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벤트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졌더라. 그런 표현이 있다.
무명의 예술가들이 사소한 계기를 시작으로 명성을 널리 알릴 때 사용되던 말 아닐까. 30살에 예비 S급
히어로가 된 소희는 이 상황에 절절하게 어울리는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오, 저 사람이...”
“그 때 뉴스에서...”
소근소근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A급 히어로의 신분의로 순찰을 돌 때 느꼈던 것 보다 진득하고 끈
적한 시선들. 동네를 돌아다니는 A급 히어로와, 세계를 누비는 S급 히어로의 위용 차이는 단순히 한 계급
차이라고 말하기 힘든 수준이라서 그런지 더욱 시선이 쏠리는 것 같다.
애써 모여드는 시선을 무시하고 약속 장소로 향한다. S급 소식을 들은 지인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술자
리를 마련하려고 들었기 때문에 이제 이 쪽 술집이 익숙할 지경. 25년 모태솔로 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사
실과 한국 최초의 S급 히어로가 되었다는 것에 비슷하게 반응을 보여서 뭐라 말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뭐, 그게 놀람의 최대치였겠지.
...아니, 내가 애인 생긴 일이 그렇게 심하게 놀랄 일이라고? 곱씹어보니까 뭔가 이상한데.
그녀가 몰려오는 찝찝함을 애써 흘러 넘기며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타이밍 좋게 연락이 온다. 짜기라도
한 것처럼 띠링띠링 울리는 모습에 약간의 불안함이 느껴질 정도. 쓸데없는 곳에서 강하게 발휘되는 용
사의 직감에 따라 스윽 단말기를 확인한다.
- 야 나 오늘 못 감
- 언니 저두요
네 명중 두 명이 약속을 깨자는 말에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이유 없이 이럴 사람들은 아니니까 그대로 채
팅방을 살핀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세 번째 메시지도 곧바로 등장한다.
- 씨발
이 사람들이 진짜 왜 이러지.
- 왜요?
호기심에 한 마디 던졌더니 왁왁 문자가 미친듯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 왜긴 너때문이지
- 너 때문에 만나려다 너 때문에 깨진건데
- 이 와중에 너만 쉬냐
[협회 내 C급 이하 인원 비상 근무 제 5호 알림]
한 장의 사진이 올라오니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사진 속 서류 내용 대로라면 죄인은 그녀가 맞았으니까.
하필이면 세 명 전부 C급 사무직에 턱걸이를 한 사람들이라 할 말이 없어 후다닥 채팅방에서 나가버린다.
‘집에 그냥 들어가기는 좀 그런데...’
간만에 혼자 하는 외출인데 약속이 취소되었다고 털레털레 집으로 들어가기는 애매한 상황. 제 어린 애
인과 함께 하는 게 싫다는 것은 아니지만, 여자는 왠지 혼자 돌아다니고 싶은 날도 있는 법. 술 먹고 들어
가는 시간보다 일찍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마스크도 선글라스도 없이 돌아다녔더니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해 주저 없이 근처의 무인
식당으로 들어간다. 밥을 먹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굳이 붙잡으러 나오는 예의 없는 인간들은
없었다.
밥 대신 웨지 감자, 치즈 추가, 소시지 추가에 탄산 음료까지.
간식 보다 식사에 가까운 메뉴는 고등학교 운동부에서 한창 유행을 하던 메뉴였다. 한창 혈기왕성한 10
대의 소녀들, 그 것도 선수를 노리는 유도부의 소녀들에겐 정말 입가심거리 수준의 간식이라 식사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지만.
‘이 것도 거의 5년 만에 먹어보는데.’
투명한 유리창 너머에서 기계 팔이 또띠아 반죽을 주무르는 모습을 보며 스마트폰의 화면을 건드린다.
교복을 입은 남학생들이 연애 이야기로 재잘거리며 수다를 떨고 사원증을 목에 찬 사축이 축 늘어져서 감
자 튀김을 기다리는 좁은 공간. 그녀의 예민한 귓가에 온갖 수다가 전부 들려와 이어폰으로 귓구멍을 막
는다.
기이잉 소리와 함께 악마 표 스마트폰에 초 고화질 영상 로고와 함께 HERO TV라는 촌스러운 이름이 지
나간다. 10년 전부터 그녀가 애용해 온 사이트이자, 이제 그녀가 방송을 하게 될 사이트의 이름이.
‘내가 여기서 방송을 한다, 이거지. 방송을...’
히어로의 꿈을 꾸던 10대 소녀 시절, 그녀는 당연스럽게 히어로 TV의 애독자가 되었다. 다른 동영상 스
트리밍 사이트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히어로 TV는 이름 답게 초능력자들의 개인 방송을 지원한 최초의
사이트였으니까.
로고가 지나가고 난 뒤 등장하는 동영상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인기 동영상에는 잘 빠진 남자 히어로들의
쫙 달라붙는 슈트 시착 동영상부터 어딘가 익숙한 여성 히어로들의 대련 영상까지 잔뜩 올라와 있는 상
태.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잘 보니 그냥 아는 얼굴이었다. 최고 인기 검색어에 ‘S급 히어로’ ‘전소희’가 떡
하니 올라와 있었고 연관 검색어에는 ‘A급 히어로’ ‘사이드 킥’ ‘이하늘’ ‘이하린’ 하고 그녀가 아는 사람
들이 잔뜩 있었으니까.
그 와중에 이하늘과 이하린이 이름이 비슷하니 남매 아니냐고 물어보는 게시글이 몇 개 보여 그녀가 자연
스럽게 피식 웃게 만든다. 물론, 자신에게 시선이 쏠려 있다는 것을 곧바로 기억해낸 뒤 입꼬리를 후딱 내
려버렸지만.
사람들이 아무리 이해를 하고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지만, 남들 다 보는데 휴대폰 화면 들여다보며 실실
웃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는 것이 사람 마음 아니겠는가.
소희의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인기 급상승 동영상으로 향한다. 키가 하늘이보다 조금 큰, 근육질의 남성
이 쫙 달라붙는 슈트를 꼬집어 보며 과장된 리액션을 보이는 영상. 애인 있는 여자가 으레 그러한 것처럼
그녀도 노출 있는 남자의 동영상을 보는 것에 애매모호한 생각이 들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 회사의 제품은 그녀가 성인이 되고 나서 히어로를 꿈꿀 때 원하던 장비였으니까. 허벅지에 쫙 달라붙
는 7부 반바지에 배꼽이 드러날랑 말랑 하는 셔츠를 입은 남성이 화면 속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
한다.
충격량이 어쩌구, 초능력 발현이 저쩌구, 속성 방어가 이러쿵, 완충제가 저러쿵. 화면 속 남자가 열심히
설명하지만 멍하니 바라보는 소희는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피부는 하늘이가 훨씬 좋네, 근육이 있다지만 등 라인 빠진 것도 비교가 안되고...’
슬그머니 드러나는 복근과 아랫배, 탄탄한 허벅지와 종아리, 슈트를 꼬집어 움직여 보이는 팔뚝을 보며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애인의 나신이라니. 별 문제없는 영상이지만 왠지 공공장소에서 음란물을 보는 기분
이 들어 후다닥 재생을 종료하고 다른 동영상을 재생시킨다.
[한국 최초의 S급 히어로 등장... 동아시아의 정세는?!]
왜 인기 급상승인가 했더니 국뽕 코인이라 다시 넘기고
[최초의 S급 히어로, 그 능력은 무려 XX?!]
협회에서 제대로 측정도 안한 용사의 능력을 벌써 알아챌 리 없어서 넘기고
[B급 사이드 킥이 S급 히어로와 붙어 있는 이유는?]
역시 영상에 아무런 정보 없이 추측만 늘어놓아서 종료했다. 히어로들의 대련 영상이나 출동 영상을 제
외한다면 대부분의 것들이 자극적인 컨텐츠로 시청자들을 끌어들이려는 실속 없는 어그로 영상들 뿐.
실시간 인기 급상승 동영상을 치워버리고 조회수가 가장 많은 히어로 태그의 동영상을 찾는다. 이번에
나오는 것은 또 다시 익숙한 얼굴. 심지어 익숙한 수준이 아닌 얼굴들도 있었다. 바로 자신과 하늘이의 얼
굴.
화들짝 놀라 동영상을 재생해 보니 교복에서 대련복으로 갈아 입은 하늘이가 영상 초반에 나온다. 이전
학교에서 허락을 받고 찍었던 동영상들을 올렸구나.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A급 히어로 겸 연예
인이니까 히어로 TV에 채널을 가지고 있는 게 당연하지.
영상도 깔끔하고 대련에 대한 설명도 자세하게 되어 있었다. 댓글란도 쓸모 없는 것이 아니라 나름 무술
을 배우거나 히어로 현역인 사람들이 진지하게 토론하고 있는 상태. 그렇기에 집으로 돌아 가는 길에 전
화번호부에서 이하린을 찾아 전화를 건다.
“무슨 일이야?”
“야, 너 히어로 TV 채널 관리 누구한테 맡겼냐?”
“너도 방송하게? 나야 소속사랑 매니저가 있어서 거기 연줄로 전문가 찾아 붙였지. 너도 채널 만들 거면
어중간하게 시작하지 말고 전문가 찾아서 고용하고 시작해. 돈이 궁하지는 않을 거 아니야. 솔직히 S급이
돈 벌려고 방송하는 것도 아닐테고.”
“그치, 돈 때문은 아니지.”
어둑어둑해진 거리를 걷는다. 해가 저물고 가로등의 불 빛이 켜지기 직전의 거리에서 그녀의 얼굴을 알
아보고 길을 막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마음 편히 이하린과 통화를 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히어로 TV의 동영상 알고리즘, 히어로 신분을 인증하면 받는 혜택, 영상 편집 전문가를 소개시켜 줄 수
있는 인맥. 그리고 협회에 신청해야 하는 많은 것들. 출동할 때 바디 캠을 달고 카메라 우먼, 아니 카메라
맨으로 하늘이를 데려갈 생각 밖에 없었지만 세상은 이토록 사소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생각해보면 귀찮은 서류들, 대부분 가족들이나 선배들이 대신 처리해 준 게 참 많았지. 어째서인지 몰려
오는 창피함에 마른 세수를 몇 번 하고 현관문을 여니 소파에서 일어나던 하늘이와 눈이 딱 마주친다.
"다녀왔어~"
"생각보다 일찍 왔네?"
[작품후기]
글이 잘 안써질 땐 다른 글을 끄적여봅니다.
이거 어떻게든 완결내고 다음 작품으로 남녀역전 + 성좌물로
주인공이 성좌가 되서 여캐들 후원하는 글 써보고 싶은데
이 글 연재 속도를 보면 거의 년 단위로 밀리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