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의 시대-9화 (9/159)

9화

그 시간. 도쿄 카스미 카세키에 위치한 통산성에 한통의 전화가 갔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중공업 국장 야마시카 야스지로였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자 친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황영식이. 잘 지냈나?”

“응. 나 무등그룹 부장이야.”

“그래. 잘 알고 있지. 5년 전에 만난 이후 처음이로군.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했나. 기업인들이 나 같은 관료에게 전화하는 건 청탁이거나 부탁일 텐데.”

“사실. 뭐좀 부탁하려고.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40억 달러 원조건과 관련해서, 아마도 한국의 재무부가 자기들 마음대로 특혜융자를 줄 텐데, 거기에 대해 통산성은 권한이 없나?”

“그렇지. 우리는 권한이 없어. 대장성에서 간여를 하니까.”

“그런데 결국 그 돈도 한국의 산업발전을 위해 쓰여거든. 그래서 우리는 상공부도 간여를 해. 그렇다면 통산성이 개입될 여지가 충분히 있지 않을까?”

그 말에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몇초간의 침묵이 이어진 후 야마시카 국장은 대답했다.

“좋아. 일단 나도 확인을 한 뒤에 다시 알려주도록 하지. 지금 다짜고짜 전화만 받고서 내가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니까 기다리라고. 내가 좀 알아보고 움직여 줄테니.”

전화를 끊은 뒤 국장은 의자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왜 5년 가까이 연락 없던 이 친구가 전화를 걸었는지 궁금해졌다.

그가 한국에 가서 어릴 적 친구인 황 부장을 만난 건 5년 전의 일이었다. 통산성 과장으로 한일간의 무역에 관해 업무상 방문을 했었는데, 그 때 애기를 듣기로 친구인 황 부장의 회사는 수출위주로 건실하고, 정치와는 결부되어있지 않는 몇 안 되는 깨끗한 기업이라는 점은 알고 있었다.

그는 결재를 해야 할 서류를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그러나 황 부장의 전화가 그의 마음을 심하게 요동치게 했다.

‘친구니까 도와주어야지.’

물론 그의 마음속에는 댓가를 바라고는 있었다.

‘그건 거기서 잘 해주겠군.’

그날 저녁, 무등 그룹 근처의 작은 술집. 술안주로 곱창전골을 놓고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은 사장인 오남현. 경영지원실 전무 최선우, 자금부 부장 황영식, 그리고 자금부 계장 박기범이었다.

“음. 일단 한잔들 하자고.”

사장의 말에 전무가 술을 한잔씩 돌렸다. 술을 한잔 들이킨 뒤 사장은 전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래. 40억 달러 경협차관에 관해서 무슨 할 말이 있다는거야. 어차피 우리 회사는 아무런 혜택이 없잖아. 81년도에는 그 뭐냐 산업합리화조치인지 산업폐기화조치인지 때문에 거제도에 건립예정인 조선소도 포기했고. 그나마 혜택은 광주시에 건설한 연간 1억 개 생산규모의 형광등 제조라인말고 뭐가 있겠어.”

조선소 건립계획을 군부에 의해 포기하게 된 그 분노가 가시지 않았던지 그는 입 끝을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하면 이번 경협차관에 대한 이익을 본다는 건지 누가 말 좀 해봐.”

사장의 재촉에 박기범 계장이 입을 열었다.

“네. 제가 생각해낸 아이디어로 황 부장님과 전무님에게도 말씀을 드렸던 건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기억하기로 현재 통산성 중공업 국장과 황 부장님께서는 아주 친분이 두텁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결을 하게 되면 통산성 차원에서 상공부나 재무부에 압력을 행사해 저희에게도 경협차관을 제공하도록 하면 어떨지 하는 것입니다.”

“뭐야. 간단하잖아.”

오남현 사장은 짤막하게 내뱉었다.

“그런데 어떻게 압력을 넣도록 할건데.”

그 말에 박기범은 바로 대답했다.

“경협차관을 받게 될 경우 그 자금의 사용처는 반드시 일본 측이 알아야 합니다. 결국 자기 돈을 내주는 셈이니까요. 경협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우리에게 돈을 대주는 셈이니 당연히 그들은 참관을 요구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어느 정도 간여를 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마치 은행이 돈을 빌려주면 그 대신 경영에 간여하거나 정당한 발언권을 요구하듯이요.”

“좋아. 듣자하니 그럴 듯한데.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는 담배를 입에 물며 고개를 내밀었다.

“황 부장님과 친분이 있으니 연락을 잡고, 최대한 저희에게 유리하도록 옵서버로서 참가를 하게 되면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옵서버로 참가해야 하지? 한국이 알아서 하도록 하게 내버려 둘 수도 있는 거지. 어차피 한국에게 위임을 한 것이니까 말이야.”

전무가 대답을 했다. 이 말을 듣고 말문이 막힌 빅기범은 목이 타들어가서 물을 한잔 마셨다.

“이 친구가 아직 계장밖에 안돼서 구체적인 세부사항까지는 다 모를 수 있죠. 다만 아이디어 하나는 기똥찹니다.”

“황 부장. 그건 핑계거리가 안돼. 설령 그렇다고 해도 사장님까지 계신 중요한 자리야.”

전무가 준엄한 목소리로 황 부장에게 말을 하자 전무 옆자리에 앉아있는 사장이 말했다.

“괜찮아. 이런 아이디어 자체를 내는 사람이 없어. 비서실이나 기획실에도 없으니. 그나저나 통산국장을 만난다면 어떻게 설득을 할 건가? 뭔가 묘안이라도 있어?”

사장은 술을 다시 한잔 마셨다.

“뭔가 방법을 찾자면...”

전무가 웅얼거렸다.

“한일관계, 한미관계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움직여야겠군요. 어차피 정치적인 성격의 경협이니 우리도 정치적으로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이야 쉽지. 그게 또 어려운거야. 그렇다면 황 부장과 박 계장 둘이 같이 해보도록.”

안주로 놓인 곱창을 한 점 집어먹고는 사장이 말을 했다. 황 부장의 머릿속에는 통산국장과 일정을 잡아서 설득을 해볼 심산이었다. 식사를 끝낸 후 퇴근을 하면서 황 부장은 박계장을 불렀다.

“솔직히 이거 어려운 문제야. 그렇다고 일본까지 갈 수는 없는 문제고. 내가 접촉은 해줄 수 있다만 사장님 명령이니 추진을 할거야. 하지만 너무 기대는 말라고. 기대가 크면 실망도 아주 큰 법이니까.”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박기범 계장은 부장과 헤어져 전철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다음날 아침. 역시 출근을 한 그는 황 부장과 함께 어떻게 통산성을 움직일지 논의했다.

“그 친구와 연락을 하면 되지. 헌데 100%다 들어줄까가 의문이야. 그렇지 않아.”

“물론입니다. 그런데 어제 전무님의 말씀처럼 정치적인 접근이라는게 무엇일까요?”

“그게 힌트지.”

황 부장은 의자에 깊게 몸을 기댄채 답을 했다.

“정치적인 거라면 팔공그룹이 하는 것처럼 뇌물을 주라는 것이야. 물론 마음에도 걸리고 꺼림칙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게 세상 돌아가는 것이니까. 계장시절부터 조금 구정물을 맛보는구먼.”

씁쓸한 얼굴로 미소를 지은 황 부장은 박 계장을 쳐다보았다.

“그럼 얼마나 배상을 해 주어야 할까요?”

“글세. 내가 그 친구 월급을 모르니 콕 집어서 얼마를 주어야 한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500만 엔은 주어야 하지 않겠어?”

“음. 현재 환율시세가 1엔당 2.9원에서 3원 사이를 오가니 3원잡으면 1500만 원 정도 되는군요.”

“그럼 달러로 줘도 돼.”

“그럼 2만 달러가 되는군요. 달러당 750원선이니까요.”

“달러당 엔화가 얼마나 되지? 달러당 250엔 정도 되냐?”

“거의 그 수준일겁니다.”

대답을 한 박기범 계장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에게도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댓가로 지불해야 하는 문제는 내가 전무님하고 상의해보도록 하지. 거기에 더해서 만나게 될 때 뭐라도 둘러댈 거리를 좀 찾도록 해봐.”

“알겠습니다.”

부장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희의실을 나간 박기범 계장은 자금부 한편에 쌓인 신문을 몇 부 가져다 읽어보았다. 혹시나 신문에서 유용한 자료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점 때문이었다.

그가 신문을 펼쳐 국제면을 보았다. 자료를 찾고 있을 때, 황 부장이 다가왔다.

“통화를 했는데, 옵서버 자격으로 자금배분에 참관하고 싶다는 의향을 전달했나봐. 상공부에. 일단은 허가유무를 전달하기만 한 모양이야. 하지만 상공부는 지금쯤 난리가 났겠지. 그리고 다음주 월요일 오후2시 비행기로 온다는군.”

그 날 저녁. 금요일 오후라 다들 기분이 풀어진 회사원들이 속속 술집으로 모여들었다. 어차피 토요일근무는 오전만 하니까 마음의 부담이 많이 줄어든 모양이었다. 박기범 계장은 공중전화로 걸어가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친구의 하숙집이었다.

“안녕하세요. 예 저 송영찬이 친구인데요 좀 바꿔주세요.”

잠시 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송영찬입니다.”

“어. 나야. 박기범.”

“이 녀석 오랜만이구나.”

재무부 은행국 사무관으로 근무하는 송영찬이었다. 그는 박기범 계장의 대학 동창으로 지난 82년도 재무부고시에 합격을 한 친구였다.

올해부터 바로 재무부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하숙집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내일 한번 만나자. 난 내일 오후 1시면 끝나거든. 재무부는 언제 끝나는거냐? 저녁을 먹던지 하자고.”

“좋아. 오후 5시에 장충동 장충체육관에서 보자고. 족발이나 먹자.”

“헌데 동국대는 내 나와바리가 아닌데. 뭐 족발도 좋지. 재무관료의 지갑은 두둑하겠지. 기대해도 될까?”

“야. 재무관료라고 말은 번지르르하지만 나 돈 한푼 없어.”

“알았다. 전화 끊는다.”

약속을 잡고 나서 박기범 계장은 다소 홀가분한 마음으로 공중전화 부스 밖으로 나갔다. 통화를 하려고 줄을 선 다른 사람들이 박스 안으로 들어왔다.

============================ 작품 후기 ============================

나와바리는 일본어입니다. 원래 저는 이 말을 잘 안쓰는데 부득이하게 쓰게 되었네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