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벤트
두근거리는 심장소리에 맞춰 온 몸을 돌아다니는 따듯한 피, 그로 인해 말랑말랑한 살갗과 따스한 체온
까지. 두 명의 육체를 세포 단위로 뜯어보아도 멀쩡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게 능력의 소실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나 보다.
“모여, 모여, 모엿!”
이소정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자 각양각색의 괴성을 내지르던 변이체들이 옹기종기 모여든다.
고기 완자마냥 둥글게 부푼 녀석부터 엿가락처럼 쭉쭉 늘어진 녀석까지, 공포 영화에서 나올 법한 시체
들이 어기적거리며 모여 있는 광경은 미관상으로 참 나쁘다고 생각되지만 어쩌겠는가? 이걸 그냥 두고
가면 놀라서 조사가 들어올 텐데.
빌런 조직의 근거지 답게 전파 차단까지 되어버린 섬에서, 기괴하게 뒤틀린 시체들이 민간인들을 잡아먹
는 광경은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물론 감염체 하나 있다고 나를 바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작 쫄따구 하나 생포한다고 바로 추적이
되면 누가 흡혈귀를 하겠는가? 그래도 0.01%보다는 0%가 깔끔하니까 이 고생을 하는거지. 사실 고생
도 내가 아니라 이소정이 하는 거고.
아무리 작은 섬이라 해도 휴양지로 개발되어 빌런의 주둔지로 쓰이는 곳이다 보니, 구석구석 돌아다니려
면 반나절은 걸릴 것이다. 강화된 육체가 있다 해도 건물 구석 구석을 돌아다니는 게 편한 일은 아니니까.
“아, 저쪽 건물 잔해 밑에 지하실 있다.”
“그래? 가서 열어.”
지상에서 한 뼘 동실 떠오른 김세민이 어느 한 곳을 지목하면, 이소정이 시체들의 등을 툭 떠민다. 그러면
몸이 이리 저리 찢기고 부러지면서도 시체들이 건물을 무너트리고 잔해를 치워 그 안에 숨어 있던 사람들
을 사냥하는 방식.
“사, 살려주세요 제발!”
“아, 안돼! 문이 열렸어!”
※
변이한 시체들을 모으고, 생존자들을 처리하고, 섬에 불을 지르고 마법을 걸어 흔적까지 지워버렸다. 하
지만 나도, 두 명도 미처 생각치도 못한 부분이 있었다.
“거래, 감사합니다!”
“그래... 뒤처리나 잘 부탁해.”
바로, 집에 가는 방법이었다.
포탈을 여는 초능력자가 죽었는데 포탈이 남아 있을 리 있나. 섬에 있는 민간인을 싸그리 죽어버리고서
정기적으로 오는 배를 기다릴 수도 없고, 몰래 밀항이라도 하자니 두 명의 능력이 은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상황. 매혹을 사용하면 방법은 있겠지만 쉽게 가는 길을 내버려 두고 어렵게 갈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악마를 불렀다.
해외에서 영역을 만든 탐욕의 아마이몬에게 거래를 거는 것으로 대부분의 것이 해결되니 뭣 하러 아등바
등 돌아다니겠는가. 아마이몬의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주게 되었지만 그 댓가로 집에 보내 주고 섬의 흔
적도 지워준다니 꺼릴 이유가 없었다.
이제 저 섬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은, 서울을 침략하려던 빌런 조직이 마약을 잘못 다뤄 폭주한 결과가 될
것이다. 심지어 그 결과는 악마의 마법이나 계략에 의해 발생되는 것은 아니다.
돈, 압도적으로 강한 금력.
중국 중앙 정부와 손을 잡은 폭식의 벨제붑처럼, 탐욕의 아마이몬은 유럽 연합과 미국을 오가며 주식 시
장과 해외 대기업들을 손에 쥐고 있었으니까. 고풍스러운 안부 인사랍시고 편지와 함께 억 단위의 수표
를 보내는 녀석이, 고작 매스컴에 휘둘릴 리 있나.
아마이몬의 부하를 자칭하는 양복 차림의 여성형 악마가 양 손으로 정중하게 가방 같은 것을 들어 올리니
꼬부랑 글씨가 난무하는 뉴스 채널이 보인다. 역시나 성능 좋은 번역기가 이탈리아어를 번역해준다고 곧
바로 알려온다.
다국적 빌런 연합이 취급하는 신종 마약이 초능력을 폭주 시켜 육체까지 변이하게 된다는 내용의 중대 발
표였다. 마이크를 잡은 중년의 여성 앞에서 세계 각국의 기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모습이 가방
에서 뿜어져 나온 홀로그램으로 생중계되고 있는 것이다.
왁왁, 기자들이 침을 튀기다 못해 거품을 물 정도로 달려든다. 마이크를 잡은 여성과, 그 옆에 서 있던 남
성이 양 손을 들어올리고 커다란 제스쳐로 사람들을 진정시키려 들지만 이게 어디 보통 사안이던가.
초능력은 결국 정신 상태와 관련이 있기에 뇌와 신경계를 건드려 초능력이 폭주하는 마약은 많았다. 육
체 변화와 관련된 초능력 연구 때문에 인간의 육체를 변형시키는 사건도 가끔 있긴 했었다. 하지만 직접
복용도 아니고 여파만으로 인간을 변이 시키고 섬을 멸망시키는 마약이라니, 이 무슨 끔찍한 이야기인
가.
뭐, 그런 약은 존재하지도 않지만...
어찌나 기자들이 맹목적으로 달려드는지 그 성능 좋은 번역기가 지직거리며 번역을 못하고 있었다. 덕분
에 알아듣지도 못하는 외국어가 귓가에 짜증날 정도로 울려 퍼져서 인상을 찡그렸다. 나닛? 하는 소리나
워 씽 뭐시기 하는 일본어나 중국어도 들린 것 같고, 그 사이에서 씨벌! 하는 익숙한 감탄사도 들린 것 같
은데.
악마의 힘이 아니라 돈의 힘으로 조작되었으니 천사들이 알아 차릴 이유도 없고, 조작을 한 것도 유럽과
미국에 근간을 둔 아마이몬이니 초능력 조사관들이 머나먼 한국까지 날아와 소희를 귀찮게 만들 이유도
없겠지. 지금으로서는 퍽이나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그런데 방송은 어쩌지?’
아퀼라가 죽음으로써 자연스럽게 순찰도 취소되었겠다, 외출한 소희를 기다리며 소파에 드러누워 머리
를 굴리지만 명확한 답은 나오질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방송을 일찍 시작하면 좋다. 마왕은 반드시
등장할 테니 일찍 시작할수록 소희의 인지도를 많이 끌어올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방송의 첫 희생양이 되어야 할 아퀼라가 저렇게 허무하게 죽었다. 세상 사람들은, 특히 한국 사람
들은 저 미친 빌런이 대한민국 한복판에 민폐를 끼치지 않고 넘어오기 직전에 죽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는 상황.
이런 상황이라면 S급 히어로의 방송도 묻혀버린다. 한국 최초의 S급 히어로라는 주제도 무겁지만, 세상
에 처음으로 등장한 끔찍한 마약이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터질 뻔했다는 주제도 무거우니까. 아무리 방송
경험이 없다지만 영화나 게임이나 음악이 이슈가 없는 타이밍에 발표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다음 빌런을 기다리자니 너무 긴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고등학교 테러 이후 아퀼라가 한반도를 욕심내
기까지 4년의 시간이 흘렀으니까. 한국을 흔들 수 있는 A급 이상의 거대 빌런이 어디 이벤트 보스도 아니
고 꼬박꼬박 등장할 리 있나.
다음을 기다리면 년 단위를 훌쩍 넘길지도 몰라.
조금 어처구니없지만 합리적인 걱정이었다. 이 세상이 진짜 게임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세
상이 게임처럼 돌아가고 온갖 곳에 게임의 흔적이 잔뜩 남아 있지만 확신은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솔직히
뇌만 쏙 뽑혀서 게임 속 데이터 쪼가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이제 뭘 하지?’
소파에 드러누워 기지개를 펴니 어느새 악마는 온데간데없었다.
뭐, 이 세상이 게임이던 아니던 간에 뇌리에 박힌 물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효율을 지독하리 만치 따지던
게이머의 습관이었다. 만약 이 세상에 떨어지기 전, 인생을 이토록 효율적으로 사용했더라면 닭장같은
기숙사에 사는 노동자 계급이 아니라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을지도 모르겠다.
올라가 봐야 회사 봉급으로 얻는 돈이 데이터 팔아서 돈보다 훨씬 적을 테니까 미련도 없긴 하지만. 그래
도 누워서 쉰답시고 몸을 늘어트려도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 침공 계획
이 사실이었고, 코 앞까지 다가왔던 침략이 사고로 취소되었다는 것에 히어로들이 기뻐하고 있어서 그런
지 B급 이하의 잡범들도 얌전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야 그럴 게, 법이 완벽한 것도 아니고 결국 제압은 히어로가 하는 것이니까.
이런 타이밍에 괜히 나대다가는 팔목에 수갑이 아니라 팔다리에 깁스를 차고 체포당할 수 있었다. 타이
밍을 잘못 맞추면 히어로의 손속도 매서워지는 걸 아는 빌런들은 제 몸 사리는 것 하나는 자신 있는지 나
타나질 않는다. 물론 소매치기나 좀도둑, 인터넷 거래 사기 같은 되게 사소한 년들은 계속 등장해 경찰들
을 바쁘게 만들고 있긴 한데... 그런 걸로 S급 히어로가 후다닥 달려 나가긴 좀 그렇지.
솔직히 그렇잖아, 전 세계 사람들이 다 볼 히어로 채널을 만들 건데, 첫 동영상이 ‘중고거래 5만원 사기를
쳤더니 S급 히어로가 등장?!’ 같은 거면 체면이 안 살지. 차라리 아마이몬이 부탁하는 내용이 A급을 넘긴
거물 빌런을 잡아와 달라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 같아서는 가벼운 동영상도 마구잡이로 찍어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역효과
가 날 것 같아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 최초의 S급 히어로로 시작하여, 지구를 구원하는 단 한 명의 용
사가 될 소희였다.
너무 신성시되면 곤란하지만, 히어로의 이미지가 가벼워지는 것도 문제가 있다. 용사와 마왕은 결국 인
간의 감정을 받아먹고 강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