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벤트
히어로 TV에서 방송을 하자.
문장 하나만 덩그러니 놓고 보면 별다른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방송의 주체는
점차 대기업에서 개인으로 변화하고 있었으니까. 막말로 단말기에 연동된 성능 좋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구시대식 방송인이 될 수 있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현역 초능력자 타이틀이 붙으면 이야기는 180도 회전한다. 히어로는, 정확히 표현하자면
국가 공인 초능력자들은 모델 겸 아이돌 겸 방송인 겸 CF 스타 겸 배우에 외교관 등 다양한 직책에 포진되
어 있었다.
그래, 국가 공인 초능력자.
세 글자로 줄이면 ‘공무원’이다.
공무원이니까 경찰과 협력을 해서 순찰을 돌고, 범죄자를 체포하는 거지. 아이돌이나 배우 등 연예계 활
동도 명목상 공무원들의 국위 선양을 위한 일이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초능력자와 민간인을 모두 끌
어안고 나아가기 위해 초능력 등장 초창기의 대한민국이 선택한 길이었다.
초능력자에 의한 박탈감 때문에 시민들의 불만이 어마어마할 것 같아?
그럼 걔들도 국가의 부름을 받으라 해!
초능력자들, 특히 여성 초능력자들이 이중으로 씌워진 의무 때문에 반발이 심할 것 같아?
그럼 급에 따라 7급 5급 감투도 쥐여줘!
우격다짐식 하향평준화 대우에 달래주는 방식도 무식하기 짝이 없으나 먹히기는 먹혔다.
폭력 시위나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으니 국가 입장에선 성공이라 봐도 좋지 않을까.
미필 여성들은 초능력자를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인생 역전의 징표로 삼았다. 성공만 하면 회사원과 비
교도 되지 않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에. 거기에 사회 봉사 의무가 5년이나 있지만 군 입대 2년보다는 사회
에 5년 있는 게 좋아 보이니까.
군필 여성들은 병역이 면제되는 초능력자에게 부러움을 느꼈으나, 직업의 자유 대신 강제로 공무원이 되
는 이들을 보고 연민을 느꼈다. 연예계 활동을 하는 초능력자가 부러워? 저 얼굴 저 몸매에 연예계 활동
을 할 끼가 있으면 초능력이 없어도 성공하는데 초능력이 무슨 상관일까.
실제로 초능력 등급은 높지만 방송에 적응치 못해 순수한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카메라 앞에서 긴장해 빌런을 놓친 히어로부터 사소한 말실수로 공무원식 징계를 받은 히어로의 사례는
잔뜩 있었다.
남성들의 불만은 훨씬 적었다. 국가의 부름 때문에 공익 감투를 쓰더라도 결국 남자들이 하는 것은 사무
실에서 서류 정리하는 일. 사무직 5년을 채우면 그대로 남아 호봉을 인정받고 공무원이 되던가, 초능력자
전형으로 대기업 입사를 노릴 수 있으니 누가 불만을 가지겠는가?
하지만 그런 방식의 국가 방침이 불러온 결과가 있었으니
“무슨 서류가 이렇게 많아?”
“그러게, 이러니까 하린이가 돈 주고 사람 쓰라는 거였구나.”
무수히 많은, 서류의 산이었다.
사회 초년생이 세금 내는 법을 모르듯, 나와 소희도 히어로가 겸업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식이
없었다. 그 결과는 눈 앞에 수북하게 쌓인 서류의 산이 가볍게 표현을 해 주고 있었다. 증강현실 홀로그램
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직접 지장과 인주를 찍어야 하는 서류가 한 뼘 넘게 쌓여 있다니.
팔랑거리는 서류를 보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TV에 나와 컨셉을 자랑하던 히어로들, 단말기 화면 너머에
서 개인 방송을 촬영하는 히어로들, 연예계 활동을 시작하고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끼치는 모든 히어로
들은 전부 이 서류의 산을 거쳐 지나갔다는 것을.
그 와중에 소태 씹은 표정을 짓던 소희가 이하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지 영상 통화를 건다.
“그래서, 여기에 전부 예예예 하면 되는 거야?”
“아니, 수익 분배나 개인 정보 관련된 내역도 있어서 다 읽어보고 제대로 체크해야 된다. 그래서 사람 쓰
라는 거야. 거기 있는 서류가 요약본이거든.”
선명한 영상에서 들려오는 또렷한 목소리에 숨이 턱 막힌다. 말이 한 뼘이지 2천장은 가볍게 넘을 서류를
전부 읽고 서명해야 한다니? 심지어 내용을 알차게 꽉꽉 채워 넣었는지 서명란의 위치가 제각각 다르다.
맨 아래만 보고 넘길 수 없다는 소리.
“야이 씨, 이런 거 전문으로 해 주는 사람도 있나?”
“찾아보면 당연히 있지. 히어로 TV에서 방송하는 히어로가 몇 명인데 그걸 전문적으로 노리는 사람이 없
겠냐. 당장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우르르 나올 걸.”
통화 내용을 엿듣다 슬쩍 ‘히어로 서류 대행’을 검색했다. 그러자 H마켓에서 판매한다는 히어로 서류를
시작으로 다양한 계약 대행사들과 변호사들이 나온다. 무슨 영웅정보업자라는 생소한 직업이 등장하기
에 또 검색을 하니 히어로 협회에 허락을 받은 정식 업체라고 인증이 되어 있었다.
돈 버는 일에는 귀신같이 달려드는 사람들 때문인지 히어로와 관련된 서류 처리 대행은 생각보다 시장이
큰 것처럼 보였다. 당장 검색 결과만 보아도 다양한 분야로 나뉜 사무실들이 자신의 전화번호를 게재하
고 있었으니까.
“검색해서 개인 방송인 전문으로 찾아서 후기를 살펴봐. 다른 쪽은 몰라도 인터넷으로 먹고 살려는 애들
이니까 후기 하나는 솔직할 거야.”
“그건 그렇겠네.”
히어로 TV 공인 대행사, 남성 히어로 전문 대행인, HTV컨설턴트 등 거르고 걸러도 벌써 다섯 곳은 되는
회사가 있었다. 이 이후는 회사를 통해 계약한 이하린이 도와줄 수 없는 부분이고. 그래서 통화를 끊고 소
희와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눈다.
“히어로 TV 공인 대행사는 어때?”
“응, 리뷰는 엄청 많은 걸 봐서 규모는 큰데 서비스는 그럭 저럭? 남성 히어로 전문 대행인은 대놓고 남캠
만 취급하는 곳이고 HTV는 리뷰 수는 적은데 평은 좀 높네.”
슬쩍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자신들의 고객 중 뛰어난 사람들을 대문짝처럼 걸어 둔 게 보인다. 이름도, 얼
굴도 모르는 남자들이 웹 캠에 대고 얼짱 각도에 보정까지 받으면서 몸매와 얼굴을 자랑하는 프로필 사진
들이 잔뜩.
옆에서 대행사에 대해 열심히 검색하는 소희를 두고 남캠에 대해 슬쩍 찾아본다. 성인 방송 전문도 아니
고, 영웅 방송을 전문으로 하는 사이트인데 왜 남캠이 이렇게 많은 건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남성 히어로가 인기가 많은 거라면 이해라도 하지, 어중간한 C급 남성 히어로가 웹 캠 앞에서 섹시 댄스
를 추는 게 어째서 인기 방송국 랭킹에 들어 있는 거야. 슬쩍 아직까지 난리가 난 히어로 게시판에 검색을
해 본다.
원색적이고 본능적인 욕설의 향연 속에서 나는 결국 쓸만한 정보를 찾아 낸다.
원래의 세상에서 여캠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복합적이라 봐야 할 것이다. 음란한 것을 직접 원하는 성욕
부터 외모가 반반한 여성의 리액션을 보며 자신이 쥐락 펴락 한다는 우월감까지. 감히 한 문장으로도 표
현하기 힘든 다양한 요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쪽 세상에서의 남캠, 그 것도 히어로 남캠이 성공하는 이유는 한 문장은커녕 한 단어로 충분히
요약이 되었다.
정력.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초능력자들은 육체가 발달하였다. 염동력이나 화염 등 육체 강화가 아니더라도 C
급 정도가 되면 운동남 정도의 스펙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것은 남녀 역전 세계에서 아주 가치 있는 이
야기가 되었고.
몸 좋고 정력 좋은 게 확정인 미남들.
과거 현실에 예쁘장한 여캠 방송에 수천만원에서 억 단위의 돈을 쏟아 붓고 사적으로 만나는 큰 손 회장
들이 있었던 것과 같다. 이쪽 세상에서도 히어로 활동 보조금을 핑계로 사적 만남을 추구하는 여자 회장
들이 많을 테니까.
그러니까 쟤들이 웹 캠 앞에서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와중에 방송 제목에 지 초능력
을 떡 하니 박아 두겠지. 가장 인기가 좋은 남캠은 육체 강화 능력자였고, 그 다음이 염동력이 뒤를 따르
고 있었다.
몸에 근육이 거의 없어 보이는 슬랜더한 육체 강화 능력자가 바닥 매트에 누워 복근을 까고 허리 코어 운
동이라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다리를 허공에 쭉쭉 뻗는다. 반바지가 스르륵 내려가고 종아리와 허벅지
가 노출되자 채팅창에 흥분한 여성들이 난동을 피우고 현금이 팡팡 터져 나가는 움짤이 보인다.
그렇게 본래의 목적인 서류 대행사를 검색하는 것도 까먹고 게시판을 본다. 혼란한 와중 5700자 장문으
로 작성된 염동력을 가진 남자가 여성에게 성적 봉사를 해 주는, 섹드립 절절한 장문의 망상이 1분만에
삭제되는 것을 보고 이유를 완벽히 파악할 수 있었다. 촉수에 가능을 외치는 데이터 구매자가 있는 것처
럼, 염동력을 이용한 투명 남근으로 female:double_penetration을 꿈꾸는 여자가 있는 것도 이상하
지는 않을 것이다.
...이쪽 세상에서 뒤쪽은 어떤 취급을 받는 걸까.
소희의 야동은 대부분이 새신랑 순애물 중심이었고, 내가 지금까지 만난 여자들 중에서 뒤 쪽을 원하거
나 요구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곳이었다. 솔직히 소희가 내 뒤쪽에 흥미를 가
지는 꼴을 보느니 평생 모르고 싶기도 해.
관리자도 읽느라 느리게 지웠다! 같은 주장이 흘러가는 게시판을 종료하며 나는 마음 깊숙한 곳에 이 호
기심을 묻어 버리기로 결정했다.
[작품후기]
성좌물을 보면 성좌 중에 꼭 색기 담당 여캐가 하나쯤은 있지 않습니까
여신이나 서큐버스나 그런 포지션에 주인공이 들어가는거죠
남녀 역전 세상이라 색기 담당 남캐 같은 느낌으로
주인공이 원하는 걸 이루려면 후원하는 헌터가 강해져야 하는데
색기 담당 캐릭터라 후원하는 방식이 남녀역전 야쓰 각인거고
명예와 부가 목적인 욕정적인 누님
성좌를 신이라 생각하고 집착하며 헌신하는 광신도
성좌(주인공)한테 몸을 팔아 강함을 얻다 쾌락에 취하는 걸 느끼고 좌절하는 복수귀
그렇게 대충 설정을 잡고 써보려는데
스토리 잡기가 은근 어려운 것 같아서
요즘은 헌터물이랑 성좌물도 슬슬 찾아 보고 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