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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시대-18화 (18/159)

18화

1985년 9월 2일. 하네다 공항에 대한항공 보잉 727기가 한 대 착륙했다. 이 비행기에서 내린 박기범 대리는 공항로비를 빠져나왔다.

공항입구로 나가자 낮이 익은 한 남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영식 상무가 그 자리에 있었다.

“황 상무님. 일본에서 잘 지내셨습니까?”

공손하게 인사를 하자 황 상무는 호탕하게 웃었다.

“나야 잘 지내지. 이제부턴 자네가 고생을 해야 할 차례인데.”

콧잔등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치켜 올리며 황 상무가 대답했다. 이미 6월부로 도쿄에 와서 해외융자를 얻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고 일본에 와서 맨션을 구하고 오피스를 얻기 위해 노력하다보니 은행관계는 생각보다 미흡하게 진행괼 수밖에 없었다.

“차를 가져왔어. 같이 가자고.”

차의 트렁크에 짐을 넣으면서 박기범 대리가 대답했다.

“상무님. 제가 운전할까요?”

“길 알어?”

대답을 하고 나서 박기범 대리는 트렁크의 문을 닫고 순간 주춤했다. 황 상무는 차의 오른쪽 문을 열고 올라탔다.

‘음. 나더러 운전 하라는 것이구나.’

그가 앞문을 열고 차에 올라타자 차에는 핸들이 없었다.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달리 핸들의 위치가 반대라는 것이다.

“어때? 차 좋지?”

“그러네요. 문을 닫을 때 잘 닫히고 차도 생각외로 조용한 듯 싶군요. 인테리어도 고급이고요.”

“닛산 레오파드야. 중고로 한 대 샀어. 여긴 중고차가 값이 아주 싸더라고. 미국을 능가하는지, 미국과 맞먹는지 여하튼 세계 1.2위를 다투는 자동차 공업국답게 자동차가 지천에 널렸어. 중고도 싸고 말이지. 자네도 차 한 대 필요할텐데.”

“괜찮습니다. 전 택시타거나 전철타지요.”

박기범 대리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하고 시트에 몸을 기댔다. 황 상무가 시동을 걸고 차를 운전했다. 차는 하네다 공항을 벗어나 번잡한 도쿄 시내로 들어갔다.

고가도로를 타고 가니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임에도 차가 많이 막혔고 아래 강을 따라 나있는 강변 도로에도 차들이 가득했다.

“일본쪽 접촉상황은 어때요?”

“어렵지. 일단 내가 뚫은 은행이 다이산은행, 메이지 은행, 쇼와은행인데 아직은 어렵더군.”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을 계속 내다보자 황 상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장님은 좀 어떠신가? 그렇게 믿고 맡기던 최 전무가 급작스레 세상을 뜰 줄 누가 알았겠어?”

“그렇죠. 뇌경색이라니. 평소 쌓인 스트레스가 아주 많았나 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하루아침에 그냥 쓰러지시다니.”

그 해 5월. 일본지사 설립을 본격적으로 앞두고 나서 분주하게 움직이다가 일요일에 산행을 갔다가 갑자기 뇌경색을 일으켜 쓰러지고 난 후 영영 눈을 뜨지 못했다.

회사 설립부터 창업공신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해왔고 재무적인 어려움들을 훌륭하게 극복해왔던 최선우 전무의 급작스런 사망은 무등그룹에게 있어서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등그룹은 일본지사를 설립하여 해외에서 본격적으로 차입을 하는 해외차입의 시대를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 여기가 우리 사무실이야. 도쿄 니혼바시에 있지.”

차를 지하주차장에 가져다 댄 후 내렸다. 박기범 계장은 트렁크를 열고 짐을 꺼냈다.

“자네가 머물 집은 여기서 걸어가면 15분 거리지. 내가 태워줄테니 일단은 트렁크에 넣어. 30평짜리 맨션이야. 방 두 칸. 혼자 올 거라면 18평짜리 방 하나짜리 맨션도 있어. 1인용인데, 자네 결혼도 했고 아내 생각도 하면 30평 정도가 낫겠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상무는 차입현황에 대해서 대강 말했다.

“현재 상태로서는 너무 어렵더라고. 은행들이 일단 외면을 하니까 말이야.”

니혼바시에 위치한 작은 사무실 건물 5층에 위치한 무등그룹 일본지사는 사무실 크기가 고작 55평 정도에 불과했다. 직원이라고는 황영식 상무, 박기범 대리, 출납관리를 하는 일본인 여직원 하나가 전부였다.

여직원이라고 해야 아르바이트 식으로 잠깐 잠깐 불러다 쓰는 것에 불과했다. 손님 접대용 소파에 앉자 여직원이 음료수를 내왔다.

“이제 상무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아니면 전무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갑자기 그건 왜?”

여직원이 내온 음료수를 한모금 마시며 황 상무가 대답했다.

“본사에서는 물론 직함뿐이지만 직급을 한단계 더 높여서 전무급으로 명함을 발급해주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도 대리지만 과장이라고 명함에만 적혔으니까요. 그래야 은행과 상담할 때 좋지요.”

“과장직함이 탐나나?”

빙그레 웃으면서 황 상무가 대답하자 박기범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음료수가 담긴 컵을 들었다.

“아뇨. 제가 이제 서른인데 과장이라니. 대개 과장하면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직함이잖아요. 서른 다섯 정도 되어야 과장 달고 해야 좀 어울리죠.”

“이 사람아. 그럼 나이 50에 상무직함을 갖게 된 난 뭐야? 할아버지야? 이 친구 참. 나도 전무라고 불리니 듣기는 좋지. 물론 상무급이지만.”

소리내어 웃으며 황 상무는 소파에 더욱 깊숙이 몸을 담갔다. 그는 이마를 살짝 긁으면서 박기범 대리를 쳐다보았다.

“오늘은 이따 짐정리하고 푹 쉬고, 내일부터는 은행을 돌아다녀. 올해 초. 경영회의 기억나지? 우리가 제대로 일을 하려면 서산에 석유화학단지를 건설해야하는데, 상공부로부터 인가 받은 금액이 무려 400억 원이야. 전부 해외조달로 풀어나간다면 못해도 100억 엔은 끌어와야 해. 그리고 내가 알아보니 사무라이 본드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아직 발행한 적이 없어.”

황 상무의 말에 박 대리는 의구심을 품으면서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사무라이 본드 발행 잔액이 얼마나 되기에 그렇죠?”

“많이들 발행 하나봐. 현재 미국의 프라임 레이트(미국의 대형 은행들이 가장 신용도가 높은 기업에 대해 적용하는 최우대 대출금리)가 10%안팎인데 반해서 일본은 단기금리의 경우 5.5%수준이잖아. 그러니까 모이는 거겠지.”

“아. 상무님. 산업은행이 7.5%로 일본에서 차관을 도입했다는데 우리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산업은행은 애기가 달라. 거긴 결국 최악의 경우 정부가 발권력을 동원하던, 재무부 금고에서 국고를 인출하던 다 메워주니 가능하지. 헌데 우리는 다르지. 우리 목표는 연 10%이하로 돈을 빌리는 거지. 산업은행 7.5% 엔화차관에 1%를 가산한 8.5%수준으로 협상을 마쳐야 할 것 같아. 이 수치는 괜찮은 것이 일본의 장기금리가 8.2%니 0.3%나 높잖아.”

황 상무의 해박한 금리지식에 혀를 내두르면서 박기범 대리는 놀란 표정으로 연신 고개만 끄덕이며 앉아있었다. 황 상무는 이미 8.5%선을 최후의 보루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84년 12월과 85년 2월에 열린 경영회의에서는 10%이하라는 기준이 나왔지만 황 상무는 1.5%를 더 낮추고자 하는 것이다.

만일 100억 엔 수준의 차관을 도입할 시에 10%라면 연 이자가 10억, 8.5%라면 8억 5천만 엔이므로 이자비용이 15%나 감소하는 것이므로 회사로서도 절실한 것이다.

“생각해봐. 말이 1985년. 미국에서는 컴퓨터가 가정에도 보급되고, 컴퓨터가 사무실에도 보급되어 업무의 혁신이 일어나고 있어. 여기 일본만 해도 회사에 컴퓨터가 이미 구비되었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미국인이 도쿄 주식시장에 상장된 주식을 사고, 일본인이 시카고 선물거래소에서 콜옵션을 사는 시대란 말이야.”

황 상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박기범 대리는 앞을 보았다.

“그런데 이 나라는 기업이 돈을 빌리려면 단자회사에 연락을 해야하고, 단자회사는 재무부의 승인을 받아 외국에서 돈을 빌려 인심쓰듯 배포하고 있으니. 적군파인지 뭔지 미쓰비시 중공업 건물을 날려버리는게 아니라 재무부 국제금융국을 폭파시켜야해.”

“상무님 아이디어가 좋습니다만 정말 어려운 도전과제가 되겠군요. 쉽지만은 않지만 한번 해볼 만합니다.”

“그래. 좋아. 그 정신병자 집단인 재무부를 진짜 정신병원으로 보내버리자고. 솔직히 재무부는 미친놈이야. 지들이 뭔데 은행과 금융기관에게 ‘지시’를 하고 지랄이야? 그럴거면 지들이 은행을 직접 하던가. 은행은 배알도 없나? 나 같으면 가만 안 있지. 어쨌든 자네의 그 패기가 마음에 들어. 자네가 회사에 들어온 지가 벌써 5년째인가?”

“네. 80년에 입사했으니까요.”

황 상무는 지나간 5년간의 기업을 반추하는 눈치였다. 그도 이제 나이가 50이었다. 회사의 공식적인 퇴직나이가 56세이므로 6년은 더 버틸 수 있었다. 여기서 잘만 해낸다면 전무는 노려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말이 5년이지 격동의 기간이었어. 어떻게 매년 사건이 하나씩 터지는 건지 몰라. 80년엔 5.18이 터지고 81년엔 산업합리화조치, 82년엔 장영자, 이철희 어음사기사건, 83년엔 버마 아웅산 테러. 그 와중에도 우리 회사는 계속 발전을 거듭했으니. 전세계 주요 자동차 시장에 안전벨트용 나일론 섬유를 팔고, 타이어용 합성고무시장에도 진출했고.”

“그렇습니다. 이제는 석유화학단지를 짓기 위해 그 까다로운 상공부와 재무부의 허가를 받았으니까요. 저 상무님. 괜찮으시면 저는 짐을 정리하러 갈게요. 제가 머물 집이 어딘가요? 저 혼자 갈까요?”

“아냐. 같이 가야지. 자네 어딘지 모르잖아. 나랑 차타고 가자고.”

다시 지하주차장으로 간 그 둘은 황 상무의 닛산 레오파드 자동차를 타고 박기범 대리가 살게 될 집으로 향했다.

“산건 아니고 빌린 거야. 매달 얼마간 내면 될걸. 월 관리비가 4만엔 정도라 좀 비싸긴 해도 그만한 값어치를 하지. 임대료까지 감안하면 더 비싼데 그건 회사가 내니까.”

차가 맨션 주차장에 도착했다. 트렁크를 열고 짐가방을 꺼낸 뒤 그가 살 805호로 향했다. 맨션에 대충 짐을 놓고 나서 박기범 대리는 황 상무에게 말했다.

“오늘은 식사라도 하실까요? 짐은 제가 차차 정리를 하면 되고 내일부터 제가 각 은행을 돌아다니지요.”

박기범 대리의 말에 황 상무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술이나 한잔 하지. 여기 와서 찾아낸 좋은 술집이 있어.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술집인데 괜찮아.”

============================ 작품 후기 ============================

드디어 일본으로 돈빌리러 갑니다.

여기서 황 상무가 산 레오파드는 1980년에 탄생한 일본 닛산의 중대형 모델로 스포츠세단으로 6기통 3천cc급 자동차입니다.

단기금리는 1년 이내. 장기금리는 1년 이상 장기입니다. 경영학적 지식이 약간 필요한데 장기금리가 높은 이유는 돈을 오랫동안 빌려주니 빌려주는 사람도 돈을 더 내놔라 해서 이자가 높지요.

사무라이 본드는 외국기업이 일본에서 엔화표시 채권을 발행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Drebin기업이 일본에서 기계 사올려고 일본에서 채권발행하는 겁니다. 어차피 일본에서 엔화주고 일본기계 사오니 엔화로 빌리는 것이죠.

실제로 1999년에 삼성이 사무라이 본드를 200억엔 정도 국내최초로 발행하고. 지금은 포스코등 국내 대기업들도 사무라이본드를 잘 발행합니다. 일본에서 국내 대기업이 채권발행하면 이자를 1%만 주면 되거든요. 우리나라에서는 5%이상 주어야하니까요.

발권력 : 말 그대로 정부가 돈찍어내는겁니다.

적군파 : 일본의 공산주의 신봉 테러집단으로 1974년에 미쓰비시 중공업본사에 폭탄테러를 해서 8명을 사망케 합니다. 이들은 나중에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에서 기관총을 난사해 수십명을 또 사망케 했죠.

81년 산업합리화조치 : 정부가 너는 이거해. 너는 저거해 라고 한겁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장영자 이철희 어음사기사건은 장영자씨가 가진 돈으로 기업들에게 빌려주고 그 어음을 받았는데 그 어음을 담보로 돈빌려 주식투자했다가 망해서 어음이 부도났고 어음을 발행한 기업들도 줄줄이 쓰러졌던 일입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의 정치자금조달을 위해서 벌인 일이라고도 합니다. 진실은 저 너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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