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5화 (185/189)

새로운 이벤트

방송의 준비를 하고 있으니 소희의 S급 심사가 결론이 났다. 결과는 당연히 합격. 소희의 합격을 원치 않

는 자들이 여러 방해 공작을 벌이느라 발목을 잡혔지만 단순 무식한 논리 하나를 꺾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S급이랑 대등하게 싸웠는데?

히어로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빌런을 체포하는 것. 애당초 초능력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빌런에게 맞서

싸우기 위해 설립된 것이 히어로기 때문에 그 누구도 저 논리를 부정할 수 없었다. 인기도니 인성이니 현

대 사회에 맞게 편의적인 설정을 잔뜩 가져다 붙여도 결국 빌런을 제압하는 능력은 부정할 수 없는 항목

이니까.

“양복 불편해...”

“쫌만 참아, 나도 불편해.”

그래서 나와 소희가 이런 귀찮은 자리에 나와 있는 거고.

세상이 아무리 발전해도 높으신 분들의 허례허식은 변할 생각이 없는지 플랜 카드가 걸려 있는 강당에서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냥 S급이라고 발표를 하면 될 걸 손으로 쓴 임명장과 순금 훈장까지 쥐어 주

며 대대적인 임명식을 하는 것이었다.

S급 히어로 임명식에 참석해 달라는 메시지를 보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게임에서는 대충 넘겨버릴 수 있

지만 현실에는 SKIP버튼이 없었다. 만약 내가 S급 히어로가 된 거라면 귀찮아서 불참해버리겠지만 소희

는 할머니부터 온 가족이 정치권에 엮여 있어서 빼먹을 수도 없고.

허허 웃는 뚱뚱한 아줌마를 시작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천사들이 모여 있었다. 한국 최초의 S급 히어로를

구경할 생각인지 제 계약자에게 들러붙어 이 쪽을 관찰만 하고 있을 뿐이라 터치는 하지 않는 상태. 열 대

가 넘어가는 카메라 앞으로 끌려간 소희가 임명장을 받고 악수를 하고, 인사를 하고 악수를 하고, 웃으며

대화를 하다 악수를 하고.

저쯤 되니 내가 S급 히어로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기분이 든다.

그 와중에 몇몇 아줌마들의 음흉한 시선이 내 쪽으로 슬그머니 다가왔지만 대범하게 나서는 사람은 없었

다. 그야 그럴게, 지난 번 소희가 도시 위를 날아다니며 건물 지붕을 지워버린 원인이 나 라는 것을 협회

사람들은 전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 많고 많은 남자애들 중 하필 나를 건드려서 눈 뒤집힌 S급 히어로를 보고 싶은 생각은 없겠지. 내가

아무리 매력적으로 생긴 남자애라 해도 대한민국 최초의 S급 히어로랑 싸울 가치가 있겠는가. 여기 있을

권력이면 멀쩡한 B급 히어로 정도는 스폰서가 되어 줄 수 있는 년들인데. 현실에 그런 미련한 년이

“안녕하세요?”

있나?

슬그머니 다가오는 양복의 여성. 관리를 잘 받았는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매끈한 얼굴

은 익숙하지 않았다. 어디서 본 것 같으면서도 기억은 안 나는 그런 애매한 사람. 샐쭉 웃으며 다가오니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도 없어서 어정쩡하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와 함께 내밀어지는 명함.

“이번에 방송을 시작할 생각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작게나마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네요.”

정갈한 글씨로 쓰여 있는 것은 영웅서기(英雄書記)라는 네 글자. 순간 캡슐을 구매하기 전 죽자고 파고

들었던 고전 명작 게임이 떠올라 풉 하고 웃어버릴 뻔했다. 이름만 봐서는 감도 잡히지 않아 어색하게 웃

어 보이니 여성이 계속 소개를 해 나간다.

“이쪽 업계에 자세하지 않으시면 모르실 수 있죠. 저희는 방송을 하는 히어로 분들을 전문적으로 상대하

니까요. 연예인 소속사의 인터넷 방송 버전이라 보시면 이해하기 편하실 겁니다.”

“아, 그래서?”

“예, 혹시 따로 계약하신 곳이 없으시다면 저희 회사와 단기 계약이라도 맺어 보시는 걸 권유하러 왔습니

다. 방송에 대한 계획이나 편집, 관리까지 하며 히어로 생활을 하시기는 많이 귀찮으실테니까요.”

“그건 그렇겠죠?”

앞을 계속 쳐다보며 시큰둥하게 대답해도 비즈니스 우먼은 흐트러지질 않았다.

“예, 그렇죠. 명색이 S급 히어로인데 귀중한 휴일을 방송 편집 같은 걸로 보내시긴 아쉽지 않을까요? 저

희가 A급 빌런을 체포할 수는 없어도 A급 빌런을 체포하는 영상을 다듬는 것은 전문이니까요. 어중이 떠

중이들과는 다른 전문 촬영 장비들도 보유하고 있으니 꼭 연락 부탁드립니다.”

슬슬 귀찮아져 갈 무렵에 정확히 끊고 정중한 인사를 남기는 모습까지, 정말 모범적인 영업 사원의 모습

이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보고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여자 말고도 우리를 노리는 사람들이

득실득실 하다는 것을.

그야 대한민국 최초의 S급 히어로의 이름값 때문이겠지. 정치인들은 저 앞에서 소희와 악수하는 사진을

찍느라 바쁘고, 사업가들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내게 명함을 꽃아 넣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외모가 빼어나지 않은 아줌마들의 열렬한 시선을 받는 건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네...

탐욕 한 가득에 성욕 한 스푼 정도 뒤섞인 음흉하면서도 열렬한 시선. 지금 나를 잡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소희도 붙잡을 수 있게 되고, 한국 최초의 S급 히어로와 계약했다는 타이틀은 어마어마한 돈을 가져다줄

것이다.

소희와 나, S급 히어로와 10살 어린 동거남 사이드 킥에 대한 것은 알 사람은 다 아니까 다들 내게 몰려드

는 거고. 사이드 킥으로 이름 날리기 위해 아파트 단지 습격 사건에서 조금 날뛰었더니 엉뚱하게 동거 사

실만 더 부각된 것 같다.

기나긴 식이 끝나고, 소희를 붙잡고 인사를 하던 사람들도 슬슬 선을 넘는 것 같다고 판단했는지 슬그머

니 자리를 비켜선다. 그 체력 좋은 용사님이 어두워진 안색으로 손을 쥐락펴락 뼛소리가 나게 스트레칭

을 하고 있으니 그럴 만하지.

사람들이 우르르 갈라지고 소희가 자연스럽게 내 곁으로 온다. 주최측에서 준비한 식사가 있는 것 같지

만 소희가 내 손을 잡고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간다. 결과적으로 나한테 명함을 준 건 영웅서기 쪽 한 명 밖

에 없네.

“많이 피곤해?”

“평생 할 악수를 오늘 다 한 것 같아...”

작게 투덜거리는 소희 앞에 자연스럽게 검은 차량이 다가온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나와 소희가 잠

시 멈추자 운전석의 문이 열리며 선글라스를 낀 여성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그제서야 우리는 연예

인 밴 닮은 차량에 탑승했다.

운전자가 악마 계약자였기 때문에 따질 이유가 없었다.

부드러운 배기음과 함께 차량이 출발한다.

“아마이몬님께서 약속의 이행을 원하십니다.”

네비를 찍은 것도 아니고 우리 집 위치를 말해준 것도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익숙한 길로 차를 몰아가던

운전석의 악마가 툭 용건을 내뱉는다. 소희가 S급이 된 날 저렇게 말하는 걸 봐선 관련이 있는 걸까.

“그래서, 무슨 부탁을 들고 온 거야?”

“좌석 뒤 보관함에 서류가 있으니 두 분 모두 살펴보시면 됩니다.”

그 말을 듣고 앞좌석의 등받이 부분을 찾아보니 갈색 종이 봉투에 들어있는 서류철이 있었다. 지하 도시

에서도 히어로 협회에서도 증강 현실에 담긴 홀로그램 데이터를 주고받는 와중에 종이 위에 만년필로 손

글씨를 쓴 서류라니. 직접 사업을 하는 악마 답게 정갈한 글씨가 보기 쉽게 나열되어 있었다.

“뭐야, 계약서?”

그리고 그 것은 내가 어렴풋이 예상하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역시나 탐욕의 악마답다고 해야 할까? 아마 그녀가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무형의 이익이겠지. 그녀가

평소에 우리에게 보내주는 억 단위의 뇌물도, S급 히어로를 꼬시는 비용이라 생각하면 싸다고 볼 수 있었

다.

서류의 내용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아웃도어 패션 모델 제안부터 초능력자 전용 운동화 테스트 요청,

기업의 이미지 쇄신을 위한 봉사 활동과 치안 유지 활동 참여까지. 히어로의 이름을 걸고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는 서류.

“물론, 강제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전부 해야 하는 일도 아닙니다. S급 히어로 활동 방향을 생각해 두신

게 있다면 저희들이 그 방향으로 발 맞춰 나아가면 되는 일이니까요.”

흐음, 하고 목 울림 소리가 들려 슬쩍 옆을 쳐다보니 소희가 서류 한 장을 꽉 집어 들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서류 상단에 적혀 있는 HH라는 이니셜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어서 슬쩍 소희에게 기대 내용을 읽

었는데-

“누나? 이거 하게?”

“엉? 어... 아니, 모르겠다.”

HH, 히어로의 집(Home)이라는 이름의 방송이었다. 슬그머니 소희의 옆 얼굴을 바라보니 얼굴이 벌게

진 그녀가 갑자기 장황한 설명을 시작한다.

“아니, 그나마 방송 중에서 개인 카메라 달고 부담 없이 촬영할 수 있어 보여서 그래.”

히어로의 집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일상을 보여준다는 생활 예능 프로그램. 당연하지만 우리는 동거중이

고, 카메라를 설치하게 되면 거의 생활 예능 보다는 연애 예능으로 카테고리가 바뀌게 될 것이다. 집에서

단 둘이 있을 때에는 소희 취향에 맞춰 조신한 남자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소희, 이런 거 나가서 자랑하고 싶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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