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의 시대-23화 (23/159)

23화

다음날 점심시간. 도요타 크라운 택시 한 대가 미나토 특수강 본사 로비에 도착했다. 회사 주차장에는 차가 꽉 들어차 있었다.

회사 임원들이 타는 크라운이나 세드릭등의 고급차와 일반 사원급이 타는 도요타 코로나, 캠리, 혼다 어코드 등이 주차되어있었다.

차들 사이로 들어가 회사로비에 도착하니 이미 야마시카 전 통산 국장이 와 있었다. 그는 반갑게 두 팔을 벌리고 박기범 대리와 황영식 상무를 반겼다.

“오랫만일세.”

야마시카의 말에 황 상무는 당당하게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고 박기범 대리는 고개를 90도로 숙여 인사를 했다.

“나도 반갑군. 식사를 하러 가지.”

“그래. 어. 이 친구가 2년 전 그 때 그 친구로군. 아주 총명했어. 덕분에 나도 통산국장으로서 힘자랑도 했고.”

무슨 말인지 100%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고맙다고 공손히 말하며 고개를 다시 숙였다.

“가자고.”

회사 주차장으로 가서 야마시카 감사는 자기 차를 타기 위해 걸어갔다. 야마시카 감사의 자동차는 독일제 BMW 7시리즈였다. 다소 수수하지만 위엄이 있어보이는 독일 고급차는 크롬 장식으로 호화로워 보이는 미국산 고급차와는 다른 맛이 있는 듯 싶었다.

차에 올라탄 후 야마시카는 차를 몰아 긴자의 식당가로 향했다. 그가 차 안에서 말했다.

“차 좋지? 독일차들은 여기서도 꽤 인기가 높아. 튼튼하고 품질이 좋거든. 그거 기억나나? 나카소네 총리대신께서 TV에 나와서 국민들에게 제발 미국산 오렌지를 사 드시고, 제발 미국산 자동차를 타고 다니라고 설득했었지. 나도 캐딜락을 살까 했는데 문제는 핸들이 왼쪽에 붙어있어서. 일본 도로에서는 탈 수가 없어.”

박기범 대리는 야마시카 감사가 무심코 던진 말이 인상깊게 느껴졌다. 미국과의 무역에서 매년 수백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하는 일본이 미국과의 통상마찰을 비켜가기 위해 나카소네 총리가 나서서 국민들에게 수입상품을 사 쓰라고 호소하는 모습.

총리가 직접 미국산 차를 타고 출퇴근하는 모습을 TV로 보여줌으로서 어떻게 해서든 무역마찰을 피하려는 모습이 조금 독특하게 느껴졌다.

‘한 나라의 총리가 국민들에게 수입품을 제발 사라고 읍소한다?’

박기범 대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 있었다. 1985년의 한국은 아직 개발도상국. 국민들이 마음 놓고 수입상품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는 생활수준도 아닐뿐더러 그럴 정도로 자본과 상품에 대한 자유화를 시행할 수준도 되지 못했다.

아직도 엄격한 외환관리법으로 외환의 유출입에 대해 정부가 강력하게 통제를 하고, 사치품이라는 명목아래 정부가 통제를 하는 국가에서 살다온 박 대리에게 이곳 일본의 풍경은 낯설었다.

하지만 박 대리의 마음속에는 민주주의도 이룩하지 못했으며, 강력한 군부독재가 이어지는 이 나라에 경제적 풍요를 가져오고, 이를 바탕으로 생겨난 중산층이 군부를 무너뜨리고 진정한 민주화를 이루어낸, 일류국가를 건설하리라는 의무감이 생겨났다.

차는 긴자의 한 레스토랑 근처에 도착했다. 차를 주차장에 댄 후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 3층에 있는 별실로 들어갔다.

“뭐 먹을텐가? 스테이크가 낫겠지?”

더 말을 듣지도 않고 야마사키 감사는 자기가 평소 즐겨먹던 걸로 3명 분을 주문했다.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야마사키 감사가 말했다.

“황영식. 자네가 날 보자고 한 건 뭔가 꿍꿍이가 있어서 그런거 아닌가? 날 보자고 한 데는 이유가 있는 거 아니야?”

“친구사이인데 뭘 그런걸 따지나. 물론 부탁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난 뭐가 되겠어? 안 그래?”

황 상무는 친구의 말을 듣고 달래듯이 말을 했다. 야마사키 감사는 커다란 금테안경을 벗어서 렌즈에 묻은 먼지를 손수건으로 닦았다.

“그렇긴 하지. 뭐 부탁이 있어서 접촉하는 거. 난 싫지 않아. 인간관계라는 게 그런 거 아니야? 연락을 잘 안하다가도 자기가 필요하면 전화하는 거지.”

“섭섭하게 왜 그래?”

마치 속마음을 들킨 듯 멋쩍어 하면서 황 상무는 야마사키 감사를 달랬다.

“그나저나 날 보자고 한 이유가 있을텐데.”

야마사키 감사가 운을 뗐다.

“다른게 아니야. 우리 무등 그룹이 이번에 해외차입을 추진중이야. 충남 서산에 석유화학단지를 조성할 계획인데 자금이 필요해. 원화로 천억 정도. 엔화로 대략 150~200억엔 수준. 그래서 여러 은행을 접촉하고 있지. 하지만 주로 다이산 은행이야. 그나마 자금력이 튼튼해서.”

“다이산?”

황 상무의 말을 듣고 야마사키 감사는 다이산 은행이라는 말에 혀를 내둘렀다.

“왜 하필 거길? 일본에 은행이 얼마나 많은데? 한신은행도 있고, 부국은행 등등 은행은 널리고 널렸어. 다이산 은행은 엄청 까다로운 은행이야. 답답할 정도로 말이지. 외국계기업이 다이산 은행에서 돈을 빌린건 대만의 한 회사가 전부야. 그것도 이자가 8~9%정도로 높았어. 다이산과는 접촉을 하지 않는게 좋아.”

야마사키는 식사가 테이블에 나오자 식사와 같이 제공된 물을 한모금 마시면서 말했다.

“그렇군요.”

박기범 대리는 왜 다이산 은행이 자신들에게 까다롭게 굴었는지 야마사키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이보게들. 하필이면 다이산이라니. 차라리 다른 은행을 접촉해.”

“어디가 괜찮을가?”

야마사키의 말에 황 상무가 대답했다.

“음. 우리 미나토 특수강의 메인 뱅크인 킨키 은행과 접촉해보는게 어떻겠나?”

“킨키 은행? 거긴 어디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기 때문에 황 상무는 눈을 찌푸리며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이산 은행은 중급 은행이라 대출여력이 있지만 킨키 은행의 규모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대출여력이 있는지 일단은 의심이 갔다.

“자네 혹시 킨키 상사라고 들어는 봤나?”

야마사키의 입에서 킨키 상사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박기범의 뇌리에 뭔가 스치는게 있었다. 일본 종합상사 중 3~4위 급인 거대 종합상사인 킨키 상사였다.

전통적인 종합상사인 이토추, 미쓰비시, 마루베니, 미쓰이, 스미토모와 맞먹는 수준으로 최근 20년간 급격하게 성장해온 킨키 상사와 도쿄 상사. 이들 회사에 대한 기사는 한국에 있을 때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야마사키 국장님. 설마 그 킨키 상사는 아니겠죠? 이란에서도 석유유전을 개발하고, 시베리아에서 천연가스를 채굴하는.”

“오. 잘 알고 있군. 바로 거기야. 요새 한창 잘 나가고 있지. 말레이시아에서도 석유채굴에 성공했고. 종합 에너지 그룹으로 커나가려고 열심인 회사요.”

야마시카 감사는 스테이크를 한점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킨키 은행의 경영자인 사토이 타츠야 사장이 아주 야심에 가득찬 수완가거든. 그 친구는 킨키 은행을 세계적 수준의 은행으로 키워나가려고 하는 사람이요. 한국기업들에게도 돈을 빌려주면 나중에 전환사채로 할 수도 있고 어쨌든 국제적 규모의 은행으로서 그 세를 확장하려고 아등거리는데 잘하면 그걸 뚫을 수 있겠지. 그 배후에는 킨키 상사가 존재하니까. 킨키 상사정도면 미국에서도 미국 재무부 수준으로 돈을 조달할 수 있어요.”

“그 정도입니까?”

“요즘은 말이요. 웬만한 국가의 신용도보다 다국적기업의 신용도가 더 좋아요. 이미 권력은 정부에게서 시장으로 넘어 온거요.”

박기범 대리의 질문에 야마사키 감사가 말했다. 그는 통산성 국장으로서 활약했지만 과거와는 달리 관료의 힘이 약해지고 그 자리를 기업들이 메워나간다는 사실을 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듯 했다.

“킨키 은행은 조건만 좋으면 얼마든지 돈을 빌려주거든. 다만 담보를 요구하거나 경영참여를 제안하기도 하지요.”

“전환사채도 가능하겠군.”

황 상무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야마사키가 대답했다.

“괜찮은 아이디어야. 뭐 잘들 생각해보라고. 점심이 다 식잖아. 좀 먹으면서 하자고. 먹으면서.”

스테이크를 잘라 한 점 입에 넣었다. 박기범 대리도 스테이크를 썰어 먹으면서 야마사키 감사를 한번 쳐다보았다.

식사를 절반쯤 먹고 나서 어느 정도 배를 채운 다음 야마사키 감사가 입을 열었다.

“여기 스테이크는 아주 맛있어. 그래. 결국 자본조달 건 때문에 온거 아니야? 내가 우리 주거래 은행인 킨키 은행에게 말을 해볼테니 그리 알고 있으라고. 헌데 너무 기대는 하지 마. 자본조달이 기업에게는 늘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자기자본만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야해. 당연한 거야. 남의 돈에 의지하게 되면 그 기업은 쓰러지게 되어있어.”

길게 말을 마친 그는 계속 이어서 식사를 했다. 박기범 대리는 그 말을 유심히 듣고는 내심 희망을 가졌다.

“보험을 드는 셈치고 저희는 어디 은행과 접촉을 해야 좋을까요?”

박기범 대리의 말에 야마사키 감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킨키 은행은 내가 루트를 뚫어줄 테니 어려울건 없지만, 굳이 뚫자면 간사이 은행과 간토 은행이 좀 낫지. 이들 두 은행은 개발도상국에 대해 대출을 많이 해 줘. 이자가 높거든. 현재 일본의 장기금리가 8%야. 간사이 은행의 경우 말레이시아의 국영은행에 3개월 정도 빌려주고 연 9%를 받아갔거든. 그 정도면 괜찮지. 그런 식의 장사를 많이 하니까.”

“결국은 돈 때문이군요. 위험도 덜고 이자도 챙기니까요.”

박기범 대리는 말을 하고 나서 물을 한모금 마셨다. 점심을 먹고 나서 간토은행와 간사이 은행과 접촉해볼 심산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야마사키 감사가 말했다.

“점심은 내가 사지. 생각보다 비싸지도 않아. 1인당 500엔 정도니까.”

계산대에서 계산을 끝마친 후 야마사키는 자신의 BMW에 올라탔다.

“같이 가지.”

“아니야. 우리는 또 일이 있어. 택시로 바로 가야해.”

황 상무는 대답을 하고 헤어졌다. 그는 박기범 대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접촉해볼거지?”

“간토와 간사이 은행 말씀이십니까? 물론이지요. 제가 둘 다 가보겠습니다.”

박기범 대리의 말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난 간사이를 갈테니 자네가 간토를 가게.”

말을 끝마치자마자 도로를 따라 오는 코로나 택시를 세워 멈추게 하고 황 상무가 먼저 차에 올라탔다.

“내가 갈테니 자네도 좀 알아보게.”

“다녀오세요. 상무님.”

============================ 작품 후기 ============================

용어해설

1. 도요타 크라운 : 1955년 등장한 일본 최초의 독자모델. 일본을 대표하는 고급차로 지난 2009년 5백만대 누적판매가 됨. 8기통 4.6L급 고급차

2. 세드릭 : 닛산 세드릭. 1960년 등장한 닛산의 고급차로 2004년까지 생산됨

3. 1985년 당시 지나친 대미 무역흑자를 시정하기 위해 미국산 수입품 구매 장려운동까지 펼침. 그러나 국민들이 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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