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6화 (176/189)

새로운 이벤트

여러가지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기쁜 상황이 되었지만 나는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무런 사건 사고도 없어서 고작 소매치기를 잡겠다고 골목을 뛰어다니던 고등학교 시절의 내가 본다면

왜 침대에서 게으름을 피우냐며 목에 핏대를 올리겠지.

물론, 한국 뒷골목을 장악하려는 빌런 조직과 정체 불명의 마약상과 협회의 위 쪽을 조사하다 연락이 끊

긴 A급 히어로를 두고 침대에서 뒹구는 이유를 물어본다면 나는 과거의 나에게 충고할 것이다.

소희를 침대에서 너무 가지고 놀지 마...

“어, 음... 하늘아, 괜찮은 거 맞지?”

“응, 괜찮아. 아픈 건 아니고 그냥 몸에 힘이 없는 상태야.”

갓 태어난 사슴 마냥 팔이 바들바들 떨리기에 얌전히 소희의 팔뚝에 등을 기대고 그녀가 대신 먹여주는

물을 빨대를 사용해 꼴깍 꼴깍 마신다. 쾌락과 정력 때문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같은 한심한 상황은 아

니었다.

“침대 위의 용사님은 무섭네~”

“아이 씨,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과도한 진화로 인한 마력 탈진 상태. 게임을 팔기 위해 즐겼기 때문에 치트키를 한 번도 써보지 않아서 처

음으로 겪어보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몸으로 직접 뛰는 RPG 게임이기 때문에 레벨이 오르는 것은 육체

의 변화를 의미하는데, 한번에 너무 커다란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세상에, 10살 어린 남자애를 침대에서 이겨 먹으려고 각성... 넘모 무섭다!”

“내가 잘못 했어...”

흡혈귀로서 소희의 피를 조금씩 마신다면 그 것으로 육체가 살금살금 진화를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어제는 소희의 피를 과도할 정도로 마셨고, 그와 동시에 소희가 한층 더 진화를 하며 피의 질이 두 세단계

는 올라갔다.

그 결과 탈피를 하는 동물들처럼 육체가 과도한 에너지를 받아들인 김에 화끈하게 진화를 시도했고... 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간병을 받는 처지가 된 상태. 피부색을 비롯한 육체 전반이 전부 변해서 이제

병약해 보이는 창백한 인상에서 그냥 새하얗고 예쁜 인상으로 바뀌었다고, 소희가 설명해 주었다.

거울 앞으로 걸어 갈 힘도 없어서.

“어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못하겠다.”

벌게진 얼굴에 손 부채질을 하다 따끈따끈하게 달아오른 내 등짝을 한 번 톡톡 두드려준 그녀가 작게 푸

념한다. 평소에는 내가 소희를 따듯하다고 느끼겠지만 지금은 반대의 상황. 소희가 손바닥으로 내 이마

를 어루만지자 손바닥의 서늘함이 기분 좋게 느껴진다.

소희는 체온이 높은 편인데 내가 시원하게 느끼다니, 열이 얼마나 나는 건지. 거기에 레벨업을 한 번에 너

무 많이 해서 탈진하는 상황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하기야 용사 옆에 붙어 있는 것 자체가 치트를 사용

하지 않으면 거의 없는 일이긴 하지.

심장은 쿵쿵 뛰고, 피도 여느 때와는 달리 어마어마한 속도로 몸 속을 돌아다닌다. 컨디션도 좋아 지금이

라면 연습 모드 같은 곳에서 마법 컨트롤의 신기록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은 최고의 기분. 하지만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고개도 제대로 가누기 힘든 모순적인 상황.

그래도 뭐, 누군가의 애정 어린 간병을 받는다는 것은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소희도 연인과의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점에 되게 만족스러워 보였고. 아닌가, 침대 위에서 자존심을 챙길 수 있어서 기뻐하는 걸

까?

씻는 일을 포함해 어지간한 것들은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축 늘어져서 고개도 못 가누는 날 보고 당

황한 소희의 모습이 조금 재미 있기도 했고. 초능력자에 대한 기본 상식이 잔뜩 있는 그녀는 A급에 준하

는 육체 능력을 지녔음에도 축 늘어진 나를 보고 놀라서 기절할 뻔했다.

하긴 감기는커녕 전염병 창궐 지역에서도 마스크 없이 봉사를 할 수 있는 수준의 몸이 거친 섹스 한 번에

무너져 내릴 거라고 상상조차 못했겠지. 침대 위에서 이기고 싶다는 열망과, 매혹을 이겨내는 용사의 각

성에 이중으로 취해 거칠어졌다는 기억이 있으니 더더욱.

“누나, 나 아이스크림 좀.”

“또? 괜찮겠어?”

“응, 몸이 더워져서 그런지 차고 달달한 게 계속 땅기네. 아니면 냉장고 세 번째 서랍에 사과즙 있는데 그

걸 마실까?”

“그래, 차라리 사과즙을 마셔.”

전염병에도 걸리지 않을 튼튼한 몸이지만, 누군가가 보살펴 준다는 것은 정말로 기쁜 일이었다. 소희도

나도 우리가 길바닥에서 썩은 음식을 주워 먹어도 탈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사소한 걸 걱정

하고 보살펴 주는 것에는 은근한 마력이 있으니까. 어찌 보면 일종의 역할극이라 봐야겠지.

“점심에는 계란 죽이라도 끓여볼까?”

“우리 집에 쌀이 있나?”

“뭐, 즉석밥이 있으니까 죽 만드는 건 간단하지. 계란도 토스트 때문에 냉장고 안에 있고 버섯이랑 참기

름은... 고기 구워 먹느라 지난번에 사 뒀던 거 같은데.”

“참기름은 싱크대 아래 양념장 수납장에 있고, 고기는 종류별로 사 놓긴 했는데 계란 죽에는 무슨 버섯을

넣더라?”

“표고버섯인가 송이버섯인가?”

부산스럽게 냉장고 근처를 돌아다니는 소희의 모습은 좋게 말하려 해도 요리에 익숙한 모습은 아니었다.

물 한 컵을 부어 넣은 즉석밥은 전기 인덕션 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지만 계란은 이제 냉장고에서 나오

고 있었고, 버섯과 기름은 찾지도 못한 상태니까.

미리 준비를 하지 않고 요리를 하며 즉흥적으로 재료를 찾아 나서다 요리를 망치는, 전형적인 초보 요리

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녀. 하지만 상관없었다. 우리가 뭐 요리를 잘 하려고 이러고 있는 것도 아

니니까.

즉석 밥에 물 넣고 계란 넣고 끓여 만든 계란 죽을 요리라고 거창하게 말할 이유도 없긴 했다. 냄비째 태워

먹지만 않으면 상관없는 요리니까. 소희가 아무리 요리에 관심 없는 여자라 해도 자취생 경험이 어디로

간 건 아니었다.

죽이 다 끓고 나서 계란이 투하되고, 맛 내기 용으로 김가루를 뿌리려다 정말 후추 가루 수준으로 으스러

진 김가루가 뿌려졌고, 참기름과 버섯은 결국 찾지 못했지만 계란 죽은 멀쩡하게 완성되었다.

그대로 주방에서 옮겨진 계란 죽. 침대 대신 소파에 편히 기대 한 수저씩 입가로 배달되는 계란 죽을 얌전

히 받아먹었다. 소희의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이런 닭살 돋는 행위에 익숙치 않다는 것을 절절하게

보여주는 걸 관람하면서.

“지금 보니까 건강 식품은 악마 애들이 만든 걸까?”

“뭐, 사람들도 애완동물이나 가축용 사료를 발전시키니까.”

“가축인가, 설명을 들으면 맞는 것 같은데 뭔가 기분이 이상하네.”

차마 후후 불어서 먹여주는 것 까지는 못한 소희가 살짝 벌개진 얼굴로 냉장고를 뒤적거린다. 악마가 배

달한 것을 내가 정리했고, 소희는 맥주나 고기 등 한 쪽 구석만 파먹고 살았으니 전체적으로 둘러보는 것

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사과즙을 찾다가 나오는 건강 식품에 놀라는 거지.

악마들이 우리에게 세계 각국의 다양한 식재료만 보내온 건 아니었다. 사과 즙을 비롯해 배 즙, 포도 즙,

혹은 고로쇠 수액이나 오메가 3, 종합 비타민이나 클로렐라 같은 다양한 건강 식품도 자신들의 상표를 달

아 보내왔으니까.

역시, 클로렐라는 악마가 만든 것이었군.

문득 지난 회차의 아이돌 플레이 때, 짧은 기간이지만 매니저가 건강을 챙겨준답시고 오메가 3와 클로렐

라를 사료처럼 먹이려 했던 기억이 떠올라 인상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건강 방송 때문에 사탕 마냥 비타

민을 씹어 먹고 살았지.

물론 곧바로 인류를 멸망시키는 타임 어택에 성공했지만, 입 안을 텁텁하게 만들고 숨을 쉴 때 마다 뱃속

에서 코 끝까지 역류하는 풀내음과 생선 비린내는 언제 떠올려도 유쾌하지 못했다. 소희도 그렇고 왜 그

런 방송을 믿는 사람들은 클로렐라를 자꾸 먹을 거에 섞는 걸까.

“누나, 사과즙에 클로렐라 섞는 거 아니지? 다른 비타민 같은 거 들이대지 마. 과일 먹으면 되는 거지 무

슨 종합 비타민에 클로렐라에 오메가에, 어휴.”

“에이, 설마 내가 그럴라구?”

간병한답시고 이러 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귀여워서 사과즙을 컵에 따르다 말고 멈칫한 것은 용서했다.

사과 즙은 봉지 째로 마시는 게 습관인데 컵에 담아 빨대로 마시는 건 조금 신선한 기분이 들긴 하네. 컵은

소희가 잡아주고 있긴 하지만.

“생각보다 악마들이 인류를 풍족하게 만들었네...”

“뭐, 과일이나 곡물의 품종 개량은 식탐이 탐욕과 손을 잡은 결과물이라니까 맞는 것 같지 않아? 좁은 땅

에서 더 많이 기르고, 더 맛있는 걸 기르고. 아마 인류의 발전 대부분은 식탐과 탐욕이 이루어 낸 업적일

걸?”

그리고 그 악마적인 지식의 결정체가 우리 집 주방에 있었다. 생선 기름을 캡슐에 담아 먹는다는 비정상

적인 사고 방식을 표출하면서. 녹조류 캡슐과 생선 기름 캡슐이라니, 음식은 음식으로 직접 먹었으면 좋

겠네.

[작품후기]

클로렐라, 오메가 3, 고로쇠 수액은 경험담입니다.

저 중딩 무렵 어머니 친구분 하나가 건강 식품을 광신해서 그런지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로 자꾸 주셨거든

요. 공짜로 선물하는거니 안 받기도 뭐하고, 버릴 수도 없는데 잘 사시는 분이라 손도 컸습니다.

오메가 3랑 종합 비타민을 5통 정도 선물로 받아서 3달 내내 입에서 비린내가 난 적도 있고, 클로렐라를

매일 먹다 숨 쉴 때마다 코에서 클로렐라 냄새가 난 적도 있고, 고로쇠 수액 궁금하다고 했더니 2.5L 들이

5통이 배달와서 물 대신 마신적도 있고...

손은 참 크고 주변 사람을 잘 챙기시긴 하는 좋은 분인데 중학생 입맛에는 너무 끔찍했었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