. 자네는 어때? 간토은행은?”
“별로 기대할건 못됩니다. 산업은행의 지불보증에 관한 말은 없지만 무엇보다 담보가 있어야 하는데, 인도네시아에 대출할때는 유전이나 광구를 담보로 잡았다고 해요. 그렇게 되면 우린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박기범 대리의 말이 끝나자 황 상무는 한 손을 바지주머니에 넣고 투덜거렸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게 없단 말이야.”
“하지만 그 쪽에서 말하기는 요코하마에 있는 한신은행을 접촉해보라는데요?”
“아니 거긴 왜?”
이상하다는 듯이 황 상무가 말하자 박기범 대리가 대답했다.
“교포가 운영하는 은행이어서요. 잘하면 대출가능성이 뚫릴 수 있답니다. 물론 교포은행의 자금력이 다소 미흡하다고는 하지만요. 상무님. 한번 뚫어볼까요?”
“좋아. 야마시카 그 친구의 힘도 빌어야겠지만 우린 우리대로 또 뚫어보자고.”
이렇게 말을 하고 박기범 대리는 시계를 보았다. 지금 곧바로 출발을 한다면 도착할 수 있을가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상무님. 내일 아침에 제가 가지요. 차를 좀 빌려주시면 바로 가겠습니다."
“그렇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