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8화 (178/189)

새로운 이벤트

세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가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며 상점 안으로 들어간다. 예쁘게 깔린 자갈

길에서 잘그락 거리는 작은 소음이 나자 몸이 뻣뻣하게 굳으며 주변을 둘러보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참으로 신중하기 그지없다.

‘정말 이 쪽이 안전한 거 맞아?’

‘맞다니까, 종업원 옷차림을 한 좀비가 밖으로 나가는 걸 봤어. 이 가게는 종업원이 하나라구.’

속닥거리는 네 남녀의 모습을 보아하니 처음부터 일행으로 여행을 온 걸까.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모

습에 흥미가 생겨 몰래 따라가며 관찰을 한다. 여기 있는 네 명 말고 모든 생존자는 전부 무능력자인지라

들킬 걱정이 없었다.

‘통조림 찾았어’

‘소리 안 나게 테이프로 잘 묶어서 가방에 담아.’

여자 셋은 나름 팔뚝에 은근한 근육도 있고, 봉이나 망치를 든 자세가 안정되어 있었다. 남자는 손에 든

방망이가 어색한지 계속 손가락이 꿈지럭거리지만 여자들 보다는 훨씬 머리가 좋은 건지 이런 저런 명령

을 내리는 상태.

돌조각을 던져 좀비들을 유인하고, 식료품과 물을 챙겨서, 소음이 나지 않도록 테이프로 단단히 묶는 모

습까지 보면 좀비 아포칼립스를 대비하던 사람들의 모습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순조로운 생존도 잠시.

“어, 뒤, 뒤에!”

“큰 소리 내지, 마아악!”

소근거리던 것도 잊고 남자가 크게 소리를 치자, 여자들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본다. 그와 동시에 여성

들의 등 뒤에 있던 좀비가 우드득 뼛소리를 내며 몸을 길게 늘린다. 기괴하게 반죽된 찰흙 덩이처럼 늘어

난 모가지가 사람의 어깨와 머리를 덥석 덥석 베어 문다.

“아, 아악! 앤! 괴물이 앤을!”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섬 중앙에서부터 기묘한 파장이 느껴지더니 좀비들이 변이하기 시작한다. 몸이 늘어나는 놈 말고도 근육

이 울룩 불룩 솟아나서 콘크리트 담장을 부수는 녀석부터 입에서 불이나 독을 뱉는 녀석까지.

그와 동시에 멍청한 좀비들을 따돌리고 식료품을 모으거나 숨어 있던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울린다. 걷는

것 밖에 못하던 좀비들이 갑자기 초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B급 좀비 영화는커녕 C급 판타지 영화를 보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전개가 일어나며 어떻게든 숨어 있던 사

람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 모습에 나는 구경하는 것을 포기하고 섬의 중심으로 향했다. 예쁘장한

자갈길의 자갈이 총알처럼 허공으로 치솟고, 잘 가꿔진 정원이 불살라지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섬의 중앙에 있는 것은 지하의 빌런 아지트가 아닌 예쁘장하게 잘 꾸며진 대 저택이었다. 높이는 3층뿐이

지만 양 옆으로 쫙 펼쳐진 꼴이, 방만 100개는 넘을 것 같은 거대한 저택. 사람 사는 건물 보다는 거의 박

물관에 맞먹는 크기의 대 저택 안에서 익숙한 기운 두 개가 느껴진다.

반쯤 열린 쇠창살 문을 대충 걷어차고 저택 정원으로 들어간다. 정원 안에서 정원사였던 좀비들이 비틀

거리며 걸어 다니다 내 기척을 느끼고는 반대쪽으로 도망친다. 밀짚모자에 정원 가위, 실톱을 들고 느릿

하게 도망치는 모습을 보니 대충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슬슬 감이 잡힐 것 같기도 하고.

초능력자들은 좀비가 되었다. 일반인들은 좀비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보낸 두 명은, 저택의 엉뚱한 곳에 처박혀 있다.

반쯤 부셔진 커다란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 샹들리에가 떨어지며 막혀 있는 계단 위로 날아올라 복도로

향했다. 호텔 복도처럼 고풍스러운 방문이 잔뜩 있는 복도에도 좀비들이 열심히 걸어 다니고 있었다.

마치 살충제를 피해서 도망치는 벌레 무리 같은 모습에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지만 중요한 것은 좀비들이

아니었다. 회의실 겸 연회장으로 쓰이는 2층의 거대한 방에서 느껴지는 김세민과 이소정의 기운.

텔레파시도 통하지 않고 연락도 끊겼길래 무슨 일이 벌어졌나 했더니...

손톱으로 긁은 듯 흠집이 잔뜩 난 연회장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그 안에는 거대한 고치가 둘 있었다.

두근 두근, 살아 있는 것처럼 박자에 맞춰 느릿하게 약동하는 커다란 고치가. 고치가 내뿜는 파장은 너무

나 익숙한 힘이었다.

나와 소희, 그러니까 흡혈귀와 용사의 힘이 뒤섞인 애매모호한 힘. 내가 변종이라 부르는 처음 겪는 현상

의 에너지가 고치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으니까. 작정하고 머리를 굴리니 지금 상황이 대충 이해가 되

기 시작했다.

용사의 피는 일종의 레벨 업 포션이다. 단지 효과가 너무 뛰어나 과도한 경험치를 담고 있을 뿐. 인간에게

산소가 필요하다 해서 농축 산소를 20L 정도 다이렉트로 폐에 박아버리면 인간이 어떻게 될 까? 풍선처

럼 팡! 하고 터지겠지.

에너지를 뿜어내는 고치. 저걸 고치라 불러도 될 지 궁금하긴 하지만 뭐, 안에 들어 있는 게 두 사람이니

까 상관없겠지. 벌레의 고치보다는 대한민국의 전자민속놀이의 한 종족을 닮은 기괴한 살덩어리가 꿈틀

거리며 심장 박동처럼 에너지의 파동을 내뿜는다.

‘대충 빨아내면 되려나?’

딱 봐도 에너지가 넘쳐나서 터지기 직전이라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펑! 터지지 않기

위해서 에너지를 뿜어내면, 그 에너지 파장에 맞은 다른 놈들이 픽픽 쓰러져서 변이를 하는 꼴. 소희에게

익숙할수록 후유증이 적고, 소희를 만나본 적 없는 놈들은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죽는 것이었다.

결국 내 진화 때문에 섬 하나가 멸망하는 꼴이었지만, 용사는 내가 아니라 소희니까 별 상관없지 않을까.

죄책감을 느끼기에는 게임을 너무 많이 했지. 그런 생각을 하며 손톱으로 포장을 뜯는 것처럼 고치를 열

어보니 멀쩡한 두 명이 보인다.

그러니까 멀쩡한, 사람 모습으로 멀쩡한.

“이건 또 뭐여, 씨발.”

반투명한 모습도, 새하얀 뼈 갑옷도 없이 그냥 멀쩡한 여대생 둘이 알몸으로 엉켜 있었다. 이제는 내가 알

고 있는 지식을 사용조차 할 수 없는 상황. 언데드가 진화해서 사람이 된다는 소리는 말린 생선을 요리해

서 살아 있는 생선으로 되돌리는 것과 똑같은 개소리인데.

“이것이 진정한 낙수 효과인가...”

그런 모습을 보니 반사적으로 입에서 개소리가 튀어나온다. 맨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소희, 나, 굴라 두

명, 초능력자들, 민간인 순서대로. 아래쪽의 초능력자와 민간인들이 낙수를 견디다 못해 죽어 버리긴 했

지만.

아무튼 그 개소리가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가락을 뻗어본다. 말랑말랑한 가슴, 쿵쿵 파동에 맞춰 거칠게 뛰고 있는 심장 박동.

그리고 땀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액체 때문에 살짝 매끈하면서 보드라운 피부까지. 그저 땀 흘리고 있는 미

녀일 뿐이었다.

뭘 어떻게 진화하면 굴라가 인간이 되는 거지. 내가 아무리 변종이 되고 진화를 한다 해도 계속 흡혈귀인

데. 감염되지 않은 순수한 인간 부하가 생기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고민은 잠시, 계속 고치를 흔들며 밖으로 나오는 파동을 보니 시간이 얼마 없었다. 꿈틀거리는게

정말 우화 직전의 번데기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터지기 직전의 폭탄을 보는 것 같기도 했으니까.

나는 그대로 알몸의 여자 사이로 파고든 다음 눈을 감았다.

자그마한 침대, 책가방에서 쏟아져 나온 책이 어지러운 책상과 참고서가 가득한 책장. 침대에서 발만 쭉

뻗어도 닿을 지경으로 좁은 방. 그 곳 침대에 누워 있으니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숙사?’

어딘가 했더니 김세민을 따라 들어갔던 그녀의 숙소 방이었다. 이 세상에 떨어져서 남녀역전인 것도 모

르고 여자 애를 꼬셨다고 생각하던 그 장소. 흡혈을 하고 섹스를 했어도 염동력 사거리 10m가 채 되지 않

아 비실대던 일종의 스타팅 지역이자 튜토리얼 존.

고치 속에서 두 명의 꿈 속으로 들어왔는데 왜 여기에 있나 싶었지만,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물 흐르는 소

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김세민의 머리 속에는 이 첫날밤이 무엇보다 강력하게 박혀 있었다는 것을.

“기, 기다렸어?”

샤워를 끝내고 수건으로 머리를 슥슥 묶으며 들어오는 김세민의 모습은 어중간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전

체적인 몸매나 키는 고등학생 버전이지만, 흡혈 때문에 외모 보정이 들어간 모습. 이 것이 그녀의 꿈이기

때문일까?

마찬가지로 침대 위에서 헐벗은 채 앉아 있던 내 모습도 현실보다 더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딱 진화 이전

의 모습, 그러니까 내가 소희를 만나기 이전의 모습에 약간의 필터를 씌운 모습으로. 먼저 샤워라도 했는

지 내 몸에도 물기가 좀 있었다.

몽마의 마법으로 남의 꿈에 들어갔을 때, 원래대로라면 내 맘대로 꿈을 다룰 수 있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

았다. 아무리 후유증에 시달리고, 진화의 여파 때문에 고치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지만 김세민과 이소정

도 간접적으로 소희의 피를 받았기 때문일까?

뭐, 어찌 되었던 나쁜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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