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벤트
남성성.
남녀 역전 세계에서 내가 신경 쓰지 않고 대충 넘어간 부분이기도 하다. 대충 얌전하고 가정적으로 보이
면 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태생이 모태 솔로인 소희가 남자에 대해 잘 알리 없기 때문에 넘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점에 대해 약간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방송을 해야 하니까.
소희가 슬그머니 관심을 보이던 HH 같은 공중파 방송이나, 우리가 하게 될 개인 방송에서 나는 캐릭터를
확실하게 잡아야 했다. 내가 소희를 방송에 집어넣는 이유가 고작 돈이나 추억, 좋은 경험 따위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은 소희의 인기였다. 정확히는 나와 소희의 인기와 이미지를 바탕으로, 소희가 마왕과 싸
우게 될 때 인류가 그녀를 우러러보기를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충 하는 것은 조금 찝찝했다.
자연적인 일상을 보여줘도 S급 히어로와 사이드 킥이라면 인기를 끌 것이다. 그런데 그게 인류의 전폭적
인 지지가 될 정도일까? 조금 귀찮더라도 첫 방송에서는 어느 정도 정형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게 더 나은
반응을 이끌어 내지 않을까?
그 때문에 나는 방송 공부라는 명목으로 남자들의 영상을 열심히 시청하게 되었다.
이 또한 게이머의 심리와 비슷했다. 그냥 해도 점수를 잘 뽑는 게임 이벤트가 있다고 쳐도, 계획을 세우고
최고 효율을 노리는 것이 게임 폐인들 아닌가. 고작해야 게임에 함수에 방정식까지 들고 와서 효율을 뽑
아 먹는 것이 게이머들이다.
솔직히 계속 보기는 좀 좆같긴 한데.
카테고리 ‘남성 히어로’, 정렬 방식 ‘인기 순위’
딱 두가지 분류로 동영상을 시청하고 있으니 도움이 되기는 커녕 내 눈을 괴롭게 하는 녀석들도 잔뜩 있
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처럼 대놓고 섹스 어필을 하는 남자들이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에. 어찌 되었든 인
기만 얻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노출과 섹스 어필을 주무기로 삼은 히어로가 많았다.
하지만 괴로워도 꾹 참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섹스 어필과 노출 자체가 이쪽 세상의 ‘남성성’의 극치
라고 생각하니까. 가정적이고 요리와 청소를 잘하는 청순 가련한 남자 다움은 딱히 알아볼 이유가 없지
만, 성적인 요소는 바뀐 점이 많다.
소희가 모아둔 야동만 봐도 성별의 역할이 바뀌며 얼마나 뒤틀렸는지 알 수 있으니까.
“어어, 누나~ 언제나 후원 감사해요!”
화면 너머에서 겨드랑이는커녕 옆구리까지 보일 것 같은 헐렁한 나시티를 입은 남자가 근육을 은근히 자
랑하며 카메라에 넙죽 고개를 숙인다. 팬이 보내주는 후원금에 감사 인사를 하는 모습 까지는 똑같지만,
그 이후의 반응이 가관이다.
“원하시는 포즈 같은 거 있어요? 아이, 편한 거 하라니... 그래도 누나가 나 빌런 잡으라고 쏴 준 돈이 얼마
인데.”
말을 이쁘게 한다는 이유로 몇 만원이 더 오가고, 그제서야 화면 속 남성 히어로는 팔뚝을 움직여 보디빌
더가 취할 법한 자세를 보이며 알통을 자랑한다. 잘 단련된 탄탄한 팔뚝과 손등의 힘줄이 불룩 솟아오르
고 그 여파로 딱 달라붙은 나시 옆부분이 슬쩍 밀려나며 옆구리의 맨살이 슬그머니 드러난다.
남자 겨드랑이에 환호하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다는 것에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았지만 사람들의 반응
은 은근히 도움이 되었다. 적어도 이상 성욕자가 만 단위로 모여 있는 기괴한 방송이 아니라면, 이 사람들
이 원하는 것에서 어느 정도 걸러낸 것이 대중적인 성 취향이라는 뜻이니까.
물론 소희 방송에 사이드 킥으로 나가 대놓고 섹스 어필을 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S급 히어
로 & 사이드 킥의 인기였지 남성 히어로의 인기가 아니었으니까. 히어로 슈트 주문 제작을 악마 쪽에 요
청한 다음 슬쩍 야하게 만드는 정도에서 멈춰야지.
외모지상주의는 어느 세상을 가더라도 있는 것이라서, 결국 같은 히어로라도 잘 생기고 은근 야시시 한
히어로가 꽁꽁 싸맨 히어로보다 인기가 더 많았으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대놓고 컨셉을 잡고 노출을
하는 거지. 그런 인기라도 없었으면 전부 비공개 히어로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이건 남성 히어로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여성도 가면이나 탈을 쓴 히어로보다 예쁜 얼굴을 드러내고
몸매를 드러낸 쪽의 인기가 더 많다.
“그, 공부는 잘 되어가?”
“공부라 하니까 뭔가 이상하지?”
“그건 그래. 아무튼 배울 건 많아? 나는 그냥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면서 너는 그렇게 열심히
공부까지 하면서 해야 해?”
은근히 머리가 굳어 있는 소희가 슬쩍 물어본다. 개인 방송인을 얕잡아보는 비하의 의미가 아니라 그녀
의 머리 속에서 개인 방송은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렇다.
소희는 버라이어티 예능 방송에 대본이 없다고 굳게 믿는 부류의 사람이니까. 인기를 얻기 위해 개인 방
송을 하는데 거기에 꾸며진 모습을 보여야 하겠냐고 물어보는 거겠지. 하지만 그건 인지도를 좀 얻고 나
서의 이야기라 생각한다.
뭐 둘 다 전문 방송인도 아닌지라 누가 옳고 그른지는 가려낼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누나는 그대로 찍어요. 나는 카메라 앞에서 내숭 좀 떨 테니까.”
“어, 아... 그래?”
내숭이라는 단어에 쩝 하고 입맛을 다신 소희가 조용히 옆에서 남캠을 같이 본다. 용사도 본능은 어쩔 수
없는 건지 남자 근육에 시선이 가는 것 같아 허벅지를 꼬집는다.
“아니, 아니! 왜?!”
“뭘 그렇게 뚫어져라 봐?”
야동부터 흡혈로 인한 정보까지 그녀의 취향이 우락부락 근육남보다는 조금 왜소한 체형의 소년 취향이
란 걸 알지만 화들짝 놀라 소파에서 펄쩍 뛰는 모습에 추궁을 계속 이어 나갔다. 소파에서 엉덩이가 슥 떨
어질 정도로 놀라는 모습을 보면 놀리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화면 뚫어지겠다, 뚫어지겠어?”
“아니, 그게 아니라 로이더 같아서 본 거지. 저저 운동을 저렇게 하는데 사람 근육이 어떻게 저렇게 잘 빠
져. 그 것도 히어로가?”
이건 또 무슨 참신한 소리인가 싶어 꼬집던 손가락에 힘을 풀자 엄살을 피우며 허벅지를 살살 문지른 소
희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톡톡 건들며 말을 이어 나간다.
“저기 봐봐, D급 육체 강화 히어로면 그래도 육체에 보정이 이루어지고 어지간한 근력 운동으로는 근육
에 자극이 안 와. 그런데 뒤에 있는 운동 기구들은 다 히어로용 고중량 무게추가 아니라 일반인용 물건들
이거든. 그러면 저게 다 장식이라는 거고, 지금 보여주는 아령가지고 팔 근육 보여 주는 것도 다 퍼포먼스
지 진짜 운동은 아니야. 그런데 근육이 저렇게 뻠삥이 되어 있다? 이거 100% 로이더거든.”
세상에, 남캠을 보고 있는데 로이더 내츄럴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하지만 계속 이어지는 그녀의 설명은 꽤나 참신하면서도 일리가 있었다. 근육질의 남성이 글래머 취급을
받는 세상이니까. 여자들이 골반과 가슴에 뽕 넣는 수술을 하는 것처럼, 이쪽 세상의 남자들은 근육을 키
우기 위한 약물 시술을 받는 것이었다.
곧바로 게시판에 검색을 해 보니 이미 많은 시청자들이 그 걸 가지고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누구누구는
근육이 로이더네, 내추럴 근육이 이쁜 남캠이 있네, 로이더면 뭐 어때 보기 좋은데, 저러면 늙어서 피부
축 처진다 등등.
로이더 의심을 받던 인기 남캠 히어로가 히어로 전문 병원에 가서 혈액 검사로 약물 반응 없음을 보여주
는 인증 게시글을 보며 참 세상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안 그래도 내가 거래하던 게시판에도 여자 방송인
의 골반이 뽕이네 아니네로 싸움이 일어났었던 적이 있었으니까.
심지어 이 쪽 세상에서는 남자의 근육이 로이더인지 아닌지 따지고 드는 놈들이 훨씬 많은 것 같았다. 히
어로의 육체는 대부분 각성 상태에서 머무르기 때문에 모태 미남인지 아닌지가 갈리기 때문이라고.
초능력 각성 이전 부터 몸매가 좋았다면 히어로가 되고 나서도 몸매가 좋을 것이고, 각성 이전에 똥배가
볼록 했다면 아무리 운동을 해도 육체가 잘 변하지 않으니 근육을 만들기 위해서는 약물에 의존해야 한
다.
히어로의 육체를 단련시키기 위한 약물 시술이 합법이라 할 지라도 어디 네티즌들이 그걸 이해하겠는가.
굴욕적인 과거 사진이라도 들고 오는 게 악질적인 네티즌들이니까. 말을 거창하게 해도 이 남자가 성형
미남인지 아닌지를 따지고 드는 것이다.
“그래서, 로이더 몸매에 눈이 그렇게 가?”
“어우, 아니이~ 내 눈에는 니가 훨씬 멋져 보이니까 비교하느라 잠깐 본 거지.”
“이제 입 발린 말도 익숙하네?”
“그럼, 누구랑 같이 사는데.”
히쭉 웃어 보이는 모습에 옆구리를 쿡쿡 찌르니 소희가 나를 소파 위에 찍어 누른다. 어째 침대보다 소파
를 더 그렇고 그런 용도로 많이 사용하는 것 같은데. 대충 던져버린 단말기에서 운동을 하니 덥다며 나시
목덜미를 펄럭이는 남캠의 소리는 곧 조용히 사라졌다.
[작품후기]
월요일 공휴일인지도 모르고 치과 가려고 외출한 내가 레전드
방학때는 요일감각이 너무 없는 것 같아요
특히 공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