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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이 없어 무료하게 있다 보면 머리속으로 해야 할 일 리스트를 정리하게 된다. 게임을 하면서 공략을
정리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봐야 할까. 아니, 아니지. 원래 현실에서 해야 할 일을 정리하던 습관이 게임에
서도 나타나는 게 정상인가?
다국적 빌런 연합은 일단 꼬리를 자르고 잠적해서 조용해진 대신, 아마이몬의 개인적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소희의 S급 히어로 발표는 아직까지도 지진부진 한 게 S급 히어로가 없는 일본이 필
사적으로 물고 늘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본디 S급 히어로는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는 게 아니다 보니 더 오래 걸리는 것 같다. 정체를 숨긴 국가의
비밀 병기 같은 느낌이여야 하는데 국제 뉴스를 쫙 타서 신상정보를 전부 까발렸으니 뭐, 어쩌겠는가? 논
의가 길어지는 이유에 이러한 점도 포함되겠지.
S급과 대등하게 싸운 것 만으로도 S라 봐야 하는가. 소희의 초능력의 정확한 정체가 무엇인가. S급 히어
로가 되기 위해 초능력 말고 인성 등 자잘한 것들도 충족하고 있는가. 정체를 드러냈음에도 S급 선언을
해도 되는가. 왜 그녀가 일본해까지 가서 포경선과 접촉해 이사벨라와 싸웠는가.
이런 수십 수백가지 논의를 진행하고 있으니, 고작 몇 달은 짧다고 봐도 좋을까. 거기에 이번 마약 사태도
협회의 일 아니겠는가. 여파만으로 사람을 변이 시키고 미치게 만드는데 그게 테러에 쓰이면 좀비 아포
칼립스가 일어나는 것은 시간 문제.
우연으로 만들어진 물건이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고 하지만, 가능성의 문제다. 다국적 빌런 연합의 마
약을 재료로 삼아, 어떻게 뭔가를 만들면 지구를 멸망시키는 좀비 바이러스를 생산할 수 있다는 소리인
데 이게 얼마나 끔찍한 이야기인가. 아마 히어로 관련된 사무직 직원들은 피를 토하며 하루에 20시간씩
은 근무하고 있을 것이다.
‘솔직히 지루하긴 해.’
그나마 문명 세계라서 인터넷 웹 서핑이라도 할 수 있지, 중세 시대나 무림 세계에서 지루함 때문에 게임
을 종료한 적이 꽤나 많았다. 시간 배율상 자동 진행 같은 편법도 있지만, 데이터를 돈 받고 팔아먹어야
하는데 자동 진행을 하다 잘못되면 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니까.
[도둑 잡다 과실치사 떴다]
└ 법 개정되고 엥간해선 과실치사 안 뜰 텐데 뭐했음?
└ 위협 사격 쐈더니 보도블럭 파편이 도망치던 놈 뒤통수에 맞음;;
└ 어떤 병신이 허공도 아니고 보도블럭에 쏘냐?
└ 년 아니라 놈? 벌금으로 안 끝나겠네
인터넷에 올라온 다양한 글들은 서적이나 방송보다 훨씬 이 세상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준다.
[B급 올라가서 인생 개꿀빨고싶다]
[남고생 일찐한테 삥뜯기고 싶다]
[A급 히어로 되서 한일 친선교류전 박살내고싶다]
[헬스장 오빠한테 깔리고 싶다]
[좀비남 하나 지하실에서 사육하고 싶다]
필터가 없거든.
히어로 공인 커뮤니티 임에도 불구하고 수위를 넘기는 글들이 우후죽순 솟아난다. S급 히어로의 등장 가
능성과 한국을 노린 빌런의 자멸, 인간을 변이 좀비로 만드는 약물의 등장이 맞물려서 기묘한 열기를 띄
고 있으니까. 웹 페이지를 갱신할 때 마다 온갖 글이 난무하는 상황. 관리를 사람이 하는지 A.I.가 하는지
는 몰라도 관리 인력이 부족한 것이 빤히 보인다.
아무 의미 없는 섹드립 글과 S급 히어로의 등장이 한국의 히어로 정책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토론하는
글이 동시에 올라오는 모습은 언제 봐도 혼란스럽단 말이지. 어느 세상을 가도 저런 놈들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표현했기 때문일까.
여기서는 년들인가?
그 와중에 내가 언급된 글이 있어 내 이름, 소희 이름을 검색했다 질퍽한 섹드립의 향연을 보았다. 남녀
역전 세계 답게 소희가 나의 정액통이 아니라 내가 소희의 정액통이 되어 있다는 글 말고는 읽기도 전에
전부 삭제되었지만. 아무리 사람이 부족해도 S급 히어로가 될 사람과, 그녀의 사이드 킥에게 섹드립을 박
아버리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걸까.
인터넷 섹무새들의 성별 고찰 따위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내가 능동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이라
면 모를까, 전부 연락이 오기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백씨 자매가 그렇고, 아마이몬의 거래도 소희의 희
생양이 될 빌런도.
아니지, 그냥 내가 빌런 하나를 잡아와 볼까?
뿌쓩빠쓩 병신 TV를 운영하는 애들이 맨날 하는 짓 아니던가. 조회수 빨아먹으려고 자극적인 조작하기.
적당히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에서 빌런을 수입해 오는 거지. 중국 하면 인구수 아니겠는가. 사람이 그렇
게 많은데 빌런도 많을 것이고, 벨제붑이 꽉 잡고 있으니 정치적으로 문제될 일도 없을 것이다.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은 지루하다. 물론 내 멋대로 빌런을 데려왔다가 일이 겹치고 꼬이면 귀찮겠지만,
내가 언제 그렇게 모든 것을 계획 아래에 두고 게임을 했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니 타이밍 좋게 현관
에서 벨소리가 울린다.
“다녀왔어~”
“생각보다 일찍 왔네?”
개인적인 볼일이 있다며 외출을 한 소희가 돌아온 것이었다. 신발을 대충 벗어 던진 소희가 곧바로 화장
실로 들어갔기에 소파에 드러 누운 상태로 기다린다.
“뭐, 이야기할 거 있어?”
화장실에서 물 묻은 손을 대충 털고 나오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가 먼저 물어본다.
“누나, 방송 어떻게 할래?”
“방송? 그거 하기로 했지... 그러네, 빌런이 자멸했구나.”
얼굴 옆에 소희의 빵빵한 엉덩이가 털썩 주저앉는다. 역시나 출렁임 하나 없는 소파에 조금은 감탄을 하
며 생각하던 것을 이야기했다. 애초에 방송의 주인공이 될 사람은 소희였으니까.
“그래서 누나, 방송을 위해 빌런을 계속 기다리는 것 보다는 빌런을 찾아올까 생각했거든.”
“찾아와?”
“응, 악마랑 계약한 애들 중에서 질이 나쁜 놈들을 골라서 받아 내려고.”
뭐, 사실 조금 귀찮아서 그렇기도 했다. 이쪽 세상 인터넷을 백날 들여다본다 해도 나는 경력이 5년도 되
지 않으니까. 아무리 인터넷 커뮤니티에 별 관심이 없다 해도 온라인 게임을 몇 년 동안 꾸준히 즐겨온 소
희가 더 잘 알지 않을까? 아니면 소희의 선배 후배가 말이야.
재능도 센스도 없는 구세대가 젊어 보이는 척하며 만든 동영상이 어떻게 되는지는 뼈가 시릴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아, 그러네. 악마랑 계약한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긴 하겠다.”
“아니면 뭐, 중국에서 체포한 빌런을 받아와도 되고.”
“그런데 꼭 받아와야 하나?”
“음?”
갑작스러운 말에 목을 꺾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소파에 푹 눌린 통통한 허벅지 너머로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소희의 얼굴이 보인다.
“아니 뭐, 애초에 영해에서 시작된 일인데 꼭 한국에 있어야 하나 싶어서. 악마들이랑 거래하면 어차피
외국도 쏙쏙 다닐 수 있는데 직접 가서 때려잡아도 누가 뭐라고 하겠어?”
소희의 말에 눈이 번쩍 뜨인다. 하기에 소희가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S급 히어로가 빌런을 잡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빌런을 잡아서 한국에서 방송을 찍는 것 보다는 빌런이 등장하는 해외를 강습하
는 방송이 더 잘나가긴 할 것이다.
“하긴 그러네. 괜찮겠어?”
“응, 뭐가?”
잘빠진 허벅지에 출렁이는 가슴. 여성스럽기 그지없는 몸매와 약간 허당의 기운이 느껴지는 성격 때문에
자꾸 까먹게 된다. 이쪽 세계의 여성은 내가 아는 여성과 확 다른 존재라는 것을. 나는 소희가 해외에 멋
대로 나가서 히어로 행위를 해도 괜찮을까? 라고 걱정할 줄 알았다.
히어로 협회가 범 국제적인 단체라고 하지만, 한국에 일본에 중국에 따로따로 존재하지 않던가. 그런 상
황에서 한국과 외국을 제 멋대로 돌아다녀도 되나? 같은 생각이 들어 몰래 빌런을 한국으로 데려오려는
생각이었는데.
“누가 S급 히어로한테 뭐라 하겠어. A급 히어로만 되어도 면책 특권이 얼마나 있는데. 그리고 S급 히어
로가 자기 나라 빌런을 잡아줬는데 그거에 딴지 걸면 바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날 걸? 그러니까 빌런을 찾
아오는 것 보다 우리가 외국으로 출동하는 게 더 편할 거야.”
이쪽 세상의 여성은 내가 생각한 것 보다 화끈했고, 히어로의 권한 또한 화끈했다.
면책 특권이라니, 그 정도면 아이돌이 아니라 외교관이나 국회의원 아닌가? 생각해보면 국제 교류 때 실
제로 나가는 게 A급 히어로들이니 외교관 면책 특권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긴 하네.
하긴, S급 히어로 딱지를 달고 있는 이사벨라만 보아도 그렇다. 브라질 열대 우림의 재개발 부터, 일본의
고래잡이 포경선까지 전 세계를 제 멋대로 돌아다니는데 제제를 가하는 나라 따위는 없었다. 과격한 활
동으로 에코 테러리스트 소리까지 들어도 빌런은 아니니까.
묘하게 납득이 가는 소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방송 찍는 것에 별로 적극적이지 않던 소희가 외국까
지 나가는 방송을 찍겠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은 조금 어리둥절한 상황이긴 하지만 나쁜 건 아니니까.
갑자기 적극적으로 변한 이유가 궁금하긴 한데, 별 것 없을 거 같아서 그냥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