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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시대-20화 (20/159)

20화

근처 스시집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박기범 대리는 급히 택시를 타고 산업은행 도쿄지점으로 향했다. 차가 도착한 시간은 12시 58분이었다.

“바로 들어가면 되겠군.”

택시에서 내린 후, 박기범 대리는 정장옷매무새를 다시한번 다듬고 산업은행 도쿄지사의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그는 산업은행 담당자와 회견을 요청했다.

텔레비전이 설치된 대기실에서 10여분 가량을 기다린 이후 산업은행 국장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무등그룹에서 왔습니다. 전 박기범 과장이라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과장직함을 새긴 명함을 사용했기에 그는 명함을 건넸다.

“물론 한국에서는 대리입니다.”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난 후 의자에 앉았다. 자기 책상에서 서류에 결재를 하고 있던 산업은행 국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저는 산업은행 도쿄지사 오연세 국장입니다.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박기범 대리는 공손하게 답하고 소파에 앉았다. 오연세 국장 역시 소파에 앉아서 몸을 거만하게 뒤로 기댔다.

“무등그룹 요새 잘 나가더군요. 경협차관도 받아냈었죠. 2년 전인가요?”

“네. 뭐 저는 그 때 잘 몰라서요. 전 그 때 일개 계장이었습니다.”

“그렇군.”

오연세 국장은 대답을 하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한국에서는 대리. 여기서는 과장이라. 알겠군요. 직급을 높였군요. 여기서만 통용되는.”

사람 좋게 미소를 지으며 손님접대용 소파에 앉았다.

“무등그룹이 왜 우리와 접촉을 하죠? 내가 알기로 산업은행과 무등그룹은 서로 잘 접촉을 안 하는 걸로 아는데.”

오연세 국장이 천천히 말을 이어나가자 박기범 대리가 급히 말을 받았다.

“그게, 저희가 이번에 일본에서 돈을 빌리려고 합니다. 신규사업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본이 소요되는데, 현재 우리나라에서 돈을 빌리는게 쉽지 않아서요. 그리고 이자율의 차이도 있어서 일본에서 빌리는게 더 이익입니다.”

“오. 그래요? 아주 어려운 일을 하시는군.”

국장실 문이 열리고 여직원이 커피잔에 커피를 담아서 내왔다. 앞에 놓인 커피잔을 들고 커피를 한모금 마시면서 박기범 대리는 대답했다.

“제가 일본의 다이산 은행과 접촉을 했는데, 산업은행의 지불보증이나 신용보증이 없다면 대출이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산은이 보증을 해주시겠다는 보증서를 발행해주시면 저희로서는 아주 도움이 되겠습니다.”

“지불보증이라. 결국 최악의 경우 산업은행이 다 뒤집어 쓰라는 것 아닙니까?”

예상은 했지만 뜻밖의 반응이라서 박기범 대리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시다니. 저희는 산업은행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할 겁니다. 지불보증을 서주신다고 해서, ‘아. 어차피 산은이 갚아주니 난 돈만 빌려서 마구 투자하고 다 산은에게 떠넘기자’뭐 이런 태도를 견지하는 건 아닙니다. 산은의 신용보증이 있다면 일본에서 돈을 빌릴 수 있고 지속적으로 사업에 투자하고 원리금은 충실히 갚아서 산은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야죠.”

“그렇군.”

오연세 국장은 잔을 들어 커피를 마셨다.

“대충 알겠소만. 굳이 국내은행을 외면할 필요는 없지 않아요? 외국은행에서 돈을 빌리게 되면 외국인에 간섭이 있을텐데 그렇게 되면 산업은행이나 재무부의 기업지도에도 문제가 생길텐데요.”

조심스럽게 오연세 국장이 말을 했지만 박기범 대리는 오연세 국장의 말 뜻을 정확하게 인지하게 못했다.

“내 말은 해외차입이 자칫하다가는 잘못해서 기업의 이익 때문에 국가전체의 이익이 침해받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가요?”

박기범 대리는 커피를 다시 한모금 마셨다. 대한민국 경제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재무부-상공부-산업은행 라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자기 소신대로 말했다.

“듣자 하니 레이건 행정부는 정부주도의 경제개발 대신 민간주도로 이끌고, 지나치게 거대한 경제관련 정부부처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경제를 이끄는 건 민간 기업이니까요. 그래서 레이건 본인이 케인즈주의를 버리고 밀턴 프리드먼이 이끄는 통화주의로 선회한 것 같아요. 그건 알고 계시죠?”

그 말에 오연세 국장은 다소 불쾌한 듯 커피잔을 입에 가져다댔다. 그리고 조금 거칠게 내려놓았다.

“뭐 어쩌라는 거요? 미국은 그렇다 쳐도 우리는 우리야. 아직 우리는 자유롭게 외국계 은행에서 돈을 마구 빌릴 정도의 자본자유화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지.”

오연세 국장은 여기까지 말하고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그리고 금으로 장식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고 담배연기를 방 위로 내뿜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아직은 철저한 정부통제가 필요해요. 기업인들도 자기 회사의 이익만 고려하지 말고 국가경제의 이익을 고려해 지나친 설비투자를 삼가고.”

담배를 한모금 어 피우고 나서 테이블 위에 놓인 재떨이에 담뱃재를 가볍게 털어냈다.

“언제나 산은과 재무부, 상공부의 지도를 따라야 하는거요. 우리가 하지 말라면 깨끗이 단념해야 옳지요. 그게 국가경제를 위한 기업의 책무라고 할까?”

“기업의 책무?”

“그렇소.”

박기범 대리의 말에 대답을 하고 난 후 무슨 생각이 떠오는 듯 갑자기 자세를 고치며 말했다.

“이번에 우리 산은에서 차가 한 대 필요해요. 뭐 국장급 정도 되는 내가 한국에서도 최고급차인 로얄 프린스를 타는데, 여기서도 조금 고급차종을 굴려야 하지 않겠어요? 일본인들도 있으니 조금 기분을 내며 탈 수 있는 그런 큰 차가 필요해요. 도요타 크라운 정도면 될 듯한데. 적어도 3천cc급은 타야겠죠.”

그는 아주 거만하게 말했다.

“그러려면 이곳에서 피땀흘려 한국기업의 지도를 담당하는 산은직원에게 누가 한 대 정도는 사주어야 하는데 이 기업인들이 예의가 없어요.”

“기업이란게 관료들의 자동차나 사주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봉이 아니잖습니까?”

박기범 대리는 차분하게 말했지만 그 말을 들은 오연세 국장은 불쾌한 표정을 짓고 담배를 재떨이에 던져버렸다.

“자네 무등그룹 사람이지 않은가? 참으로 불쾌하군. 감히 그런 말을 하다니. 기업인이라는 건 사농공상 중에서도 가장 미천한 존재야. 어딜 감히 나 가은 관료에게 그런 말버릇을...”

푹신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오연세 국장은 불쾌한 듯이 쏘아붙이면서 자기 책상으로 되돌아갔다.

“국장님. 말이 너무 지나치시군요. 지금은 20세기입니다. 1985년이라고요. 1885년인줄 아세요? 그리고 우리가 왜 당신한테 자동차를 바쳐야 하는 거지? 일본에서 해외차입문제로 발에 땀이 차도록 뛰어다니는 건 우리야. 너희 산업은행 직원들처럼 가만히 에어컨이 시원하게 틀어져있는 사무실에 앉아서 허세를 부리는 세금도둑놈은 아니라고. 너네가 한게 뭐 있어? 산업은행? 한국의 산업기반을 망가뜨리는 은행은 아니겠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확 쏘아붙이고는 곧바로 뒤돌아서서 국장실을 나갔다. 이 말을 들은 오연세 국장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반응을 보였다는 듯 놀란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있었다. 박기범 대리가 산업은행 도쿄지사를 빠져나가자 오연세 국장은 중얼거렸다.

“정신 나갔군. 그리고 어딜 감히 큰소리야. 감히 관료에게."

그는 책상에 놓인 전화를 들었다. 그가 앉아있는 창문 맞은편에 시계 3개가 붙어있었다. 서울시간, 도쿄시간, 뉴욕시간이었다. 서울과 도쿄는 시간대가 같았기 때문에 전화기의 다이얼을 바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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