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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시대-14화 (14/159)

14화

좁은 차체의 포니 2 안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장준성은 지겨움을 느꼈다. 무게가 고작 940kg밖에 되지 않는 가벼운 차체에 길이도 고작 4미터가 되지 않는 작은 크기의 안에서 오랫동안 있는 건 고역이었다.

반면, 같이 온 오 차장에게 배정된 차는 박 전무가 타고 다니는 도요타 크라운이었다. 전무의 차를 잠시 빌렸는데, 대당 가격이 천만 원이 넘는 고급차에 걸맞게 차체도 크고 넓었다. 1500mm밖에 되지 않는 너비의 포니에 비하면 무려 300mm이상 더 넓었으니까.

하지만 오 차장 역시 지루한 고역 속에 있는 듯 싶었다. 그래서 차장너머로 담배를 든 손이 보이고는 했다.

이미 조수석 문아래 길바닥에는 여러 개비의 담배꽁초가 버려져 있었다. 잠시 피곤한 듯 차 밖으로 나가 기지개를 켠 장준성은 차 안에 있던 홍보실 직원의 부름에 급히 차에 올라탔다.

“저기. 누가 나오는데? 그라나다가 접근하고 있어.”

“그럼 찍으세요. 어서요.”

커다란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라나다에 올라타기 위해 무등그룹 정문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두 명의 홍보실 직원들이 찍었다.

이윽고 그라나다가 출발하자 앞에 위치한 81년식 도요타 크라운에서 오 차장이 내리더니 장준성에게 지시했다.

“장 계장. 회사로 가서 사진 죄다 현상하고 전무님께 보고해. 난 저 그라나다를 따라갈 테니까.”

팔공그룹이 수입판매를 담당하는 이 크라운이 급히 사라지자 장준성이가 탄 포니2도 회사방면으로 움직였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급히 필름을 현상한 홍보실 직원은 현상된 사진을 장준성에게 주었고 그는 바로 보고했다.

“음. 야마시카 야스지로 통산국장이구만.”

“아시는군요.”

팔공그룹 자금부장이 박 전무에게 말했다.

“그래. 맞아. 이 친구 사촌 동생이 대장성 은행국에 근무를 해. 내가 좀 알아. 전형적인 관료집안이지. 원래 대장성과 통산성이 충돌하는 측면이 꽤 있어. 하지만 이런 가족관계 때문에 두 부처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막후 실력자이기도 하지.”

“그렇군요.”

자금부장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무는 팔짱을 끼고 테이블 위에 펼쳐진 컬러 사진을 가만히 응시했다.

“국장급들이 막후 실력자라는게 좀 웃기네요.”

자금부장이 말을 던지자 박 전무는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를 한다는 듯이 중얼거리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일본에서는 장관을 대신이라고 하지. 큰 대에 신하 신자를 써서. 그들은 다 정치인이야. 실무를 모르지. 실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과장급과 국장급들이야. 그 국장급들 중에서 차관이 발탁돼. 비록 서열상으로는 장관. 그러니까 대신 밑에 있지만 모든 정보를 쥔 게 차관이거든. 차기 차관 승진 대상자들인데 그 파워라는게 무시 못 해.”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은 무등그룹과 야마시카 통산국장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굳이 만날 이유도 없는데, 그 점이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옵서버 자격이라.”

박 전무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정말 이상해. 이유가 없잖아. 뭔가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이 때 장준성이 말을 했다.

“전무님. 끼어들어 죄송하지만 경협차관을 위해 접촉했다면 그게 이유고 목적일 수 있습니다. 저들 입장에서는 어차피 경협자금지원에서 배제가 되었기 때문에 안되면 어차피 못받는 것이고 잘되면 돈을 받는 거라서 리스크에 대한 인식이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차피 콜옵션 적인 성격이라 이건가? 안되면 원금손실. 그건 이미 각오가 되어있고 잘되면 잭팟.”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잘못되어도 손실가능성이 없는 콜옵션인 셈이죠. 구매자에게 아주 유리한.”

자금부장이 박 전무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박 전무는 일본 와세다 대학교에서 공부를 했던 터라 일본사정에 아주 훤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의 기술을 도입하여 생산한 완제품을 미국에 수출하는 방식으로 급속한 고도성장을 이어온 한국의 입장에서 일본의 존재는 아주 중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각 재계 인사들과도 어느 정도 안면이 있고 고위관료들과도 인연이 있는 그가 전무가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박 전무는 지난 75년 일본으로부터 선풍기 모터 수입권을 따내어 국내선풍기 시장을 장악했고, 부유층을 위한 호화가구등의 사치품을 들려와 76년엔 4억 원을 넘게 번적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72년 주은래 4원칙에 의거 도요타가 신진자동차와의 관계를 끊고 한국시장에서 철수한 이후, 여전히 인기가 높았던 도요타 크라운과 닛산 세드릭/글로리아와 같은 일제(日製)고급자동차를 일본에서 그대로 들여와 대당 4백만 원이 넘는 고가에 팔기도 했었다.

수출위주인 무등 그룹과 달리 내수시장위주의 사업을 전개한 이 팔공그룹은, 국내 부유층을 위한 호화사치품판매, 수입품 라이센스 획득 등으로 손쉽게 막대한 돈을 벌었다.

76년에 이르러서야 전국에 산재한 소규모 방직공장 및 경영난에 봉착한 섬유회사들을 닥치는 대로 사들여 미국시장에 덤핑으로 섬유를 판매해 수출비중을 0%에서 44%로 끌어올리기는 했다.

이 44%의 수출비중은 섬유수출과 싸구려 노트, 인조가죽 지갑 등 노동집약적인 제품덕이었고 이 분야의 수출비중은 33%였다. 나머지 11%는 국내에서 팔렸던 자동차를 중고차로 사들여 중국이나 남미에 되파는 수법, 일본으로부터 산업폐기물을 들여오고 그 대신 돈을 받고, 폐기물을 담았던 컨테이너나 강철 드럼통을 고철수출로 위장하는 등의 수법으로, 수출비중을 끌어올려 맞춘 것이었다.

여하튼 이런 방법으로 한몫 단단히 챙긴 기업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지난 81년도에는 불량 중고차를 베네주엘라에 선적했다가 통관거부를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었다.

이때의 불량 중고차는 국내에서도 더 이상 탈 수 없을 정도로 낡은 차들로 68년 신진자동차가 일본의 도요타랑 손을 잡고 CKD로 생산한 퍼블리카(Publica)나 코로나(Corona)였는데 심각하게 차체가 부식되었거나 심지어 폐차장에서도 가져온 것들도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82년엔 국내 중고 포니와 코티나 500대를 선적하다가 현대자동차로부터 항의를 받고 선적을 중단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국내 중고차 딜러들과 끈끈한 유대를 가지고 정부의 지원을 힘에 없었기에 결국 베네수엘라로 선적을 하는데 성공했다. 여기에 박 전무의 공이 상당했었다.

“그렇다면 신라호텔에 머물러 있다는 거잖아.”

“그렇습니다. 야마사키 국장은 신라호텔에 있는 게 확인되었습니다만 어느 방에 머무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박 전무의 대답에 장준성이 대답했다.

“좋아.”

전무가 장준성을 쳐다보았다.

“지금 당장 출발하자고. 차 준비시키고 그에게 줄 선물을 뭐라도 가져가야겠다. 뭐를 준비해야 좋을까?”

그는 넥타이를 고쳐 매면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가장 좋은 선물을 돈이 아닐까요?”

“그렇긴 하지만 너무 단순해. 모양새도 좋지 않아. 게다가 그의 옵서버 자격 참여가 반드시 무등그룹만을 위한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현재로서는 없단 말이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 안으로 들어가면서 잠시 멈추었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즉. 수출기업인 무등그룹이 단지 시장확대를 꾀하기 위해 야마시카를 접촉했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우연히 통산국장의 내한과 맞아떨어진 것일 수 있지. 공연히 우리가 그 페이스에 놀아나게 될 수도 있어. 그랬다간 더 우스운 꼴이 아닌가? 우리는 그저 통산국장한테 가서 적당히 인사를 하는 정도로 해야지, 지나치면 의심을 받는다고.”

박 전무는 그렇게 말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주차장으로 향했다. 위압적인 디자인의 도요타 크라운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가 작년 말, 일본의 한 주방용품회사로부터 스테인리스 냄비를 수입하기 위해 도쿄를 방문했을 당시 그가 타던 도요타 크라운 자동차를 탔던 기억이 났다.

그 차는 일본의 자동차 회사인 도요타가 만든 고급차종인 크라운으로 1955년 등장이래, 줄곳 일본시장에서 고급차의 지위를 누렸다. 그가 타던 82년형 모델은 6세대 크라운으로 크기도 길이가 4860mm, 너비는 1715mm로 크고 널찍했다.

이 차는 팔공그룹이 직접 수입하여 판매하는 차로 핸들의 위치를 바꾸어야 한다는 점 때문에 비쌌지만 크라운을 선호하는 국내 부유층 덕분에 꾸준하게 잘 나갔다.

직렬 6기통 2800cc엔진과 2400cc, 2000cc엔진으로 되어있지만 국내에서 팔 때는 2400cc만 들여왔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에 있을 때 탔던 2.8L급보다 힘이 약간 부족하다고 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무님. 정말 빈손으로 가도 괜찮을까요?”

“아예 빈손으로 가는 건 안되고, 적당히 선물은 사야지. 돈을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우리나라 관료들이라면 돈 백만 원으로도 매수가 가능한데 말이야.”

장준성이 앞좌석에 타자마자 차가 출발했다. 차 안에서 박 전무가 입을 열었다.

“그 정치자금은 어떻게 됐어? 민정당에게 잘 들어가고 있는 거지? 심장재단이니 새마을장학회니 그런 문제는 자네가 가끔은 직접 사장님께 보고도 하라고.”

귀찮다는 듯 그가 말했다. 이윽고 차가 신라호텔에 도착하자 차에서 내린 박 전무는 장준성에게 말했다.

“그 야마시카가 몇호실에 머물고 있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장준성이 데스크에 있는 직원에게 묻자 그 직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그건 저희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호텔 방침입니다.”

10여분 동안 반복하면서 물었지만 여전히 알려주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박 전무는 별로 가망이 없다는 듯한 눈치였다.

“소용이 있겠어? 더 확실한 방법이 있지.”

그는 공중전화로 가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몇 초 정도 통화가 이어지고 난 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로비에 있는 장준성과 자금부장에게 다가왔다.

“서울시경에 내 친구가 하나 있지. 그럼 쉽게 알 수 있을거야.”

“죄송합니다.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호텔 정책이라고 워낙 강하게 말을 해서 결국 실패했습니다.”

장준성이 고개 숙여 말하자 박 전무가 호탕하게 웃었다.

“뭐 별것도 아닌걸 가지고. 일단 조금만 기다려. 10분 내로 해결책이 곧 올거야.”

그의 말대로 10분 정도 지나자 경찰차 한 대가 내리더니 경찰 고위간부로 보이는 한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반가워. 이번에 치안감인가?”

“자네 공이 크지. 이제 서울시경도 내 손안에 있다고.”

악수를 나눈 뒤 그 경찰간부는 호텔 데스크로 가서 그의 배지를 보여주었다.

“야마시카라고 일본인이 머문다고 하는데 몇 호실인가?”

“네. 1217호실입니다. 그런데 그 손님이 왜?”

“국가가 관여하는 일이니 더 이상 묻지 마시오.”

차갑게 쏘아붙이고는 그 간부는 박 전무에게 말했다.

“됐어. 들어가도 좋아. 1217호라는군. 왜 만나려는지는 몰라도 잘해보게.”

“고마워. 내 이 사례는 두둑히 하지.”

박 전무가 미소를 띈 얼굴로 화답하자 그 간부가 말했다.

“지난번에 떡값 받은게 있는데 뭘.”

야마시카 국장의 호텔방을 확인한 박 전무 일행은 1217호로 가서 호텔 방문을 두드렸다. 마침 야마시카 국장은 위스키를 한잔 하면서 창밖을 내다보며 서울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6년 전인 1977년에 여행차 여길 왔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있었다. 77년 수출 1백억 달러 돌파를 기념하는 플래카드와 현수막이 곳곳에 걸렸던 모습은 그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서울이 태어났을 때와도 전혀 다른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노크소리에 잠시 취해있던 생각속에서 깨어났다.

“대체 이 시간에 누구지?”

잔을 내려놓으며 문으로 다가가 출입문을 열었다. 정장차림의 남자 세 명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팔공그룹에서 나왔습니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박전무가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자 박 전무가 다시 말을 하여 기선을 잡았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들어오세요.”

야마시카 국장이 문을 더 열면서 모두들 들어오라고 지시했다. 호텔 방 한켠에 놓인 손님접대용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자 박 전무 역시 자리에 앉았다. 소파는 겨우 2개 밖에 없어서 부장과 장준성은 모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는 팔공그룹의 박상기 전무라고 합니다. 와세다 대학교 출신입니다. 하하하.”

“그런데 무슨 일로 오신거요?”

“다름이 아니라 경협자금건때문이죠. 옵서버로 참여하신다고 해서요. 그거 관련해서 물어보려고요.”

야마시카 국장은 팔공그룹이라는 말 때문에 다소 신경이 거슬렸다. 그렇잖아도 팔공그룹이 무등그룹의 라이벌이며 정부와 관청을 등에 없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는 사실을 황 부장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옵서버는 말 그대로 옵서버요. 뭐 내가 무슨 권한이 있겠소. 다만 한국측이 한점의 의혹도 없이 잘 처리하는지 볼 권리는 있는거지까 그거지 뭐 별 다른건 없습니다. 보아하니 당신네들도 경협자금으로 뭔가 한몫을 해보겠다는 건데, 그런 생각은 버리시오.”

“정말이십니까?”

“그렇소. 왜 그러시오? 난 평범한 관료요. 한국의 관료처럼 막강한 힘이 없습니다. 일본경제는 60년대 중반의 자본자유화 이후 민간주도로 변했어요. 예전처럼 엄격한 자본통제도 없고 국가주도의 시스템은 없습니다. 민간기업이 경제활동을 하고 우리는 민간기업의 활동에 장애가 되는 산업법안이 국가와 국민, 기업 모두에게 좋은지 검토하고 여론을 경청할 따름입니다.”

“믿을 수 없군요. 대단한 통산관료께서. 미국에서도 Mighty MITI라고 하지 않습니까?”

박 전무는 야마사키 국장이 한 말의 의도를 간파해내기라도 한 듯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이미 박 전무는 통산관료가 지나치게 자신을 낮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과연 얼마나 잘 빠져나가나 한번 보자’

이런 생각을 가지고 박 전무는 야마시카 통산국장의 눈을 쳐다보았다. 몹시 피로한 듯 두 눈을 손바닥으로 잠시 가린 야마시카는 눈을 꿈뻑거리며 박 전무를 쳐다보았다.

그는 이 회사와 별로 접촉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통산관료였지만 자유주의의 신봉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나 비민주적인 것을 몹시 싫어했다.

1945년 8월 23일.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 1983년 현재까지 전후 고도경제성장을 훌륭하게 이끌어 그가 25살때이던 1960년. 세계 5위의 경제대국이었던 일본이 이제 세계2위의 경제대국으로 도약하는 모습을 지켜봐오면서, 이렇게 일본이 풍요로운 사회가 된 이유는, 바로 미국의 영향으로 자유주의 사상과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관료로서 일국의 산업발전을 이끌어왔을지라도 국민 위에서 권위적으로 군림하는 통산성이 아니라는 생각을 늘 견지했다. 국민들에게 값싼 자동차, 에어컨, 냉장고 등 국민들의 실질적인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노력해왔던 중공업 국에서 근무하면서 국민을 위하는 마음으로 일을 해온 터라 권력과 유착관계를 맺는 기업들에 대해서 늘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다. 이는 팔공그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옵서버는 말 그래도 옵서버고. 난 지금 몹시 피곤하니 제발 그만 돌아가 주세요. 어서 돌아가 주세요. 부탁합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호텔 방문을 열었다. 이 모습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었기에 박 전무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바깥으로 나갔다. 다소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호텔 방문을 나서 투덜대면서 로비로 내려왔다.

“망할 놈. 에이. 그래도 자기가 피곤하다는데. 그리고 자기가 돌아가달라고 부탁하는데 어쩌겠어?”

화가 난 박 전무는 신경질을 내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러자 자금부장이 재빠르게 불을 붙여주었다. 담배연기를 한모금 들이마시고 나서 연기를 내뿜자 화가 다소 누그러졌는지 아까보다는 덜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 참. 선물을 싸들고 갔어야 했나? 그래서 그런거 아닐까?”

“에이. 설마요. 고작 그런 것 때문은 아니겠죠.”

자금부장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물론 그 역시 걱정된 표정이었으나 전무에게 다 내비칠 수는 없다고 판단해서인지 애써 평정심을 찾은 얼굴이었다. 야마시카 국장은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아이고. 거 이렇게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위임장을 받긴 했지만 내가 무슨 권한이 있어야지. 일개 국장인데.”

============================ 작품 후기 ============================

[용어설명]

MITI : Ministry of International Trade and Industry의 약자로 통상산업부. 즉 통산성의 영어명임. 1950년대 이후 일본의 고도성장을 이끈 원동력이 통산성이라 해석한 미국인들이 Mighty MITI라고 불렀음. 현재는 Ministry of Economy, Trade, Industry로 경제산업성으로 불림. 한때 통산성이 주도한 산업이 일본경제를 부흥시켰다고 하나 실패한게 더 많음. 반도체, 가전등은 통산성이 정책적으로 밀었지만 우리에게 처참하게 패배함.

포니 : 현대자동차가 1975년 탄생시킨 독자모델로 일본 미쓰비시의 엔진을 들여오고, 이태리의 쥬지아로에게 디자인을 의뢰해 만든 소형차.

크라운 : 일본의 도요타가 만든 고급차로 국내에도 고급차의 대명사로 불렸음. 신진자동차가 들여와 판매함. 신진은 72년 도요타와 관계가 끊어지고 난 이후 GM과 손잡고 75년 GMK(GM Korea)로 사명을 바꾸고 재기를 꾀하지만 78년 산업은행 관리를 받는 처지가 되고 83년 대우그룹산하로 편입되어 대우자동차로 변경됨.

주은래 4원칙 : 1972년. 중국의 주은래가 말한 것으로 당시 적대관계에 있던 대만과 친하거나 교역을 하는 국가는 중국에 투자를 할 수 없다고 천명함. 대만을 고립시키기 위함. 도요타는 중국시장을 노리고 당시 대만과 외교관계를 가진 한국에서 철수함. 개인적으로 도요타의 최대실수. 현대차를 막을 유일한 기회였음.

CKD : Complete Knock Down방식으로 조립생산을 의미. 부품을 가져와서 완제품으로 조립만 하는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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