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의 시대-17화 (17/159)

17화

1984년 9월에 열린 전사(全社) 경영회의.

전사 경영회의는 사장을 비롯해 경영지원실과 기획실 전 직원, 그리고 각 사업본부의 본부장들과 임원들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매월 월례회의를 여는 강당에서 회의를 열었다. 강당을 가로질러 테이블을 설치하고 서로 마주볼 수 있도록 의자를 배치하여 전부 52명이 앉을 수 있도록 했다.

경영지원실만 해도 자금 10명. 회계 11명. 법무 5명. 관리회계 7명에 최 전무를 포함해 34명이나 되었다.

기획실 6명에 중공업본부장, 농산물본부장, 경공업본부장, 수출입본부장과 각 본부별로 할당된 상무와 이사가 각각 1명 씩 12명이 모여 총 52명이 자리에 앉았다.

이들은 모두 기획실에서 작성한 신사업 진출안에 대해 내부검토를 하고 있었다.

“우리 회사는 이제 석유정제업에 진출을 해야겠어. 현재 우리가 세계적 경쟁력이 있는 합성섬유분야에서의 우위를 이어나가려면, 원료의 안정적 공급이 절실해. 그리고 신기술을 도입해서 인건비로 승부하는 대신, 자본력과 기술로 승부하도록 해야한다고.”

오 사장은 큰 소리로 외쳤다. 세월이 흐르면서 정권차원에서 돈을 요구하는 시비는 줄어들기는 했지만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재계 인사로부터 정치자금 헌납에 미온적인 재계 7위의, 부산에 바탕을 둔 국제그룹을 정권이 직접 나서서 해체시킨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된 이후 더욱 신경이 곤두선 모습이었다.

“해외차입으로 석유업에 뛰어들게 되면 우리 경공업본부는 화학섬유 및 특수섬유 사업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뛰어들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까지 회사의 이익을 주도해온 우리 경공업본부는 이 조치를 적극 환영합니다.”

경공업본부장이 말했다. 이 말에 중공업본부장도 거들었다.

“우리는 중공업이 너무 약합니다. 이번 기회에 석유정제업 진출로 중공업을 강화한다면 시너지가 클 듯 합니다. 어차피 중공업본부로 들어오는 것이고, 저희 본부가 만든 나프타나 석유제품을 경공업본부에 적시에 공급하면 전사적 시너지가 커지겠죠.”

중공업본부장의 말에 기획실 정 부장이 말했다.

“저희는 그래서 충남 서산에 석유화학단지를 건설할 예정입니다. 이미 기존 석유화학단지가 조성된 전남 여수나 여천지역은 이미 포화상태입니다. 그리고 향후 우리나라는 중국과 국교를 열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정 부장은 이어나갔다.

“이 때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서해안 지역에 반드시 투자를 진행시켜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서산 쪽 아니면 전북 군산 부근에 석유화학단지를 건설할 예정입니다. 내부적으로는 서산이 가장 입지조건이 좋다고 보고 있습니다.”

“황 이사는 어떻게 생각하나?”

자금부장에서 작년에 이사로 승진한 황영식 이사는 웃으면서 말을 했다.

“아니. 기획실에서 기획한대로 우리는 자금집행을 하면 되죠. 하하하. 뭐 내가 전 부장 실력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일단 책상에 놓인 서류를 모두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기획실 전부장의 말이었다. 박기범 대리 역시 자기 앞에 놓인 서류를 꺼내 한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이 서류는 재무부와 상공부의 허가를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상공부나 재무부 둘 중 하나만 뚫어도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인가를 해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 부장의 말에 박 대리는 재무부에서 일하는 송영찬을 떠올리면서 서류를 검토해보았다.

사업기획서

제출회사: 무등그룹

제출일 : 1984년 x 월 x 일

槪要

石油는 産業發展에 없어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자원입니다.

뿐만 아니라 무등그룹이 단순 섬유업 대신 고가의 合成纖維 및 섬유원료분야에서 현재와 같은 세계적인 우위를 계속 점하기 위해서라도 石油를 자체 정제할 능력을 갖춘 정제설비도입이 필수적입니다.

우리 회사는 輸出로 커온 기업이니 만큼 앞으로 짓게 될 석유정제시설도 輸出用으로 만들어 절대로 國內 石油시장질서를 교란시키지 않겠습니다. 原油는 韓國石油公社로부터 도입을 하여 외환반출을 억제하고 國內市場에 팔지 않아 현재의 石油販賣질서를 흐트러 뜨리지 않으려 합니다.

여기서 정제한 石油는 전부 나일론 추출, 합성고무 생산을 위한 나프타 용으로 전환을 할 것이며 휘발유나 디젤이 나올 경우 사용여부를 商工部와 石油公社와 상의하여 결정토록 하겠습니다.

보다 많은 외화 획득을 할 수 있도록 부디 商工部와 財務部의 指導鞭撻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려운 한문으로 쓰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개요

석유는 산업발전에 없어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자원입니다. 뿐만 아니라 무등그룹이 단순 섬유업 대신 고가의 합성섬유 및 섬유원료분야에서 현재와 같은 세계적인 우위를 계속 점하기 위해서라도 석유를 자체 정제할 능력을 갖춘 정제설비도입이 필수적입니다.

우리 회사는 수출로 커온 기업이니 만큼 앞으로 짓게 될 석유정제시설도 수출용으로 만들어 절대로 국내 석유시장질서를 교란시키지 않겠습니다. 원유는 한국석유공사로부터 도입을 하여 외환반출을 억제하고 국내시장에 팔지 않아 현재의 석유판매질서를 흐트러 뜨리지 않으려 합니다.

여기서 정제한 석유는 전부 나일론 추출, 합성고무 생산을 위한 나프타 용으로 전환을 할 것이며 휘발유나 디젤이 나올 경우 사용여부를 상공부와 석유공사와 상의하여 결정토록 하겠습니다. 보다 많은 외화 획득을 할 수 있도록 부디 상공부와 재무부의 지도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자금조달 計劃(계획)

1. 국내 이자가 높기 때문에 낮은 이자를 적용받을 수 있는 해외은행에서 차입을 실현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기업의 대내외적 위상과 신인도를 제고하여 수출시장에서 더 많은 외화를 획득하고자 함이니 재무부의 각별한 배려 부탁드립니다.

제 1안 제 2안 제 3안방법 해외직접차입 해외채권발행 해외주식발행가능유무 가능 불가능 불가능

2. 해외직접차입은 가까운 일본에서 은행들을 통해 자금을 조달할 계획입니다. 이럴 경우 현재 무등그룹이 적용받는 이자 15%의 절반 수준인 7%중반에서 이자를 적용받을 수 있습니다. 재무부에서 인가만 해 주시면 성심성의껏 노력하겠습니다.

박기범 대리는 뒷장을 넘겼다. 각종 데이터들이 있었다. 각종 석유산업에 대한, 경제전망에 대한 데이터를 가지고 내용을 채워넣었다.

“다소 위험한 발언일 수 있지만 언젠가 정권이 바뀌고 민주주의가 이 땅에 실현되면 관료들의 힘도 약화될 것이 뻔합니다. 이렇게 되면 현재 이 추진중인 석유화학단지에서 휘발유를 추출하여 민간 자동차용으로 공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획실 분석으로는 내년 85년도에는 국내 자동차 보유대수가 백만대에 이를 것으로 추산됩니다.”

“그렇게나 많이? 이 좁은 땅에 자동차가 무려 백만 대라니.”

중공업본부장이 기겁을 하며 기획실 전 부장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자동차는 상당히 여유 있는 계층의 전유물이었기에 중공업본부장의 반응도 이해가 갔다.

“앞으로 소득이 늘어남에 따라 자동차 보유대수는 급증할 것입니다. 가령 미국만 해도 지난 83년 불황의 여파로 신규자동차 판매량이 930만대. 올 84년엔 1050만대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강당에 모인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공부 예측 결과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올해 84년도 예상 자동차 판매량은 24만대. 메이커들은 32만대 판매를 예측합니다. 이를 계산하면 24만대의 신차에 우리나라의 인구 4천만명이므로 자동차 신규판매 대비 전체 인구비는 0.6입니다. 이는 1000명중에 6명이 자동차를 구입했다는 것입니다.”

착실히 조사한 데이터를 뽐내기라도 하듯, 기획실 전 부장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서류의 내용을 모두에게 설명했다.

“반면 선진국들. 이웃 일본의 경우 일본의 인구는 1억 1900만. 84년도 신규자동차 판매량은 560만대. 비율은 4.7입니다. 인구 1000명 중에 47명이 차를 구매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동차 왕국이라 일컫는 미국의 경우 미국은 올해 84년에 1050만대의 신규차량. 인구는 2억 3천 5백만명. 따라서 이 비율은 4.46입니다. 1000명 중에 44.6명이 차를 구매했다는 것이지요.”

“어이구. 대단하구만. 일본이 최근 6~7년간 세계최대 자동차 생산국이 되더니 국민들도 그 풍요를 톡톡히 누리는구만. 경제발전이 국민모두를 행복하게 한다는 성장우선주의가 진리는 진리야.”

기획실 전 부장의 말에 황 이사가 답했다. 경공업본부장이 헛기침을 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잘 알겠어. 하지만 말이야. 저들 나라는 모두 1인당 생활수준이 만 달러가 훌쩍 넘는 부유한 나라란 말이지. 우리나라는 88 서울올림픽을 개최할 때가 되어서야 3천 달러란 말이야. 일본은 81년에 이미 만 달러를 돌파하고 지금은 1만 2천내지는 3천 달러란 말이지. 미국이 한 1만 5천 내치 6천 달러 하고. 그 점을 알아야 해. 단순하게 쳐도 우리는 저들의 4내지 5분의 1이야.”

“전 부장이 그 정도는 알겠죠. 본부장님. 어쨌거나 장기적으로 국내 석유수요도 크게 늘어날 거라는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인데.”

여기까지 말을 하고 나서 황 이사는 좌중에 있는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았다.

“내가 박기범 대리랑 같이 일본가서 돈을 어쨌든 끌어올테니 석유화학단지나 잘 지으라고. 휘발유를 팔던, 나프타를 팔던 난 그건 모르니까.”

당당한 태도로 말을 하자 경공업본부장은 빙그레 웃었다.

“돈을 왕창 빌려오라고. 그래서 우리 무등그룹이 만든 화학섬유가 전세계에 퍼져나가게 하려면 말이야.”

“좋아. 좋아.”

오 사장이 여기까지 말을 끊고 좌중을 정리했다.

“재무부와 상공부가 허가를 하기는 할까?”

오 사장이 의문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이 서류는 재무부 기업금융국과 은행국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이므로 송영찬을 만나면 뭔가 알려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서울대를 나왔으니 많은 친구들이 잘 되었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이렇게 빠른 승진을 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지워버리고 서류에 몰두했다. 왜냐하면 그런 문제는 굳이 그가 신경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 이 서류가 인가를 받게 되면 우리는 서류에 나온 대로 대략 600억 원 정도가 필요해. 이 돈은 전액 해외차입으로 할 것이고, 전남 목포에 건설예정인 제 2 섬유공장은 일본에서 최첨단 설비를 과감하게 도입하자고. 그래서 인건비가 지금보다 몇 배가 오르더라도 소화할 수 있도록 하잔 말이야. 섬유사업은 전통적으로 노동집약적이긴 해도 이걸 설비투자를 통해 인건비에 구애받지 않도록 바꾸어나가는 것도 해볼 만한 일이지.”

오 사장의 말은 말을 끝마치고 재차 말을 이어갔다.

“두가지가 모두 시행된다면 천억이 넘는 돈이 필요한데, 자체조달하고 어쩌고 해도 최소 500억은 빌려야 한다. 그러니까 내년. 85년 6월에는 일본지사를 설립해서 경영지원실의 황이사와 박기범 대리는 가야할 것 같아.”

그 말에 깜짝 놀란 박기범 대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본가는게 좋은건 아니야. 여기서 실패하면 다 잘라버릴거야. 그리고 황 이사는 어차피 할 일 없잖아. 나머지 직원들이 다 잘하고 중요한건 전부 최 전무가 도맡아 하니, 월급만 축내는데 이 기회에 일본이나 다녀와.”

그 말에 섭섭하다는 듯, 하지만 사장이 약간 농담을 섞었다는 것을 알기에 황 이사는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뭐 자금이란게 조달만 해오면 되지요. 언젠가는 남는 돈으로 재무투자를 해볼 심산입니다만 그 때까지는 여기저기 돈 꾸러 다녀야겠죠. 나중에 사채업자가 도쿄에서 서울까지 비행기타고 날아올까 걱정입니다. 하하하.”

그 말에 무거웠던 분위기의 사무실이 금방 웃음바다로 변했다. 박기범 대리도 피식 웃으면서 자신의 직속상관인 황 이사를 쳐다보았다.

“뭐야? 그럼 나중엔 야쿠자가 서울오는거야? 떼인 돈 받으러?”

경공업본부장의 말에 최 전무도 한마디 했다.

“일본가서 저렇게 사람을 웃기면, 아마 은행 직원이 웃다가 대출전표에다 도장 찍을거야. 그렇게 돈을 빌리면 되는거지”

최 전무가 말을 하자 황 이사가 다시 받았다.

“안 웃기면 소용없네요. 개그프로라도 봐서 좀 웃겨야겠어요.”

“자. 자. 장난 그만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국제적으로 활동영역을 높이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회사의 입장에서는 풍부한 자금을 조달해야만 해.”

오 사장은 비서가 가져다 준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내가 창업한 이 회사가 역사는 짧지만 급격히 성장을 했어. 이제는 수출업무 대신 대외직접투자와 신산업영역에의 진출로 성장해야해.”

이제 매출 5천억을 내다보는 기업으로 성장한 무등그룹의 최고경영자로서 오 사장은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경영자로서 기업을 키워나가고 막대한 부를 외국으로부터 끌어오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애국이라고 굳게 믿었던 그는 보다 큰 미래를 위해 해외자본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오 사장의 머릿속에는 해외자본의 도입은 단기적으로 외환관리법이나 정부의 자본통제방침에 어긋날 수는 있지만 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국제 자본과의 거래를 트고, 외국현지투자를 통해 전세계를 상대로 사업영역을 확대하고자 하는 구상이 그려져 있었다.

그가 장기적으로 추구하는 무등그룹의 모습은 전세계에 자회사를 갖춘 GM의 모습이 아니었다. 세계 각지에 지사를 설립하고 현지에서 사업을 하여 번 돈을 매일 국내로 송금하여 서울 본사에서 모든 자금을 통합적으로 관리하고, 세금과 공과금은 본사에서 전 세계 정부와 지급업체에게 일시적으로 지급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외국의 거대기업과 조인트벤처 식으로 자회사를 설립하여 위험을 줄이고 새로운 영역에 간접적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전략이었다.

1983년도의 통신과 기술의 수준으로는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최근 ‘타임’지나 ‘포브스’에서 보듯이 컴퓨터 시대가 도래한다면 가능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사전준비작업은 일본에서 돈을 차입해 국제적인 신용을 확보하는 것이다.

“일본 도쿄에 사무소나 출장소를 설립하고, 황 이사. 자네가 그래도 여기를 대표하니 가서 차도 괜찮은거 하나 사고. 집도 좀 괜찮은 걸로 장만해. 접대를 할 때도 좋잖아. 오피스텔도 좋고. 맨션도 좋고.”

오 사장은 커피를 다 들이켰다.

“기획실은 오늘부터 일본지사설립을 위한 법적, 물적 준비를 하도록 해. 이번 일본지사와 현지차입은 본격적으로 우리회사가 세계속에 뻗어나가는 계기가 될 것이야. 그래서 10년. 15년 뒤에는 세계적 대기업이 되도록 하자고.”

회의가 끝난 직후, 박기범은 회사 정문 앞에 있는 공중전화로 가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고 송영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박기범. 통화가능해?”

“무슨 일인데 그래?”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우리가 석유정제업에 진출을 해서. 너네가 우리 서류검토해 주니까 부탁 좀 하려고. 팔공이야 정권의 강력한 비호아래 막대한 돈을 벌지만 우리는 수출로 달러를 벌잖아.”

“알았다. 내가 서류 검토할 기회 있으면 할게.”

“주말에 보자. 더 자세히 말하자고.”

전화를 끊은 박기범 대리는 다시 회사로 올라갔다. 대리가 되니 일도 많아졌지만 오히려 여유는 조금 더 생긴 듯싶었다.

아마 큰일을 맡다 보니 시간은 단축되는 듯싶었다. 야근도 물론 잦았지만 신입사원 시절엔 손이 많이 가는 단순 업무였던 반면 밑에서 정리된 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일도 있는 관계로 시간이 나름 절약되는 것 같았다.

그 주 주말. 다시 만난 송영찬 재무부 서기관에게 박기범 대리가 말했다.

“잘 지냈어?”

“그럼. 또 보자고 한건 뭐야?”

반가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말투만 조금 차가웠다. 박기범 대리에게 뭔가 쌓인게 아니라 단지 일을 너무 많이 해서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뭐 별거 있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송영찬을 이끌고 근처 식당으로 데려간 박기범 대리는 적당히 봐서 석유산업관련 문건에 대해 말하리라 마음먹었다.

“난 다 알아. 딱 보니까 뭐 부탁하려고 온 게 눈에 보이는구먼.”

“훗. 그래?”

가볍게 대답한 그는 친구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가 이번에 석유산업에 뛰어들려고. 석유정제소를 만들려고 해. 그런데 서류가 통과될지를 몰라서.”

“그런 건 걱정 마.”

송영찬 사무관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시원스레 말했다.

“요즘 총선이 화두야. 그리고 정부로서도 경제성장과 뭔가 있어야 내년 2.11선거 때도 좋거든. 그래서 아마도 허가가 날거야.”

“그게 뭐야?”

박기범 대리가 말했다. 그는 식당으로 걸어가면서 송영찬 사무관을 쳐다보았다.

“이상하잖아. 총선이 화두인데 왜 우리 기업이 허가가 나는 거야?”

“집권여당인 민정당이 되려면 경제가 받쳐주어야 하거든. 그리고 시대가 또 서서히 바뀌고 있어. 8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한국경제도 본격적으로 국제화시대를 맞이하거든. 지금은 워낙 강경하게 정부가 막고 있지만, 얼마 안 있으면 본격적인 자본자유화의 시대가 열릴거야.”

“자본자유화?”

처음 듣는 단어라는 듯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박기범 대리에게는 한번에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본자유화. 그래. 맞아.”

“그렇게 되면 어찌 되는거야?”

박기범 대리가 되묻자 송영찬이 대답했다.

“말 그대로 자본자유화야. 즉 지금처럼 정부가 완벽히 통제하는 게 아니라 자유를 주는 거지. 즉 외국기업이 자유롭게 국내에 들어올 수 있게 문을 여는 거야. FDI라고 하지. Foreign Direct Investment라고 하는데 외국인 직접 투자라고 해.”

친절하게 설명은 했지만 전반적으로 그 개념이 잘 와 닿지 않았기에 박기범 대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점점 어렵구만.”

“그렇지?”

종업원이 가져다준 물을 한모금 마시면서 송영찬 사무관이 대답했다.

“하지만 어려운 게 아니야. 쉽게 생각하면 돼. 지금까지는 외국기업이 한국에 투자하고 싶어도 못하게 막아놓았지. 그리고 경제발전에 있어서도 외국으로부터 돈을 도입해서 공장을 짓거나 했지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공장 짓는걸 무조건 막았거든. 마산 등지에 수출자유무역지대를 제외하고는 말이야.”

“왜 그렇게 멍청하게 하지? 재무부는 똑똑한 친구들이 가는 곳인데 하는 건 멍청해. 멍청해도 너무 멍청해.”

송영찬이 재무부의 관료로 일한다는 걸 알면서도 특히 멍청하다는 단어에 유독 방점을 두면서 말을 했다.

“재무부가 멍청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것이고.”

물을 다시 들이키며 송영찬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물론 말의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기분이 나쁠 수 있지만 친한 친구이기에, 실제로 재무부의 횡포를 기업들이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크게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가 있어. 외국인 직접투자를 받으면 외국인이 돈을 가져와 투자하니 좋지만 자력으로 우리 기업들이 크진 못해. 그런 이유로 자국 기업보호를 위해 정부가 나서는 거지.”

“그래서 기업경쟁력이 급속히 둔화되지.”

자유시장경제의 옹호자인 만큼 추가적인 멘트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쨌든. 그 외국인직접투자가 단지 공장만 짓는걸 의미하지는 않아. 가령 국내 기업이 우수한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수출이 어려울 때, 외국기업과 손잡고 자본을 서로 출자하여 또 하나의 신설법인을 만들고 그 회사에서는 국내기업의 기술로 제품을 만들고 외국기업의 판매망으로 쉽게 수출을 할 수 있거든.”

“그래?”

그 말에 송영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외국기업이 자본을 투자해 국내기업의 지분을 사들여 경영에 관여한다든지, 외국은행으로부터 기업이 자유로이 채권을 발행하거나 돈을 빌린다거나 국내기업이 자본조달을 위해 외국의 증권시장에서 주식을 발행하거나 하는 모든 행위가 자본자유화지. 단순히 수출만 하는 게 자본자유화이전이라면, 단순 자본자유화라면 외국기업도 자유로이 국내에 투자하고, 외국기업과 손잡고 새로운 영역에 나가기도 하는 것 모두가 자본자유화야. 재무부는 이걸 막았지만.”

“그런데 이젠 그 문호를 연다는거지?”

박기범 대리의 말에 송영찬 사무관이 말했다.

“무엇보다 외국의 압력이야.”

짤막하게 대답한 송 사무관은 외국의 압력이 불쾌한지, 제대로 대응을 못하는 재무부의 역량이 불만족스러운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한국경제는 세계경제에 완전히 편입됐어. 한국이 만든 제품이 전세계로 수출된다고. 한국산 제품을 자유로이 사들이는 국가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지. 우리는 외국인들이 국내에 못들어오게 막는단 말이야. 외국인이 공장을 짓는 것도 막아.”

“그러면 안 되는데 말이야. 이 지구상에 그렇게 폐쇄적인 나라가 어디있어?”

다소 불만스러운 말투에 송 사무관은 눈썹만 씰룩거리고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쨌건 자본자유화가 되면 외국으로부터 얼마든지 자유로운 차입이 가능하지. 지금처럼 무식하게 외국인의 증권투자를 막거나 하진 않을 거니까.”

“그래. 시장에 맡겨야 하는거야. 시장에. 그러면 선거 때문에 통과가 가능하다는 거잖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식사를 하면서 둘은 딱딱한 사업관련 주제에서 벗어나 다른 주제로 화제를 돌리기 시작했다.

하이예크(프레드릭 하이예크 1899~1992. 오스트리아 출신의 독일 경제학자.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창시자)를 비롯해 밀턴 프리드먼과 같은 시카고 학파(자유시장경제를 주장하는 경제학파)나 케인즈주의자(정부통제를 중시하는 경제학파)나 궁극적인 목적은 경제를 발전시키고 경제주체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데 있는 것처럼 둘의 주장은 평행선을 달려도 하고자 하는 목적은 같았다.

하지만 역사는 자유로움 속에서 나오는 인간의 창의력과 욕구, 번영에 대한 갈망, 절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민주주의가 구현된 나라가 번영을 이룬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군국주의와 나치의 망령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고, 자유로운 시장경제 속에서 번영과 풍요를 이룬 서독과 일본.

이들 나라와 전세계에 민주주의를 전파한 민주주의의 병기창인 미국 모두 성공사례이다.

철저한 국가통제경제인 소련은 미국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가졌다고 하지만 국민들의 생활수준은 뉴욕 할렘가의 가난뱅이들만도 못한 처참한 수준이었다. 동구권이 다 그랬다. 예외는 없었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1984년으로 왔습니다. 이제 대리로 승진한 박기범 대리는 회사의 성장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도쿄로 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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