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의 시대-8화 (8/159)

8화

세월은 2년이 흘렀다. 박기범은 사원에서 계장으로 승진을 했으며, 아직 동생과 방 두 칸짜리 하숙집에서 살고 있었다.

생활수준의 급격한 향상과 함께 이 작은 하숙집은 비좁아지고 있었다.

지난 82년 겨울. 크게 할인된 가격에 14인치 컬러TV를 장만했다. 이제 조용하던 집에 모처럼 사람이 사는 것 같은 소란스러움이 가득채워지기 시작했다.

83년 초. 일요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TV를 켰다.

‘뭐 볼거 없나?’

TV앞에 가서 손으로 다이얼을 돌리자 화면이 바뀌면서 채널이 변경되었다. MBC로 채널이 돌려지자 일요아침만화가 나왔다.

‘이 시간대에 볼 것도 없고.’

긴 머리 휘날리고

눈동자를 크게 뜨면

천년의 그 세월도

한순간에 빛이라네

전설속에 살아온

영원한 여인. 천년여왕

과거를 슬퍼말고 우주끝까지

우주끝까지 밝혀다오.

날아라 날아라 썬더버드호

비추어라 비추어라 천년여왕아

아아 아아 아 아아 ~천년여왕

가수 김국환의 애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82년 나온 은하철도 999에 이어 한창 TV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일본만화인 ‘천년여왕’이었다.

만화를 보면서 컬러TV의 위력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다채로운 컬러가 구현되어 나오니까 말이다.

TV소리에 잠을 깬 동생이 말했다.

“형. 만화야?”

“응. 컬러 TV가 좋기는 정말 좋구나.”

“흑백TV는 사용해보지도 않았잖아.”

“이제 우리도 전화를 한 대 놓아야겠다. 언제까지 공중전화만 쓸거야. 안 그래?”

그 말에 기지개를 켜면서 동생이 말했다.

“뭐 그 말도 일리는 있지.”

해가 바뀌어 1983년이 도래했다. 박기범 계장에게도 새로운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민간인 수백명을 잔혹하게 학살한 전두환 정권은 1983년 초. 스즈키 총리의 뒤를 이어 전(前) 통산성 대신(大臣)을 역임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1918~. 일본의 71, 72, 73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정권으로부터 4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원조 받았다.

하지만 이는 한일 경제협력의 시대가 열림을 알리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자금원조지만 이들 자금은 정치권과 상공부, 재무부가 한통속이 되어 자기들끼리 나눠먹거나 정치자금을 잘 상납하는 기업에게 특혜융자를 하기 위함으로 일부는 산업은행에게 배정되어있었다.

그 중 10억 달러는 기업들을 위한 특혜융자로 재무부가 직접 금액을 배정하는 구조였다. 평소 무등그룹에게 가장 빡빡하게 구는 재무부는 이들 자금으로 어디에 특혜융자를 줄지 고려했다.

그 10억 달러 중 4%에 해당하는 4천만 달러는 수출위주의 중견 그룹사에게 융자할 돈으로 수출비중이 50%가 넘는 그룹사가 그 대상자였고 이에 해당하는 그룹사는 단 두 곳으로 무등그룹과 남산그룹이었다.

그러나 재무부의 리스트에는 남산그룹과 수출비중이 44%밖에 안되는 팔공그룹이 기재되어있었다.

“저. 부장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뭔데? 급한건가?”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일본에서 원조 받는 40억 달러요. 그 중 10억은 기업에게 특혜 융자한다는데, 우리는 뭐 받을 수 있는 게 없나요?”

“없어. 기대하지마.”

뭔가 중요한 말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가 별거 아니라는 질문이라는 걸 안 황 부장은 그저 시선을 서류에 돌렸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일이나 해.”

순간 그는 지난 12월. 연말 회식자리에서 황 부장이 술김에 한 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작년 12월의 회식자리. 장영자-이철희 어음사기사건 등 금융쇼크속에서도 휘말리지 않은 무등그룹은 80년 초의 오일쇼크의 악몽을 털어내고 비약적인 성장을 거두었다.

80년대 초. 전세계를 뒤흔들었던 오일쇼크와 자유진영을 놀라게 만든 5.18이라고 하는 초유의 민간인 학살, 미국의 레이건이 새로 취임한 한국의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아 백악관 후문으로 들어오게 했을 정도로 미국의 등을 돌리게 만든 군사독재정권의 횡포, 우호적이지 않은 대외환경에도 불구하고, 80년부터 82년까지 3년간 연평균 매출액 증가율 42퍼센트 성장에, 영업이익은 64%나 늘어나는 기적을 발휘했다.

그 때, 회식자리에서 황 부장은 10대 초반시절, 한 동네에 같이 잘 알고 지냈던 일본인 친구들에 대해 자랑삼아 늘어놓은 말을 했었다. 그것을 기억한 박기범이 다시 말을 했다.

“잘 아시는 친구가 일본 통산성에 있다고 하셔서요. 그 점을 잘 활용한다면 뭔가 이점이 없지 않을까요?”

볼펜을 내려놓은 황 부장은 고개를 들어 박기범을 쳐다보았다.

“물론 그렇지. 야마시카 아스지로라고 통산성 국장이야. 이번에 나카소네 내각에서도 국장자리를 유지했다더군. 그런데 자네가 뭔가 잘못알고 있는 게 통산성은 이번 자금배분에 관해 힘이 없어. 어차피 정치인들이 하는 문제니까.”

“물론 그렇죠. 하지만 제 생각에 통산성 국장하고 말을 트면 뭔가 있지 않을까요? 어차피 제가 알기로 통산성 국장은 차기 차관승진 대상자이고, 통산성 차관은 정치로 입문하면 차기 통산대신이 된다고 들었거든요. 그래서 잘만 하면 통산대신은 차기 일본 총리감이라고 해서요. 그러면 무시할 수 없는 게 통산성이잖아요. 이번에 나카소네 총리도 제가 찾아보니까 통산대신출신이더라고요. 그래서.”

“물론 그렇지. 그 친구가 통산대신이 될지는 몰라. 차관도 불확실하다고. 원래 일본에서 대신급은 다 정치인들이지. 게다가 원조자금 40억 달러의 사용처를 정하는 건 통산성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재무부야. 물론 대장성이 자금지출을 담당하기는 해도. 야마시카 국장과 만나게는 해줄 수 있어. 어차피 그 친구도 한국에 오니까. 40억 달러 때문에. 헌데 그 친구가 재무부를 움직일 수 있을까?”

“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확신에 찬 박기범 계장의 말에 황부장은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40억 달러의 원조 중에 10억 달러는 기업에게 특혜융자로 가는 거죠. 이건 기업정책이라고 봐야죠. 일본입장에서는 자기들 돈을 한국의 기업에게 특혜융자하는건데, 당연히 그 사용용도를 알아야하고, 제대로 집행되는지 감독할 권리가 있는 거죠. 따라서 통산성이 힘만 써주면 우리에게 필요한 2천만 달러 융자를 받을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런데 말야. 이 40억 달러 한일 경협차관의 이면에는 정치논리가 작용해. 즉. 일본은 GDP의 1%도 안 되는 돈을 국방에 투자하거든. 반면에 우리는 3%이상 투자를 하니까. 일종의 안보비용이라 이거야. 2%를 더 경제개발에 투입했다는 논리지.”

“그렇다면 부장님의 논리라면 그저 이 돈은 어떻게 쓰든 일본은 아무 권한이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하지만 만에 하나 우리에게 융자를 받을 수 있게 외부의 힘을 사용하기만 하면 될 겁니다. 통산성 국장정도면 대장성도 알 테니까요. 뭐라도 해보는 게 어떨까요? 부장님.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자신만만해 하는 박기범 계장의 태도에 황 부장은 서류 결재철을 덮고 말했다.

“그렇게 하고 싶나? 83년도 올해의 도전과제로 삼게 해줄까? 산업은행으로부터 특혜융자 받는걸.”

“물론입니다.”

“2천만 달러라. 우리의 새로운 경영전략 수립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금액이지.”

황 부장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좋아. 전무님하고 상의해보도록 하지. 일단 그렇게 알고 있어.”

황 부장이 전무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러 가는 동안 박기범은 자리에 앉아 계속 장부를 정리했다. 계속 타자기로 전표를 작성하고 있었다.

이제 좀 숙달이 되어 나름 타자기도 빨리 치고, 전표작성 속도도 상당히 빨라졌다.

“박기범계장. 일단 전무님 실로 오지.”

뒤에서 황부장이 그를 불렀다. 황 부장을 따라 전무실로 들어간 박기범은 전무의 위용앞에 다소 움찔했다.

“자네가 통산성의 힘을 빌리자고 한 친구로군.”

“네. 그렇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해보라고. 황 부장. 자네와 이 박기범군과 같이 일을 하게. 박 계장의 아이디어가 얼마나 잘 통할지 한번 봐야지. 황 부장은 야마시카 통산 국장과 어떻게 해서든 일정을 받아내고. 만일 그 친구가 나중에 정치에 입문한다면 뭔가 선물도 주어야 할테니까. 사장님께도 보고를 올리겠지만 당장 추진하도록. 그 2천만 달러만 받아내면 자네들은 승진이야. 다만 이자가 걱정되지만.”

“알겠습니다.”

전무에게 대답을 하고 황 부장과 박기범은 방을 빠져나왔다. 도쿄의 시간대와 서울의 시간대가 일치했기에 황 부장은 급히 도쿄로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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