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7화 (177/189)

새로운 이벤트

악마적인 건강식품의 힘으로 과도한 진화의 후유증을 무사히 떨쳐낸 내게 닥쳐온 것은 끔찍하기 그지없

는 머리 쓰는 일이었다. 사람은 가끔 머리로는 무언가를 해야 한 다는 것을 알아도 가슴으로는 거부할 때

가 있는 법인데, 지금 내가 그랬다.

육체에 힘이 넘치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한 가득 차오르지만 일은 하기 귀찮은 그런 모순

적인 상황.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내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것을 알고 있었다. 퀘스트가 귀찮아

서 욕이 나오더라도, 결국 깨긴 깨는 게 게이머의 본능이니까.

홀로그램과 가상현실과 초능력 연구와 자기부상 탈것이 범람하는 미래 세계에서 왜 악마의 비인간적인

기술력이 오메가 3의 생선 비린내를 제거하지 못하는지 고민하며 그대로 지하 도시로 향한다. 목적지는

당연히 아퀼라 쪽으로 향하는 포탈. 학생들에게 마약을 파는 녀석은 꼬리조차 잡지 못한 상태고, 아퀼라

쪽에는 이미 두 명을 보내 놨으니까 우선 순위를 정하는 것은 쉬웠다.

반 백수 상황에 어색해서 몸을 비틀고 있는 소희를 내버려두고 집을 나섰다. 체육 동아리, 히어로 공익,

빌런 전담반까지 이어진 세월은 영웅조차 워커 홀릭이나 사축으로 만들기 충분한 시간이였나보다. 게임

이라도 하며 기다리라니까, 오늘 오전에는 별 일이 없고 밤에 대규모 레이드가 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생각해보면 RPG도 마음대로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커다란 스케쥴이 있긴 하지.

목적지가 지하 도시기 때문에 인파에 휩쓸리는 일 없이 몸을 숨기고 발걸음을 옮긴다. 안개로 변하거나

그림자에 녹아들지 않아도 사람들의 인식을 가볍게 피할 수 있었다. 흡혈귀 주제에 태양 볕 아래에서 마

음대로 은신이 가능하다니.

진화한 육체의 성능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지하 도시의 포탈 입구까지 도착하자 저 멀리서 클럽의 시끄

러운 음악이 귓가에 감돈다. 그와 동시에 셰프가 해 주던 디저트나 스테이크의 맛이 떠오르며 포탈이 아

니라 클럽으로 향하고 싶다는 욕심이 무럭무럭 솟아오른다.

‘욕구에 너무 솔직해졌는데...’

집에 있을 때에는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다는 감정과, 냉장고를 통째로 비우고 싶다는 욕망과, 소희의 목

덜미를 쪽쪽 빨아 마시고 싶다는 흡혈 욕구까지 짬뽕처럼 뒤섞이더니 지하 도시에 오니까 음악만 들어도

조건반사적으로 셰프의 요리가 먹고 싶어 진다. 무슨 종소리만 들어도 침을 질질 흘리는 실험용 개도 아

니고.

계속해서 머리 속을 맴도는 욕망들을 애써 무시하며 그대로 일렁이는 포탈 속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 너머에 어떠한 풍경이 펼쳐져 있을 지 상상도 못하고.

이탈리아 남부의 이름 없는 외딴 섬.

섬 끝자락의 암벽에 예술 작품처럼 건축된 다양한 저택들과, 그 바로 아래 파랗다 못해 하늘색이 된 아름

다운 해변이 섬의 푸른 숲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장관. 빌런 연합 주제에 이렇게 아름 다운 곳을 거점으

로 잡는 건가? 부업으로 관광업을 해서 돈을 버나? 싶을 정도로 절경을 지닌 장소로 이동했다.

파도 소리에 맞춰 바다내음이 코 끝을 찌르고,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키 큰 나무들이 그 텁텁한 해안가의

공기를 밀어내 주고 있는 완벽한 밸런스에 나도 모르게 소희와 함께 여행을 오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

눈 앞에서 어기적거리며 기어다니는 것만 없었다면.

“그어어...”

“빠, 빨리 챙기고 도망쳐!”

갑작스러운 장르 변경에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뇌가 짧은 파업을 시도한다.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어본

나도 비키니를 입은 여자 좀비가 아이스크림 손수레를 몰고 도망치는 남자를 쫓아가는 건 상상도 못한 광

경이라고.

전형적인 서양 글래머 여성이 몸매를 자랑하는 듯, 면적이 좁은 비키니를 입고 있었다. 피부에 시퍼런 핏

줄이 울룩불룩 올라온 좀비라는 점을 제외하면 눈요기에 좋은 미녀였을 텐데. 그 좀비가 추격하고 있는

것은 아이스크림 손수레와 핫도그 손수레를 끌고 모래사장을 필사적으로 달려가는 두 남자.

“하, 하나 포기할까?”

“무슨 소리야!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어!”

모래사장에서 뒤뚱뒤뚱 걷는 좀비와, 그것 보다는 아주 약간 빠르게 도망치는 남자들. 그들에게는 필사

적이겠지만 전체적인 속도가 성인 여성의 달리기보다 느려서 내가 보기에는 B급 감성 좀비 영화의 한 장

면처럼 보인다.

문제가 있다면 이러한 일이 내 눈 앞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게 뭔 상황이지?’

양복을 입은 좀비가 저택 사이를 어기적 어기적 돌아다니면 담벼락 위로 살금 살금 도망치는 인간들이 있

었다. 하수도에 처박힌 좀비가 팔을 버둥거리면 그걸 피해 골목길 끝자락에 딱 달라붙어 게걸음으로 이

동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자그마한 섬은 아퀼라의 전투부대 은신처였는데, 지금은 좀비 영화 세트장이 되어 있었다.

“허미, 씨벌...”

초능력과 과학이 존재하는 세상에 갑작스레 등장한 좀비. 순간적으로 생각이 멈춰버릴 법한 강렬한 충격

이었다. 좀비가 무섭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파악했다고 생각한 정보가 사실 병신의 헛다리 짚기 라는

충격적인 결말이 다가올 수 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새로운 모드나 내가 모르는 강적의 존재는 아닌 것 같았다.

느릿한 추격전을 천천히 구경한다. 핫도그 손수레를 포기 못한 갈색 곱슬머리의 남자가 필사적으로 달리

지만, 남자의 체력으로는 모래사장에서 빵과 소시지가 가득 담긴 손수레를 끌고 도망치기 무리였는지 발

목을 붙잡혀 넘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흡혈. 그제서야 파업을 한 두뇌가 생각을 시작한다.

새하얀 피부의 서양인도, 구릿빛 피부의 남미 사람도 모두 피부에 푸르스름한 핏줄이 잔뜩 드러나 있고,

어기적 어기적 느리게 돌아다니며 케엑, 켁 하고 우는 모습을 보니 알 수 있었다. 벌려진 입의 송곳니도

그렇고... 전부 되다 만 구울들이다.

게임 식으로 말하자면, 제작 실패의 결과물.

요리를 하다 망치면 검은 덩어리가 나오고, 포션을 만들다 실패하면 알 수 없는 액체가 나오는 것처럼 굴

라를 만들다 실패한 찌꺼기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머리도 나빠 사람을 깨물려는 본능만 남은

좀비 비스므레한 존재.

거기서 다시 한 번 두뇌가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려 든다. 어째서 이 곳이 이런 좀비 아포칼립스처럼 변했

는가? 실패작들은 연약하기 그지없다. 모래사장에서 손수레를 끄는 남자 두 명 중 하나를 놓칠 정도로.

성인 여성이 작정하고 야구방망이만 휘둘러도 할퀸 상처도 못 내고 머리가 박살 나서 죽을 운명인 약해

빠진 놈들이, 어떻게 D~B급 초능력자 수십명이 존재하는 섬을 통째로 점령했는가. 아니, 애초에 누가 이

녀석들을 만든 거지?

거기까지 생각을 하자 강렬한 깨달음이 내 뇌를 덮친다.

나는 병신이구나!

이 섬에 흡혈귀와 관련 있는 게 딱 두 명 있지 않은가. 내가 보낸 김세민과 이소정. 이런 일이 터졌으면 일

단 두 명 부터 부르고 봐야 하는데 그걸 안하고 멍하니 섬 내부에서 일어나는 좀비 아포칼립스 상태를 구

경이나 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악마 쪽에 흡혈귀 비슷한 게 있다고 해도, 이렇게 감염 시키는 건 나 말고 의심할 부분이 없었

는데 그걸 못 떠올리네.

스스로의 멍청함에 한번 더 감탄한 다음 연락을 시도하지만 닿지를 않는다.

‘역시, 진화 때문인가?’

짐작 가는 것은 용사의 각성. 용사가 각성하며 내가 그 피를 빨아 덤으로 진화를 했다면, 김세민과 이소정

또한 나를 중계기 삼아 진화를 한 게 아닐까? 그게 그녀들이 갑작스레 B급으로 진화한 것의 원인이라고

생각되는데.

마치 여과 필터나 전파 중계소처럼, 소희에서 나를 거쳐 김세민과 이소정에게까지 여파가 닿은 것이다.

물론 전부 추측이기 때문에 직접 찾아봐야 알겠지만.

‘그런데 뭔가 보는 재미가 있네.’

초능력을 가진 상태에서 좀비물 세상에 들어온 기분이라 해야 할까, 내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좀비 아

포칼립스 세계. 은근히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눈속임 용으로 나름 민간인들이 있었는지 꽤 많은 숫자

의 좀비들과 생존자들이 아웅다웅 살아남고 있었으니까.

이 섬에서 가장 높은 등급이 B급이라는 사실은 내가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을 뜻한다. 위험한 것도 없

으니 느긋히 알아봐도 되겠지. 사실 이 섬에 와서 따사로운 햇볕과 아름다운 경관을 보자 마자 느긋하게

쉬고 싶다는 욕구가 강렬하게 차오르고 있었으니까.

조금 느긋하게 돌아다녀도 되지 않을까.

고요한 거리에 비틀거리는 좀비들, 그리고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건물 구석 구석에 숨어 있는 사람들. 미

니 게임을 하는 기분으로 해변에서 시내로 올라가는 도로를 따라 걷는다. 휴양지인 섬이라 그런지 자동

차가 별로 없었다. 교통사고가 나거나 뒤집어진 상태로 길을 막은 자동차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 부분

은 조금 아쉽네.

[작품후기]

기말고사가 끝난 기념으로 과제를 내준 교수님을 무찌르고 돌아왔습니다.

그 와중에 성실 97.7%에서 한편 더 쓰고 시험치러 간건데 실패한건가.

나름 편수 맞춰서 연재한건데 성실 연재 실패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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