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의 시대-19화 (19/159)

19화

황 상무는 박기범 대리를 데리고 집 바깥으로 나갔다. 같이 차를 타고 회사로 돌아간 후 차를 회사오피스 지하주차장에 두고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우리 집은 역시 30평짜리 맨션이야. 자네 집보다는 회사에서 좀 더 멀어. 굳이 그렇게 정한건 그래야 자네가 일을 다 하지 않겠어? 하하.”

택시 안에서 대화를 나눈 후 도로변에 차가 멈춰섰다. 황 상무가 택시비를 계산하고 차에서 내리자, 세계 2위 경제대국의 수도인 도쿄답지 않게 허름한 골목가가 있었다.

골목 아스팔트 도로는 포장이 잘 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로 만든 허름한 목조건물이 뭔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포장이 잘 된 아스팔트 위로 번쩍이는 BMW한대가 지나가자 더욱 뭔가 어색했다.

나무로 된 미닫이 문을 드르륵하고 열자 다소 더웠던 바깥 날씨와는 다르게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게 피부에 닿았다.

“어. 황 상무 왔구만.”

우리 말이 들렸기에 다소 놀란 박기범 대리는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주인이 칼로 음식을 다듬다가 칼을 내려놓고 황 상무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역시 여기 오뎅탕이 아주 맛있어서요.”

“그런데 지금 시간이 겨우 4시 반인데 벌서 술 마시려고? 술은 밤에 마셔야지.”

재일교포인 이 집 주인은 노정모라는 사람으로 일본식 이름은 마사오카 모리츠였고 지난 1962년에 귀화를 했다. 일본여자랑 결혼해서 4남매를 키웠고 모두들 도쿄에서 살고 있었다.

“애들은 잘 지내요?”

황 상무가 말하자 노정모 사장은 빙그레 웃었다.

“다들 잘 지내지. 애들하나는 잘 키웠어.”

“형수님은 어디 가셨어요?”

노 사장이 컵에 콜라를 담아 황사장에게 주자 더웠던지 그것을 다 들이키고 나서 재차 물었다.

“친구들하고 괌에 놀러갔어. 지난번엔 하와이를 다녀오더니 요즘 들어 해외여행을 많이 가. 뭐 생각보다 비싸지도 않고 해서 말이지. 그나저나 오늘 모시고 온 손님은 누군가?”

“전 박기범 대리라고 여기 황영식 상무님 직속 부하입니다. 무등그룹 경영지원실 자금부에 근무하고요.”

“그래요. 반갑소. 그 무등그룹은 돈을 어떻게든 확보하려고 몸부림을 치는데 아 언제쯤 두둑한 현금을 가지고 어디에 투자를 할까? 은행이나 증권사에서 우리에게 투자해달라고 굽실거릴 날은 언제 오는 거야?”

첫 손님인 이들에게 오뎅탕을 만들어주려고 재료들을 손질하면서 말을 던지자 황 상무는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런 날이 오겠죠. 우리 회사가 더 안정적으로 성장하면, 그래서 내부에 현금을 두둑이 쌓으면요. 헌데 아직까지는 조금 곤란해요. 더 기다려야 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노 사장은 사케 두 병을 꺼내 박기범 대리와 황영식 상무가 앉아있는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건 공짜야. 많이들 먹으라고. 난 여기 일본에 있지만 한국기업들이 빨리 일어서서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해. 한국신문을 보면 정치적으로도 암흑기인데, 경제가 발전해야 민주주의로 실현되거든.”

노 사장은 다시 안쪽 조리대로 들어가 다 조리가 된 오뎅탕을 들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잘 먹을게요.”

황 상무는 넉살 좋게 말하고 박기범 대리에게 말했다.

“내일부터는 은행에 열심히 돌아다녀야 해. 해외차입을 실현하려면 말이야.”

“이보게들. 난 경제와 정치는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고 보는 사람이야. 왜 한국은 못살고 일본은 잘살까? 한국은 정치가 썩었어. 대통령 해먹겠다고 쿠데타를 일으키고 공수부대를 도시에 투입하는 미친놈이 지금 대통령이잖아.”

“또 시작이군. 우리 노 사장의 철학.”

그 말에 노 사장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어이구. 역사 이를 증명했어. 역사가. 공수부대를 도시에 투입한 미친놈이 대통령이라니. 차라리 조커더러 고담시 시장을 하라고 그래. 그런 마당에 경제가 제대로 되겠어? 자본주의란 민주주의가 바탕이 되어있지 않으면 안되거든.”

“그 말은 맞습니다. 사장님.”

박기범 대리는 잔에 사케를 따라 담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마빡에 그림그린 친구(고르바초프를 지칭함. 소련의 서기장)도 공산주의를 버리고 경제개혁한다고 나서는데 그 친구가 체육관대통령 같은 미친놈보다는 나아. 난 국적이 일본이니 안기부인지 개기부인지가 잡아가지는 않겠지.”

박기범 대리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노 사장의 개그가 그를 정말 빵터지게 했다.

“언어유희 작렬이시군요. 마빡에 그림그린 친구하며 안기부인지 개기부인지. 대한민국 국민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솔직히 말은 맞지.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안전파괴부가 낫지.”

“노 사장 아주 배짱이 있어.”

황 상무가 말하며 술을 잔에 따랐다.

다음날, 아침 8시까지 도쿄 오피스로 출근한 뒤 상무에게 지시를 받고 곧바로 은행으로 출발했다. 아침에 출근하는 일은 서울에 있을 때보다 더 편했다. 무엇보다 걸어서 25분 거리였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출근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집을 구한 황 상무는 레오파드를 타고 회사에 왔다. 그는 오자마자 본사에서 어제 저녁에 도착한 팩스와 텔렉스 내용을 검토했다.

“아. 자네 은행들 다 돌고 나서 여기로 복귀해. 자금계획 짜서 올려야 하거든. 물론 서울에 있을 때보다야 편하지. 개략적으로 짜면 돼. 지출결의서위주로 말이지.”

황 상무는 박기범 대리에게 말했다. 그는 회사건물을 빠져나와 신주쿠에 위치한 다이산 은행 본점을 찾아갔다. 다이산 은행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그는 얼굴을 알리고 자주 발품을 팔기로 결심했다.

도쿄 신주쿠에 위치한 다이산 은행은 1912년에 세워진 은행으로 73년이나 된 아주 역사가 깊은 은행이었다. 그만큼 보수적이지만 1조 엔이 넘는 예금을 보유했으며 이용고객만 해도 500만이 넘는 중견 은행이었다.

“무등그룹에서 왔습니다.”

기업뱅킹 창구에 자기 차례가 되자 가서 앉은 박기범 대리는 어설픈 일본어로 쭈볏거리며 말했다. 한가지 다행인 점은 영어가 먹힌다는 것이었다.

일본어로 적힌 명함을 건네주자 담당 은행원이 이상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혹시 황영식 상무님과 같은 회사?”

“네 그렇습니다. 융자건으로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러시군요. 무등그룹은 한국기업인데 일본에서 자금을 조달하신다니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보통은 한국에서 돈을 빌리지 않습니까?”

은행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박기범 대리는 어떻게 이해를 시킬지를 잠시 고민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해외에서 돈을 빌리고 싶습니다.”

“왜죠?”

박기범 대리의 말을 딱 잘라 끊은 뒤 질문을 던진 은행원은 거만한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다소 건방져보이는 태도였지만 급한 건 무등그룹과 박기범 대리 자신이었기에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이자가 더 싸니까요. 한국의 이자율은 두자리수가 넘습니다. 반면 이곳은 금리가 낮아서 더 싸게 자본을 조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서였지요.”

“발상은 좋지만 현실을 잘 모르시고 하시는 말 같습니다.”

처음부터 부정적인 마루가 강하게 내비쳤다. 그는 손에 깍지를 끼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책상 옆에서 두툼한 파일철을 하나 꺼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한국이라는 국가의 경제가 현재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 아시오? 솔직히 말해 별게 아닙니다. 세계 20위권안에 간신히 드나요? 아니면 30위? 그렇다고 스위스나 이런 유럽국가들처럼 소득이 높은 것도 아니고. 경제적으로도 별볼일 없는 마당에 당신네한테 돈을 빌려준다는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질 않아요.”

그렇게 말하고 그 은행원은 서류철을 펼치더니 그에게 내밀었다. 서류에는 세계 경제력 규모에 대한 숫자가 기재된 종이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한국은 일본과 가장 가까이 붙어있는 경제적으로도 꽤 큰 시장입니다. 어차피 일본입장에서도 한국에 투자를 하는 입장인데, 그리고 우리나라가 아직 경제력은 미흡하지만 장차 성장세를 이어나가 지금보다 몇 배나 더 커질 것이 자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돈을 투자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 아닐까요?”

“그럼 한국에서 돈을 빌리는 건 어떨지요?”

은행원은 몸을 다소 앞으로 당기면서 말했다.

“저희도 그렇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저희 기업은 한국내에서 차별받는 회사로 정부로부터 외면받습니다. 그래서 저희 회사는 그룹사임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건설사 하나 없습니다. 정부가 발주공사를 주지 않거든요.”

“왜 그런거죠? 이해가 가지 않군요.”

“한국은 그런 부분이 있는 나라입니다. 특정지역에 기반을 두면 알아서 특혜가 주어지고, 특정지역 출신이면 고위공무원도 될 수 없습니다. 그런 비상식적인 면이 분명 있는 나라지만 앞으로는 개선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개선된 뒤에 오셔서 돈을 빌리세요. 그리고 우리 은행의 방침은 당신네 회사가 더 커진다면 가능합니다. 황 상무님께서 재무제표를 주셨지만 그 수준으로는 불가능해요.

“그럼 얼마나 더 커져야 가능하겠습니까?”

“현재의 2배는 커져야 저희사 서류를 검토할 수는 있지요. 그리고 산업은행이 여기서 7.5%로 돈을 빌렸다는 점은 나도 알지만 그건 산업은행이라는 국책은행이 백그라운드로 존재하는 것이고 당신네는 그런 것이 없질 않소.”

“만에 하나 산업은행이 우리 뒤를 봐준다고 한다면 가능하겠습니까? 산은의 지불보증만 약속받으면?”

“서류는 검토해보도록 하지요.”

일단 박기범 대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은행문을 나섰다. 그는 근처 공중전화로 다가가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박기범 대리입니다. 상무님. 일단 지금 회사로 복귀해서 자금계획을 작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유는 급히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입니다. 네. 바로 복귀하겠습니다.”

박기범 대리는 전화를 끊고 공중전화 문을 나서자마자 근처를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세웠다. 택시를 타고 회사로 향한 그는 상무에게 이 일을 간단히 보고했다.

“상무님. 산업은행 도쿄지점에 한번 들러서 지불보증이나 신용보증을 받아낼 수 있을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오늘 들리긴 뭣하니 내일 들르도록 하지요. 오늘은 자금계획 작성하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냐. 그 정도는 내가 하지. 점심 먹고 바로 가게. 일단 밥 먹으로 나가자고.”

“상무님께서 그런 일을 하시다니요. 여직원은 오늘 안보이네요.”

“그 사람은 이런 일 시킬 정도가 못돼. 내가 잠깐 하면 돼. 그리고 다음부터는 당신이 전부 다하면 되잖아. 뭘 새삼스레.”

손사래를 치며 박기범 대리에게 장난스레 말을 한 황 상무는 같이 근처 식당가로 걸어갔다.

“이 근처엔 유서깊은 식당이나 가게가 많아. 특히 저 과자가게는 역사가 100년이나 되는데, 아주 맛있어. 값도 비싸고. 하지만 그 값을 하지. 한달에 한번 정도 무료로 제공하는데, 그 날은 한시간이 넘게 기다려야 해.”

“그 정도나요?”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박기범 대리가 말했다.

“그럼. 나도 자주가는데 이따가 여기서 과자나 좀 사갈까? 아니면 팥빙수라고 먹지.”

“아니에요. 식사 끝나고 바로 가야겠죠. 산은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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