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수요일 아침. 신라호텔에서 하룻밤 머문 야마시카 통산국장은 재무부에서 보낸 현대 코티나에 몸을 실었다. 그 차를 타고 가면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차가 곧 재무부 중앙청사에 도착하자 차에서 내린 그는 상공부와 재무부 고위관료들이 모여있는 회의실로 걸어가서 회의실 안쪽에 비서가 안내해준 좌석에 앉았다.
“음.”
의자에 앉은 그는 곧바로 비서가 내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잠시 뒤에 회의실로 들어온 재무부와 상공부 관료들이 둥근 테이블 주위에 모두 앉았다. 야마시카 국장이 시계를 쳐다보니 시간은 벌써 8시 3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이제부터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회의를 주재하는 상공부 오연세 기업국장이 말을 했다. 곧바로 회의가 시작했고 재무부와 상공부 모두 서류를 넘기며 산업은행에게 줄 특혜융자건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먼저 상공부의 제의대로 대기업들에게도 융자를 하도록 하고, 특히 마산에 위치한 수출자유무역단지에 있는 중소기업들에게도 융자를 지원할 예정입니다.”
일본어로 작성된 서류를 쳐다보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시간 정도 지난 무렵, 어느덧 검토할 서류의 절반가량이 진행되었다. 이제 수출위주의 중견 그룹사들에 대한 특혜융자건이었다.
“이제 수출위주 중견그룹사입니다. 우리의 기준은 수출비중이 50%가 넘는 대기업들에게 주로 자금을 융자할 생각입니다. 여기에 배정된 금액은 대략 4천만 달러 수준으로 매년 800만 달러씩 5년에 걸쳐서 융자를 해줄 계획입니다.”
오연세 국장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 표에 보시다시피 우리는 팔공그룹과 남산그룹을 선정했고 이들 기업들에게 융자를 할당할 계획입니다. 이들 그룹사들은 모두 건실한 수출위주의 대기업으로 향후 우리나라의 고도 경제성장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회사들이라고 저희는 자체 판단했습니다. 저희측의 이 자료는 아주 정확한 수치로서 일본어로도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이 말에 재무부 은행국장도 웃음을 띄며 서류를 대충 넘겼다. 순간 야마시카 국장의 눈이 빛났다. 이들이 뭔가 일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야마시카 국장은 자신이 들고 있는 서류에 기재된 표를 응시했다.
팔공그룹 남산그룹
수출비중 51% 68%
매출액 3,400억 4,600억
순이익 187억 202억
자산 6,600억 7,252억부채 4,968억 4,140억자본 1,632억 3,112억
ROE 11.4% 6.5%
부채비율 304% 133%
합격여부 가능 가능
그는 옆자리에 앉아있는 다른 관료의 도표를 슬쩍 쳐다보았다. 한국어는 읽을 줄 몰라도 서류가 그대로 번역이 되어있다면 그룹사의 도표상 위치도 일치할 것이고, 모든 숫자도 같을거라고 생각했기에 한번 숫자를 대조하기로 하였다.
팔공그룹 남산그룹
수출비중 44% 68%
매출액 3,400억 4,600억
순이익 187억 202억
자산 6,600억 7,252억
부채 4,968억 4,140억
자본 1,632억 3,112억
ROE 11.4% 6.5%
부채비율 304% 133%
합격여부 가능 가능
힐끗 쳐다보면서 숫자를 하나하나 대조해나가면서 야마시카 국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납득이 가지 않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조금 시간이 경과하자 오연세 국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상들 없으신가요?”
몇몇 관료들이 서류를 넘기면서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야마시카 국장은 잠깐만 이라고 말을 한 후, 한 손을 높이 들었다.
“이거 좀 이상한데. 누가 설명을 좀 해봐요.”
계속 침묵을 지키면서 서류를 쳐다보기만 했던 야마시카 국장의 태도에 오연세 상공부 기업국장, 최천식 재무부 은행국장도 모두 놀란 표정으로 통산국장을 응시했다.
“자료가 엉망이구만.”
통산국장은 옆자리에 앉아있는 관료의 서류를 빼들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서류 옆에 나란히 놓고는 팔공그룹의 수출비중에 관한 데이터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욘쥬 욘 파센토. 고주 이치 파센토.(44%, 51%)”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관료들이 서로를 응시했다.
“한국측 자료에는 팔공그룹의 수출비중이 44%, 내 자료에는 51%. 어떻게 된 겁니까? 왜 숫자가 하나도 맞지 않는거죠? 번역본이라고 해도 숫자는 같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본어 번역본이라고 일본 통관기준에 맞춘 건 아닐 거 아뇨. 동일한 기준일 테니. 그런데 왜 숫자가 다르지?”
그 말에 아무도 해명을 할 수 없었다. 애초부터 조작된 숫자였기 때문이다. 모두가 말을 하지 않자 야마시카 국장은 이제 좀 ‘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야마시카 통산국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테이블 중앙에 놓인 검은색 다이얼 전화기를 들고 어디론가 다이얼을 돌렸다. 이 상황에 깜짝 놀란 재무부와 상공부 관료들은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 줄 몰랐다.
“조토마테 구다사이요.(잠깐만 기다려요)”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오연세 국장이 말을 했지만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다이얼을 계속 돌렸다.
“어. 츠산쇼(통산성). 나 야마시카 통산국장이다. 지금 여기 한국 재무부 회의실에 있는데, 경협자금 당장 재고를 해야겠어. 이거야 원. 자금분배가 너무 불투명하잖아. 숫자도 하나도 안맞고. 뭐 경협자금배분을 애들 장난으로 알아. 이래가지고 어떻게 자금을 배분하며, 미국과의 대화채널에서도 뭐라고 둘러대지?”
야마시카의 입에서 ‘미국’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오연세 국장은 침을 삼켰다. 목이 탄다는 듯 테이블에 놓인 주전자에서 물을 컵에 따라 들이켰다. 오연세 국장은 최천식 은행국장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심상치 않아요. 지금 미국을 운운하는 모양이던데. 아마 통산성의 옵서버 요청 뒤에는 미국이 버티고 있나봅니다.”
그 말에 화들짝 놀란 최 국장은 놀란 표정으로 오 국장을 쳐다보았다.
“미국이 이 요청을 했다는 말입니까?”
고개를 끄덕인 오 국장은 야마시카 국장이 전화를 끊자마자 양해를 구하고 옆에 앉아있는 최 국장의 팔을 낚아채고 회의실 바깥으로 나갔다.
“들어보세요. 아메리카라고 했잖아요. 미국을 지칭하는 거요. 결국 통산성이 이 옵서버로 참가한 뒤 결과보고를 총리실에도 하지만 미국에도 하는 모양입니다. 만일 여기서 우리가 삐끗하다가는 미국이 움직일 겁니다. 만에 하나 미 대사관이나 미 재무부가 움직이기라도 한다면, 여기 이 통산국장에게 밉보였다가 만일 미국에 보고하기라도 한다면. 결국 중요한건 통산국장이 어떻게 판단하는지의 여부 인데.”
오 국장이 말끝을 흐리며 얼버무리자 최 국장이 대답했다.
“그랬다간 정말 큰일이군요. 가뜩이나 외환 유동성 문제로 산업은행이 이번에 미국에 가서 30억 달러 정도의 차입을 할 계획인데, 산업은행의 융자를 미국 측이 거절한다면 외화부족문제의 해결이 요원해질 겁니다. 게다가 미국의 개입은 정말로... 후.”
한숨을 쉰 최천식 은행국장은 바지주머니에 넣은 손을 꺼내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우리나라의 대외신인도문제도 있겠어요. 만에 하나 미국이 개입한다면 미국은 여기보다 더 꼼꼼하게 간여할텐데요. 모든 서류를 미국으로 보내서 검토하기라도 하면.”
이 말에 오연세 국장이 말했다.
“그렇다면 일단 통산국장이 말하는 걸 들어보고 정 안된다면 팔공그룹을 빼야죠.”
“그럼 그 자리에 무등그룹을?”
최 국장이 심각한 듯 말했다.
“그건 솔직히 좀 너무하잖소.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치를 해야죠. 안된다면 정말 할 수 없겠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담담하게 말을 하고 그 둘은 다시 회의실로 들어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멋쩍은 듯이 말을 하고 도로 자기자리에 들어와 앉은 오연세 국장이 유창한 일본어로 입을 열었다.
“야마시카 국장님. 저희가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숫자는 아마 일본어 번역본이 잘못 기재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다 저희 불찰입니다.”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오연세 국장이 계속 말을 했다.
“그렇다면 국장님. 잘못은 수정을 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따라서 저희가 잘못되었다면 당장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44%밖에 되지 않는 이 팔공그룹을 빼고 다른 기업을 찾도록 하세요.”
“그 기업은 무등그룹밖에 없습니다. 다만 수출비중은 70%대로 해당사항이 되지만 회사 자체가 불안해서.”
“뭐가 불안하다는 것이죠?”
서류를 탁 내려놓으며 야마시카 국장이 쏘아붙였다.
“수출비중이 너무 높아서. 거의 80%대에 육박합니다. 77%수출비중은 너무 위험한데요?”
“그럼 68%는 괜찮고?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에서 겨우 그 정도가 뭐가 위험하다는 거요? 그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정부가 융자를 해주는 것 아니요? 그래서 산업은행을 통해 특혜를 주려는 거니까.”
오연세 국장은 과장급 직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팔공그룹을 빼고 그 자리에 무등그룹을 넣어. 후. 어쩔 수 없구만.”
그리고 바로 통산국장에게 말했다.
“국장님. 일단 팔공그룹을 빼고 그 자리에 무등그룹을 넣는 걸로 수정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야마시카 국장은 재확인했다.
“틀림없는 거지요? 이건 정확해야 합니다.”
야마시카 국장은 말을 마치자마자 가방에서 서류를 하나 꺼냈다. 어제 대사관에서 받아온 위임장이었다. 그가 서류를 테이블에 던지자 모두들 그 종이에 시선이 쏠렸다. 통산대신의 결재싸인이 선명히 적혀있는 위임장이었다.
‘통산성이 인가한 것이라면 이미 총리도 알게 될 것이고. 미국도 자연히 알고 있겠군.’
최천식 국장도 이 위임장을 보고 얼어붙었다. 자리에 앉은 야마시카 국장은 자기가 읽어야 할 서류를 뒤로 넘겼다. 다시 회의가 진행되었다.
============================ 작품 후기 ============================
1983년. 당시 전두환 정권은 일본에게 40억 달러의 경협(경제협력)기금을 받아냅니다. 북한같은 공산국가를 남한이 막아주니 돈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나라가 가난했기에 이렇게 이웃나라 갈취하면서 살았습니다.
이 당시 이 돈의 배분을 둘러싸고 잡음이 많아서 실제로는 고위공무원에게 뇌물을 주면 자금을 받아내고는 했답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던 시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