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무등그룹 본사. 그라나다를 타고 회사로 온 야마시카 국장은 사장전용 부속회의실에서 배달 온 고급식사를 차려놓고 어제 마저 못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제 말한 명분 문제인데, 어떻게 좋은 수가?”
오남현 사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퇴임 후 철강회사나 중공업관련 대기업의 낙하산으로 가기를 원했던 야마시카와 달리 이 회사는 학교로 가라고 권하는 것이다. 정치자금을 합법적으로 그리고 명분 있게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어제 껄끄럽다고 말을 한건 일개 통산 국장이 무슨 권한으로 옵서버 자격을 논할 것인가와 내 거처문제긴 한데, 일단은 옵서버로 참가를 하면 어떻겠느냐는 의사를 한국의 상공부에 타진을 했으니 아직은 월권문제가 없습니다. 생각해보니까. 그리고 다음은 정치자금문제인데, 좋은 수가 없겠소?”
이 말을 하면서 자신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한 박기범 계장을 쳐다보았다.
“국장님. 혹시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기업중에 통산성과 관계된 곳이 있나요?”
다소 엉뚱한 소리에 모두가 그를 쳐다보았다.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교포의 숫자가 대략 70만으로 알고 있어요. 그들 중 대다수는 과거 식민지 시절, 강제징용등으로 끌려간 사람들이죠. 그 분들 중에서도 일본에서 기업을 일구어낸 분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들은 민족학교를 건립하기도 하고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교포에 대해 후원사업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맞는 말이요. 그래서.”
“그래서 통산성과 관계된 기업중 재일교포가 운영하고 동시에 민족학교에 지원을 해주는 기업을 찾으면 그 기업의 임원으로 낙하산으로 가실 수 있고 저희는 민족학교를 지원한다는 명분아래 돈을 댈 수 있습니다.”
“잠깐. 하지만 재일교포들의 상당수는 조총련계야. 북한하고 연관이 되어있어.”
황 부장이 말렸다. 그는 이 말을 일본어로 번역해서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렇다면 조총련과 연관이 없는 학교에 지원을 하면 되죠. 설령 조총련이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몰랐다.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사람들이 한국어를 잊지 않고 우리 문화를 지키려고 세운 학교여서 동포애적인 마음에서 기부를 했다고 하면 되는 거죠.”
잠시 대화를 경청한 야마시카 국장은 입을 열었다.
“어차피 당신들에게는 피해가 없어. 왜냐면 통산국장이 후원을 한다면, 그리고 일본에서 기업을 운영한다면 당연히 공산주의하고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지. 공산주의사상을 가지고서 어떻게 사업을 하겠어요. 그리고 그런 기업이 하나 있소.”
야마시카 국장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미나토 특수강이라는 회사인데, 재일교포가 설립했지. 특수강 제조 회사인데 지난 69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할 때, 수천도의 열과 마이너스 수백도의 냉기에도 견디는 특수금속을 개발해 나사에 납품을 했거든. 아마도 그 회사가 없었다면 나사는 달에 착륙하지 못했을 거요. 통산성이 지원을 했는데, 거기 그 사장 이름이…….아무튼 그 사장이 재일교포요. 거기도 아마 내가 어떻게 힘을 쓸 수 있을 듯 하군.”
“그리고 국장님. 미국을 핑계로 어떻게든 상공부를 움직이시는 게 어떨까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미국을 핑계삼다니.”
이번에는 최 전무가 말했다. 야마시카 국장도 그 말을 하고 싶었던 참이었다.
“신문을 보니까 이번 경협의 이면에는 미국의 레이건이 주도하는 큰 게임의 부분이라고 해서요.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을 무너뜨리는 데는 자유세계의 경제발전과 상호협력이 중요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유세계의 결속을 위해서 경제발전이 뒤처지는 우리에게 일본이 경협자금으로 원조를 하는 셈이라면, 그 자금이 그 목적에 맞게 제대로 흘러 들어가는지 살펴야죠. 만에 하나 금액이 정치논리나 특정기업에게 특혜성으로 주어진다면 목적에 맞게 자금이 사용되지 못한 것이고, 이는 결국 미국의 세계전략에도 차질이 빚어지게 되는 거라고 보거든요.”
이 말에 야마시카 국장은 감탄을 했다.
“오호라. 그러니까 자네 말은 아시아의 맹주인 우리 일본이 돈을 대는 만큼 자금배분의 투명성과 공정성에 신경을 써라. 이건가?”
아시아의 맹주라는 말이 정말 귀에 거슬렸지만 그런 말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그가 할 말만 했다.
“물론입니다. 거기에 더해, 그런 제스처만 취해주신다고 해도 통산성으로서는 미국과의 협상에 있어서 유용한 카드가 하나 생기는게 아닐까요? 지금 미국과 일본간의 통상마찰이 격화된다고 들었습니다. 이 때, 이런 제스처로 미국에게 말하는 거죠. 우리는 자유세계의 번영을 위해 통산성이 노력했다. 미국의 세계전략에 충실히 부응하고 있다. 뭐 이런 식으로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간 황 부장과 최 전무는 빙그레 웃었다. 야마시카 통산국장 역시 박기범의 말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렇지. 결국 이 모든 것도 정치논리인데다, 나카소네 총리대신으로서도 미국과의 정상회담시에 내밀 카드가 있어야겠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야마시카 국장에게 박기범 계장이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만일 옵서버를 한다는 것을 일본정부에 공식으로 요청한다면, 통산성을 무역마찰을 핑계삼아 괴롭히는 미 상공부와 재무부의 입을 막을 수도 있을 겁니다. 왜냐면 통산성의 이 조치를 가장 환영할 미 정부기관은 국방부가 될 테니까요.”
두 손을 깍지낀 채 모은 야마시카 국장은 이제야 충분히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기 이거.”
황 부장은 서류를 꺼내 야마시카 국장 앞에 놓았다.
“이게 뭐지?”
“현재 재무부에서 검토하고 있는 자료야. 빨간 형광펜으로 칠한 부분이 우리 회사고, 그 옆에 있는건 팔공그룹, 남산그룹 순이야. 팔공그룹은 우리의 최대 라이벌인데, 여긴 정치가와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회사지. 우리는 그에 비하면 외면받고.”
황 부장이 대답하자 그 서류를 들고 내용을 검토하면서 야마시카 통산국장이 말했다.
“나도 신문봤어. 3년전 여기 이 나라 정부가 공수부대를 투입해 민간인을 대학살한 광주사태.”
그는 시선을 돌려 황부장과 최 전무, 오 사장을 번갈아가면서 쳐다보았다.
“이런 부도덕하고 정통성 없는 정권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건 좋은 건데. 어쨌든 이런 정권에게 귀여움을 받는 회사는 너무 기분 나빠. 본때를 보여줘야겠어.”
그는 테이블 한켠에 위치한 전화를 들고 어디론가 다이얼을 돌렸다. 잠시 다이얼을 돌리고 나서 전화가 연결이 되었는지 그가 소리쳤다.
“아. 나 통산국장 야마시카다. 한국에게 원조할 40억 달러 관련해서, 한국에서 특혜융자니 뭐 이런 시비가 일더군. 그래서 내가 옵서버로 참가하면, 물론 직접적인 권한은 없지만 뭐라고 내세울 건덕지는 있을 것 같아서. 혹시 알아? 미국과의 통상마찰에 있어서도 국방부를 움직일 수 있을지. 쓸 수 있는 카드는 다 쓰는 거야. 응. 응. 저기 나카소네 총리대신에게 위임장 좀 받아줘요. 아니면 통산대신 선에서라도. 고마워.”
전화를 끊고 난 후 다시 전화를 또 걸었다.
“대장성 금융과장 바꿔. 나 통산국장 야마시카요.”
10초 정도 의 침묵이 이어지고 나자 야마시카는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나 통산국장 야마시카인데, 우리 통산성이 이번 한일경협관련해서 옵서버 자격으로 그 분배과정에 대해 참관을 하면 어떨까하고. 아무래도 대장성이 가면 재무부랑 한통속이라고 할 테니 아예 우리가 가면 명분도 서고 누가 봐도 좀 나을 테니까. 어. 그렇소. 가뜩이나 우리 통산성이 지나치게 보호무역을 한다고 미국과 유럽에서 뭐라고 하니 요즘 타임지도 그렇고 뉴욕타임즈도 떠들잖아. 남한의 인권과 결부시켜 우리가 뭐라도 역할을 해야 일본의 국익에도 좋을 듯싶어서.”
“역시 통산성 국장은 대단하구만.”
대장성과도 거침없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오 사장이 말했다. 최 전무 역시 사장의 말에 공감하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주식회사 일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전화상으로 들려오는 대장성의 응답을 듣고 나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야마시카 통산 국장은 보란 듯이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끊었다.
“오후 세시 경에 일본대사관으로 문서를 보낸답니다. 걱정마시오. 그건 아마도 통산국장과 대장대신의 서명이 담긴 것일테니”
============================ 작품 후기 ============================
통산성은 현재 일본의 경제산업성으로 우리로 치면 지식경제부와 같습니다. 산업정책을 총괄하는 부서입니다. 미국으로 치면 Department of Commerce(상무부)이런 부서입니다. 말만 다르지 하는 일은 비슷합니다.
대장성은 현재 일본의 재무성으로 우리로 치면 기획재정부와 같습니다. 국가의 자금집행, 금융정책과 같은 일을 담당하는 부서입니다. 영어로는 Ministry of Finance로 미국의 Department of Treasury와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정부부처가 미래창조과학부, 교육과학기술부 같은 '부' 체제이고 일본은 그 대신 '성'으로 구분됩니다. 그래서 TV보시면 외무성, 재무성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