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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시대-11화 (11/159)

11화

그 날 저녁. 고위 정치인이나 기업인들만 가는 고급 술집으로 검정색 현대 그라나다 한 대, 은색 새한 로얄 살롱 한 대, 검은색 현대 코티나 한 대가 나란히 향하고 있었다.

그라나다에는 야마시카 국장이 뒷좌석에 혼자 타고 있었고, 로얄 살롱에는 오남현 사장이, 코티나에는 황부장, 박계장, 그리고 경영지원실 최 전무가 타고 있었다.

오 사장은 로얄살롱과 그라나다를 놓고 어느 차로 야마시카 국장을 모실지 꽤나 고민을 했었는데, 4기통 2000cc급인 로얄 살롱보다는 그래도 6기통 2000cc엔진을 얹은 그라나다를 사용하기로 했다.

뭐 어차피 2리터급 엔진이기는 해도 기통수가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이 승차감도 더 좋고 부드럽게 움직이기 때문에 사장전용인 그라나다를 국장에게 양보하고 전무급이 타는 로얄 살롱에 몸을 실은 것이다.

야마시카 국장이 먼저 앉고 그 맞은편에 4명이 호화로운 별실에 나란히 앉아서 그를 영접했다.

“야마시카 쓰산 교쿠죠. 요로시데 고자이마스.(야마시카 통산 국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오남현 사장이 바닥에 엎드려 일본인들처럼 고개를 깊게 숙여 인사를 했다. 일제시대때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했기에 일본어는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었다.

일개 통산성 국장을 맞이하려고 사장까지 고개를 조아리자 야마시카 국장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렌즈를 닦았다.

“여기 황 부장이 내 친한 친구입니다. 이 친구가 보자고 해서 난 오랜만에 친구를 보러 왔는데, 이렇게 사장님까지 와주시니 저야 영광이지요.”

그렇게 말하며 정중히 고개숙여 인사를 하자 오남현 사장은 당황한 듯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그나저나 제가 경성제국대학 시절에 잘 알던 일본인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하고는 연락이 완전히 끊겼죠. 간혹 들리는 이야기로는 사업을 한다든가 종합 상사에서 근무한다고는 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만, 국장님은 이렇게 친구가 있으니 좋으시겠어요.”

“그런가요? 이름을 말해주면 한번 찾아보도록 하죠. 이거 통산성 그만두고 흥신소라도 차려야 하나? 하하하.”

야마시카 국장의 말에 가이 따라 웃은 뒤 오남현 사장이 말했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어쨌거나 부탁좀 드리죠.”

오남현 사장은 적당히 둘러댄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름이 아니라 통산성에서 이 40억 달러 경협차관에 대해서 힘을 써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야마시카 국장은 잔에 정종을 따라 쭉 들이킨 뒤 입을 열었다.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통산성은 국내 산업정책을 담당하는 곳이지 대외원조의 사용여부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기관은 아니니까요.”

첫 마디를 던진 후, 야마시카 국장은 입을 굳게 다물고 좌중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곧 박기범 계장에게 이동했다. 오 사장이 재차 말을 했다.

오남현 사장이 어릴적 일했던 일본인 가게의 주인이 오사카 출신이라 간사이 사투리로 말했다. 물론 박기범 계장이 듣기엔 다 같은 일본말이었다.

“나카소네 총리대신도 통산성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 경우는 정치인이 내정되는 것이지요. 실무를 담당하는 관료는 대개 사무차관까지 오르게 됩니다. 물론 그 차관은 통산성 내 국장들 중에서 선출이 되죠. 또 그 중에서 중공업국이 대개 유력하다고나 할까요.”

그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말했다. 사실 그는 통산성 중공업국장이었기 때문에, 이 말은 자신이 통산성의 차기 실권자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경협차관은 재무부가 선택할 문제라는 거군요.”

이번에는 황 부장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야마시카 국장은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당연합니다. 애초부터 경협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가 돈을 주면 한국 측에서 알아서 쓰는 문제니까요.”

“저. 국장님.”

박기범 계장이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차관은 달러입니까? 아니면 엔화입니까? 제가 알기로 82년도 기준 일본의 외환보유고가 300억 달러가 채 안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40억 달러를 달러화로 결재한다면 유동성에 문제가 있지는 않을까요?”

이 말을 황 부장이 재빠르게 일본어로 번역해서 말해주자 머리를 긁적이면서 통산국장은 대답했다.

“음. 꽤나 상세하게 알고 있군. 맞아. 정확하게는 284억 달러지. 어차피 경협이라는게 한번에 40억 달러를 뽑아다 주는 것도 아니지요.”

그는 말을 던지고 식탁에 놓인 한과 한 개를 집어먹었다. 과자가 뻑뻑한지 잔에 술을 담고 급히 들이켰다.

“외환보유고라는 개념이 조금 이상하죠. 내 통장에 300만엔이 있다면 급하다고 하면 40만엔을 덜컥 인출할 수 있겠죠. 허나 외환보유고는 조금 다릅니다. 기업통장에 입금된 돈이야 매월 정해진 물품대대금등을 다 아니까 별 문제가 없지만 국가는 그게 예측이 안돼요.”

잔에 술을 더 따르려 하자 오남현 사장이 급히 주전자를 들고 잔에 대신해서 따라주었다.

“여름에 해외여행수요나 원자재 도입등이 있어서 280억 달러 규모의 외환보유고를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결코 아무 걱정없이 40억을 인출할 수준은 아니죠. 외견상으로는 7분의 1이라고는 해도 일본의 산업구조가 먼저 원자재를 산 후 수출을 하니 외환보유고가 마이너스가 되는 일이 있겠죠. 물론 매년 기준으로 하면 늘겠지만 그 중간에는 유출이 심할 때도 있죠.”

“그렇다면 달러화로의 지급은 쉽지만은 않다는 말이군요.”

박기범 계장이 그 말을 듣고 야마시카 국장에게 되물었다.

“가령 6월에 원자재를 100억 달러어치 사면 6월 무역수지는 적자겠지. 하지만 보통 원자재를 가공해서 수출하고, 대금을 받는데까지 통상적으로 4달이 걸리니 10월 수지는 흑자가 납니다. 게다가 지난 80년에는 거액의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했어요. 뭐 세계2위의 경제대국이라고 하지만 우리에게도 40억 달러는 아주 큰 돈이니까.”

말을 마친 야마시카 국장은 박기범 계장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경협차관을 달러와 엔화로 지급 할텐데, 지난 정상회담에서 40억 달러라는 큰 틀을 정해도 일시에 주는 게 아니라 수년간에 걸쳐 주는 셈이니, 그리고 그들 자금의 상당부분은 일본으로도 돌아오는 몫도 있어요.”

상당히 해박한 지식을 가진 것으로 박기범 계장을 평가한 그는 보다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알다시피 상수도 개선사업, 지난 81년에 결정이 난 88 서울올림픽 진행을 위한 잠실 주경기장건립 등 주로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위주로 진행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자금 집행은 상공부와 재무부가 평가하여 산업은행이 융자를 진행해줄 거라고 대장성에서는 말을 합니다. 물론 재무부 은행국이 지시를 해서 은행으로 하여금 대출을 지도할 수는 있겠지. 따라서 결론만 말을 하면 우리 통산성이 개입할 여지는 좁아지는 거지요.”

“국장님. 그렇다면 만일 이런 경우는 가능합니까?”

“뭔데.”

국장이 정종을 한잔 더 비웠다. 그는 이 계장직급의 남자로부터 나올 질문이 무엇인지 예상해보려고 했지만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듣는 것으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경협이란 건 결국 한일 경제협력이니 만큼 4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지원하는 일본입장에서는 이 돈이 그 목적에 맞게 쓰였는지 확인하고 감독할 권리가 있지요. 하지만 대장성이 직접 와서 확인을 한다면 재무 관료라는 점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겁니다. 같이 미국에서 공부한 경우도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통산성이 감독을 한다면, 나카소네 수상도 통산대신출신이니 한국측의 자금분배를 믿고 신뢰할 수 있잖습니까? 어차피 저도 개입하는건 옵서버 수준이라고 밖에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저희 기업이 개입되는 사안에 있어서만큼은 공정하게 진행되도록 무언의 압력을 행사해주셨으면 합니다.”

전무와 사장은 이 말을 듣고 적잖이 놀란 듯 해보였다.

“옵서버로 참가해서 무언의 압력이라고?”

야마시카 통산국장은 고민을 하는 듯 해보였다. 결국 박기범 계장이 그에게 요구한 것은 산업은행이 간여해 자금분배를 하는 과정에서 무등 그룹이 배재되지 않게 해달라는 것과 특혜융자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해달라는 것이었다.

‘어려운 문제군. 대장성과 통화를 해야겠어. 무엇보다 통산 대신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경협차관을 감시한다.’

금테안경을 고쳐 쓰려고 손가락을 안경테에 가져다댔을 때, 야마시카 국장이 심각하게 고민한다는 것을 눈치 챈 오남현 사장이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혹시 현재 통산성 대신의 정계진출계획은 어떻습니까? 정치자금이 상당히 많이 필요할 텐데요.”

정치자금문제는 선진국이라 하는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일본경제가 고도화되면서 과거와 달리 기업회계의 투명성이 요구되면서, 미국 등 세계 증시에 상장을 계획하는 일본의 주요 대기업들의 입장에서는 정치자금으로 인해 괜히 얽히고 싶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보다 깨끗한 정치를 원하는 국민들의 열망 덕분에 기업들도 함부로 정치자금을 기부할 수 없었다.

반드시 이게 원인은 아니지만 지난 76년 록히드 사건으로 인해 다나카 가쿠에이 전(前)총리가 구속되는 등 일련의 정치 홍역을 겪은 일본정계에 있어서 정치자금문제는 아주 민감한 문제였다.

“어려워요. 록히드 사건 이후 자민당 내에서도 다들 몸을 사리니까. 그리고 정치자금을 준다 한들 무슨 명목으로 주는가 말이요. 록히드는 전투기 도입을 명분으로 돈을 뿌렸지만 당신네들은 명분이 없지 않소.”

국장은 이렇게 말하고 몸을 더 테이블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렇다고 경협차관에서 우위를 점하거나 특혜를 받기위해 돈을 준다면 또 그걸 만에 하나 우리가 받아서 압박을 한다면 모양새가 아주 나쁘겠죠. 특히나 선진국인 우리가 후진국으로부터 정치자금을 수령한다는 건 여론으로부터도 아주 비난받을 거요. 게다가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한국으로서도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일본에게 빌붙어서 특혜를 받느냐는 둥 비난이 쏟아질게 뻔하다는거지. 친일파나 당신네랑 뭐가 다르냐는 말이 나올게 뻔하거든. 그럴 경우 당신네 회사가 버틸 수 있느냐 말이요.”

야마사키 국장의 말은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자칫하다가는 특혜융자를 좀 받아보겠다는 의도가 잘못 읽혀질 위험도 있었다. 더 나아가 국민들로부터도 외면 받을 위험마저 있었다.

“그럼 아주 문제가 복잡해지겠군요.”

최 전무가 말을 이어나갔다. 돈이 매우 급했지만 마땅한 해결책이 보일 기미가 없어 답답한 나머지 정종도 마실 수 없었다. 속이 바짝 타 들어가는데 알코올이 들어가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게 아니라 휘발유를 끼얹는 모양새가 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통산성에게도 명분이 서고 우리도 명분이 서는 조건이 있어야 하는데, 정말 어려운 문제군요.”

전무는 푸념을 하듯 말을 하면서 기운이 빠진 듯 어깨가 축 늘어졌다. 순간 박기범의 머릿속에 묘안이 떠올랐다.

“국장님. 제게 좋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듣게 되자 국장은 안경을 다시 한 번 고쳐 쓰면서 박기범 계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제가 구상한 아이디어는 바로 이겁니다. 한일 우호문제도 있고 하니 국장님께서 재일교포학교나 이런 곳에 발을 좀 담그십시오. 즉 재일교포학교를 지원해주시거나 아니면 그 쪽에 연줄을 좀 닿으시기만 하면 됩니다. 적당히 사진 찍고 이런 모양새만 갖추어 주시면 됩니다.”

“그게 뭔가요.?”

흥미롭다는 듯이 야마사키 국장이 말했다.

“국장님이 재일교포 학교에 후원자가 되어주시기만 하면 저희는 얼마든지 자금을 제공해드릴 수 있을 겁니다. 학교에 자금을 제공하는 걸 문제 삼는 언론이나 사람들은 없을 테니까요. 이렇게만 된다면 저희도 정치자금을 떳떳하게 제공할 수 있죠. 나중에 국장님은 그 학교의 재단이사장이나 이런 명분으로도 가실 수 있으니까요.”

“똑똑한데.”

국장은 팔짱을 낀 채 몸을 뒤로 젖혔다. 왼손 엄지로 콧잔등을 톡톡 털 듯이 쓸어내리며 잠시 생각에 잠긴 야마시카 국장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좋은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보통 국장들도 퇴임 후 낙하산 인사로 일반 기업의 중역으로 가는 경우가 많거든. 내 경우도 한 3년 내지 5년 정도 더 국장을 지낸 후에는 자동차 회사나 중공업관련 회사로 가는게 어느 정도 내정이 되어있는데, 학교로 가면 모양새가 좋지 못하지. 대학이라면 또 모를까. 대학교수로 간다는건 또 다른 문제죠.”

그는 피식 웃었다.

“가뜩이나 학교는 내가 얼마나 싫어했다고. 그래서 대학 3학년때 고등고시를 패스한 게 학교가 너무 싫어서 공부를 죽자 사자 한 것이거든.”

“통산관료로서의 경험을 산업계에 할애하시는 것도 좋지만, 학교에서 실현하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박기범 계장의 말에 오남현 사장이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학교 건립의 명분만 있다면, 특히 일본에서 우리 재일교포를 위한 민족학교 건립에 돈을 대는건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 더 있지. 뭐 그 문제는 여기서 다루기엔 좀 껄끄러운 거요. 나도 좀 생각을 해 볼테니, 내일 다시 말을 합시다.”

야마사키 국장은 미소를 크게 짓고는 잔에 담긴 정종을 쭉 들이켰다.

“일단 나갑시다. 호텔에서 혼자 좀 생각을 하고 싶어요.”

그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장을 차에 태우고 그가 머무르는 호텔로 데려가기 위해 박기범 계장이 앞장을 섰다. 아까 타고 온대로 그라나다에 국장을 태웠다. 그라나다는 밤공기를 가로지르며 신라호텔로 향했다.

“최 전무랑 나는 같이 이 로얄 살롱을 타고 가지. 뭐 최 전무도 내일 하루는 차가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아.”

비서가 뒷좌석 문을 열어주자 차 안에 몸을 실으면서 오 사장이 말했다. 최 전무는 반대편으로 몸을 움직여 왼쪽 문을 열고 오 사장 뒷좌석에 탔다.

“우리도 이제 가지. 전철역까지 태워주면 되겠지?”

황 부장이 박기범 계장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넸다.

그의 집로 돌아오니 시간을 벌써 11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동생은 이미 잠들어있었고 그는 잠을 청하려고 는 했으나 잠이 오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런 할 일도 없었는데 가만히 있으니 또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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