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토요일 오후 5시. 버스에서 내린 박기범 계장은 장충체육관 앞에서 친구를 기다렸다. 시계를 보니 다섯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1~2분 뒤 다음버스가 도착하자 송영찬이 버스에서 내렸다.
“여. 오랜만이다. 관료가 되더니 아주 얼굴이 폈다.”
“무슨 얼굴이 펴. 고생길이 훤하던데.”
그 말에 박기범 계장이 대답했다.
“기범아. 니 동생은 아직도 학교 다니냐?”
궁금하다는 눈빛을 보내면서 박기범 계장의 어깨를 툭 찔렀다.
“잘 지내지. 이번에 삼성에 취직했더라. 뭐 잘 하겠지. 그리고 돈도 없다고.”
“쳇. 회사 다니면 돈을 얼마나 많이 받는데.”
“그래도 재무부 국장급들 돈은 많이 벌더라. 월급으로는 사지도 못할 집에서 살고. 잘들 나가는 모양이야.”
송영찬이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 안다. 내가 은행국에 있으니 나도 알아. 국장급들 뇌물 많이 받아 처먹더라.”
살짝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십보백보라지만 상공부도 많이 받지. 기업들 인허가 내주고 돈을 두둑이 받아. 나도 애기를 들었는데 지난 78년인가? 그 때에는 은행국장이 7억을 받아먹고 미국으로 날랐대드라. 관료가 이렇게 더러워. 난 그러지 말아야지.”
“10년 뒤에 70억 받고 미국으로 가지나 말아.”
박기범 계장을 친구를 데리고 족발집으로 들어갔다. 학교 다닐때는 여기는 잘 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학교 근처인 서울대입구 부근에서 먹자니 조금은 지겹기도 했다.
그렇다고 연세대나 이화여대 근처를 가기도 귀찮았다.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이 곳이 그나마 나은 듯 했다.
“오랜만에 족발맛 좀 보자.”
송영찬이 말하자 박기범계장은 종업원을 불러 주문을 하고 종업원이 가져다준 컵에 담긴 물을 한모금 마셨다.
“너 은행국에 근무한다니 뭐 좀 묻자. 이번 한일간에 경협자금건 말인데.”
“음. 너 그러고 보니 무등그룹엘 갔지. 왜 하필 거길 갔는지는 몰라도 은행국 내부에서 무등그룹은 인지도가 나빠.”
그 말에 물을 다시 마신 뒤 재차 입을 열었다.
“인지도가 나쁘다는 건 나도 잘 알지. 무등그룹 사장님이 전라도 출신이라서 그런 거 같아. 뭐 우리 사장님도 누누이 말하시지만 우린 5등 국민이니까.”
푸념하듯 말하자 송영찬이 핀잔하듯이 그를 달랬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다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지 1등 국민, 5등 국민이니 그런 게 어디 있어? 너두 그런 말 하는거 아냐. 명색이 배웠다는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재무부는 뭐 5공의 현금인출기냐?”
“맞는 말이지. 너야 아직 권한이 없지만 국장이나 이렇게 되면 재무부가 돈을 정치자금등으로 마구 내줄거 아니야. 전표없이.”
“정부가 그렇게 허술하지는 않아.”
다소 격앙된 소리였지만 송영찬은 친구의 말인지라 더 이상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열심히 시험을 치고 어렵게 들어온 재무부였기에 애착도 있었다.
물론 재무부가 그렇게 허술한 조직은 결코 아니었다. 다들 열심히 일한다.
“너무 그러지는 마라. 재무부도 열심히 일을 해. 그런데 겨우 그런 푸념 늘어놓으려고 만나자고 한거야?”
송영찬은 의자 뒤로 몸을 젖히면서 말했다.
“그런 건 아니고 아까 경협자금에서 우리 같은 수출위주의 그룹사들에게 융자해준다는데 우리 그룹도 포함이 되었나 해서. 그 내부문건을 좀 줄 수 있어?”
“그건 왜.”
“우리가 정말 선정이 되었는지, 아니면 우리 전무님이나 사장님 말대로 아예 누락이 되었는지 말이야.”
그 말에 컵에 담긴 물을 다 들이킨 송영찬이 말했다.
“문건. 나도 조금 다루기는 해. 그러니 내가 복사작업을 할 때 한 부 정도 더 해놓을게. 헌데 너네 회사는 이미 선정이 안되었다는 전제하에 이러는거 아니야?”
“맞는 말이야.”
종업원이 가져다 준 족발 접시에서 족발 한 점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박기범 계장이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부탁하는 거 아니야. 좀 도와달라고. 우리 회사도 좀 살자. 넌 재무부 관료고 우리나라가 차별이나 그런건 없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는 아니야. 사장님이 늘 하시는 말이 대구, 경북은 1등국민. 우리 같은 전남, 광주지역 사람은 5등급. 그래서 기업도 우리도 5등급기업. 재무부와 이런 덴 우리한테 신경도 안써.”
송영찬은 눈을 꿈벅거리면서 박기범 계장의 말을 듣고 몸을 뒤로 젖혔다.
“하긴 관료들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지 정작 너처럼 실제 근무하는 사람들이 가장 정확할거란 말이지.”
박기범 계장은 종업원을 불러 사이다를 한 병 주문했다.
“술은 별로지?”
어제 재무부 회식 때문에 술을 마신터라 혹시나 술 애기가 나오면 바로 차단하려는 의도에서 말을 던졌다.
“그래. 이번 주 내내 술이었어. 좀 쉬자.”
사이다를 컵에 담아 마시고 나서 박기범 계장이 답했다.
“부탁할게. 좀 알려줘. 그래야 나도 대책을 세우지.”
“좋아. 좋아. 한번 해볼게. 자료를 주면 되잖아.”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을 했다. 족발로 배를 채운 후 그 둘은 바깥으로 나왔다.
“근데 우리는 주 5일제 도입 언제 하는거야?”
“뜬금없이 그건 왜?”
“미국등 구미 선진국은 다 5일 근무체지라서. 우리는 언제쯤일까 했지.”
“일본도 아직 6일 근무제야. 우리는 더 기다려야지.”
환하게 웃어넘기고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바로 버스가 온다. 나 먼저 갈게.”
송영찬은 급히 버스로 뛰어나갔다.
야마시카 통산국장이 서울에 도착하자 시간에 맞춰 황부장과 박기범 계장은 최 전무의 코티나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갔다. 175cm정도 키의 야마시카 통산국장은 거들먹거리며 공항에서 빠져나왔다.
평소 일본에서는 국장급에 걸맞게 도요타 마크(도요타의 대표적인 중형차)를 타고 다니기에 자신을 영접하러 온 코티나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황 부장과는 안면이 있던 사이인지라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도 통산국장이라는 위엄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이 차. 엔진이 몇 cc야?”
야마시카 국장의 질문에 황 부장은 쩔쩔맸다. 그도 그럴 듯이 황 부장은 자동차가 없었다. 1983년은 비록 88올림픽을 5년 앞둔 시점이었지만 전년도인 82년에 고작 소득이 1971달러였다.
같은 해 일본의 1인당 소득은 무려 9429달러.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렸던 영국이 고작 8739달러이고 벤츠를 만드는 기계강국인 서독이 겨우 8723달러이며, 벨기에나 오스트리아와 같은 유럽국가들도 일본보다 개인의 생활수준이 크게 뒤처진다는 통계자료를 보면서 야마시카 국장의 차는 무엇일까 박기범 계장은 나름 궁금해졌다.
“자네 차 없나?”
박기범 계장이 뒷문을 열어주자 올라타면서 말했다. 황부장은 급히 반대편문을 열고 차에 몸을 실었다. 박기범 자신은 조수석에 앉았고 기사가 차를 몰기 시작했다.
“응. 아직 차가 없어.”
소득이 우리나라보다 4.78배나 높기 때문에 당연히 자동차 문화가 빠르고, 더 넓게 보급되었으리라 생각한 박기범 계장은 야마시카 국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자동차가 얼마나 비싸다고. 난 작년에 도요타 마크로 바꿨어. 2000cc급이지. 그 전까지 타던 코로나를 바꿀때도 됐지. 아내한테는 혼다 어코드를 사줬고. 1800CC야. 통산성 주차장가면 내가 타는 차는 흔해. 몇몇은 무리를 해서라도 크라운을 타는 경우도 있지. 차가 전부는 아닌데 말이야. 그저 편하고 내가 필요한 목적에 맞으면 돼. 물건사러 마트를 갈때는 어코드보다 더 작은 스즈키 경차를 타. 어차피 주말에 시장가서 짐만 싣을 거니까. 그나저나 이 차 엔진이 왜 이리 힘이 없어? 몇 cc야?”
“1600cc입니다.”
박기범 계장이 조수석에서 대답했다. 야마시카 국장은 그 말을 듣고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는 이 정도 급의 차가 중역들이 타다보지? 일본서는 길에 굴러다니는 택시도 2000cc인데 말이야.”
순간 박 계장은 비위가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들의 생활수준은 이미 구미선진국을 훌쩍 넘어선지 오래다. 패전 후,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하며, 67년에는 미국 다음가는 경제대국으로 부상한데다가, 73년에는 구미 선진국중 영국을 제치고 개인소득마저 증가했다.
지금은 오스트레일리아나, 중립국인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보다도 더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는 나라로 변신했다. 이 추세대로라면 1990년이 되면 미국보다도 더 풍요롭고 여유 있는 삶을 누리는 국가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야마시카 국장은 조수석에서 골똘하게 생각에 잠겨있던 박기범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요.”
그 말에 황 부장이 대답했다.
“우리 부서 계장이야. 이 친구가 자네를 좀 만나고 싶다고 해서. 내가 주선한거야.”
계장이라는, 국장급이 상대하기엔 너무나 낮은 직급이었지만 그 용기가 가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계장이 국장을 만난다? 허. 대단한 용기를 지녔구만. 뭐 좋아. 어차피 황 부장 자네도 개입되니까 괜찮지.”
그래서 야마시카 국장은 계급의 높낮이와 상관없이 자기를 만나고 싶다고 한 박기범 계장과 이야기를 좀 나누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