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2화 (172/189)

새로운 이벤트

머리 한 구석에 있던 기억을 떠올린다. 건물 방마다 자리를 잡고 있던 고삐리들이 제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있던 풍경. 2인 1조로 골목을 순찰하며 소란이 일어나면 본대가 출동하는 모습으로 알 수 있었던, 수뇌부

와 타격대 순찰대 등 체계적으로 구성된 조직의 모습.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먼지 쌓은 건물의 입구는 유리창이 깨져 있었고, 붉은 페인트로 낙서까지 되어 있었다. 전기가 나간 건 아

닌지 엘리베이터는 돌아가고 있지만 전등은 깨져 있어 어두운 건물 안, 유리 조각을 밟으며 계단으로 향

하니 담배꽁초와 콘돔, 뭔가를 닦고 버려진 휴지 등 다양한 오물이 널브러져 있었다.

‘뭔 상황이여 이게...’

수상한 놈들이 고등학생 조직에게 과도한 마약을 뿌렸다. 딱 그 정도만 생각했기에 영향력이 줄어들었거

나, 이탈한 놈들이 좀 있거나, 오합지졸이 되었거나 그런 장면을 상상했다. 방이 몇 개 비어 있고, 사람 수

가 줄어든 그런 모습.

‘역시 마약이 파급력이 강하긴 해...’

물론 지금 눈 앞의 현실은 상상을 뛰어 넘은 상태였다. 엘리베이터가 작동이 정지해 뜯고 올라가는 멋없

는 상황을 걱정해 계단으로 향했더니 거의 폐가와 다를 바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건물 안에서 느껴지는

사람의 기척이 고작 다섯.

느껴지는 곳이 최상층이니 아마 조직의 보스인 백정아와 간부 몇 명 정도 남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문을 열었다.

“또 누구, 너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백정아, 피 냄새 나는 아령을 들고 팔 운동을 조지는 심백림, 그리고 턱뼈

와 이빨이 박살 난 상태로 바닥을 뒹구는 세 명의 여자들. 다섯 명도 아니고 남은 건 두 명이었네.

“금괴!”

“어째서 니들이 나를 금괴라고 부르는지 이해는 하는데, 삿대질은 너무 하지 않냐?”

반쯤 하소연에 가까운 주절거림을 듣고, 상호 합의 하에 피 한 방울을 받았다. 히어로 협회의 부정 부패를

캐고 다니는 백아영이 주인공처럼 보이니까, 주인공의 여동생은 조금 대접을 해 줘도 좋겠지. 소희를 영

웅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괜히 정의로운 주인공 NPC랑 척을 졌다가는 소희의 미래 이미지가 망가질지도

모른다.

“결국 아는 건 없다는 거네?”

“그렇지, 겁먹은 몇 명은 도망쳤고, 나머지 애들은 다 마약에 찌들어서 이 근방을 헤메고 있어. 작업장으

로 쓰던 곳에 적당히 자리 잡고 마약을 즐기던데... 그게 이상해.”

“뭐가?”

“마약을 계속 처먹는다고! 씨발, 20ml짜리 일회용 주사기 하나에 300만원을 전부 꼴아 박은 미친놈도

미친 놈이지만... 어떻게 300만원짜리 주사기를 계속 구해와서 마약쟁이가 된 건지 이해를 할 수 없어!”

문득 여기 오기 전에 봤던 광경이 생각난다. 새하얀 가루를 코와 입 주변에 잔뜩 묻힌 상태로 널브러진 년

의 모습. 그때 바닥에 깨진 주사기가 잔뜩 있긴 했지. 어우, 가루가 수백만원이라 생각했는데 주사기 하나

당 300만원이면 그 마약쟁이가 처먹은 양이 1억은 된다는 소리네.

동네 양아치가 1주일에 1억씩 FLEX하는 동네라, 어떻게 봐도 비정상이야.

“그래서, 왜 여기까지 온 거야?”

“그냥, 존나 수상한 녀석이 보여서 미행했을 뿐이야.”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이상한 모양새를 보이나 했더니, 마약 때문이었겠네. 소시민적인 사람에게

백 만원이 훌쩍 넘는 마약을 쥐여 주면 겁을 집어먹겠지. 먹을 용기는 없는데 버리자니 비싸고, 팔자니 구

매할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기이할 정도로 어지럽혀진 건물이 이해가 된다. 금괴를 팔고 남은 돈이 있다고 믿은

년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건물을 헤집었을 거고, 현찰과 금괴를 발견 못한 녀석들은 천천히 올라와서 이

곳까지 왔겠지.

저기 바닥을 뒹구는 세 년처럼.

뭐, 바닥을 뒹구는 년들도, 네 명의 패거리 중 차마 친구가 준 마약을 먹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대다 피를 빨린 엑스트라도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아서 대충 넘겼다. 중요한 건 이 마약을 뿌린 놈이지, 마

약에 취한 놈들이 아니니까.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제발 마왕군이 엮여 있으면 하는데.

아직까지도 요양을 하느라 이제 뇌리에서 사라질 것 같은 오로바스도 찾지 못한 미지의 적이 있으니까.

물론 용사 소희가 있으니 무서울 건 없었다. 단지 미지의 적이 존재한다는 것이 방학 숙제를 까먹은 것 같

은 미묘한 찝찝함을 불러 일으키니까 빨리 처리하고 싶을 뿐.

마왕이 빨리 와서 소희가 빨리 무찌른다면, 그만큼 놀고먹을 인생이 길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음? 마약에 취한 너네 애들 이용해서 마약 팔이범들 얼굴이나 봐야겠지. 여차하면 지하 도시의 병력을

올려 보낼 수도 있고. 너는 이런 데 있지 말고 집이나 가렴.”

손을 휘휘 내젓자 발끈하는 모습이 귀엽다. 그리고 그 와중에 팔을 바꿔가며 아령으로 땀을 흘리는 옆의

근육질 헬창이 좀 부담스러워. 심백림이라 했던가, 무능력자 주제에 어지간한 D급 능력자 까지는 이길

수 있어 보이는데.

“아니면, 복수라도 하고 싶어?”

얘들도 굴라로 만들어 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무능력자 고등학생 두 명도 지들이 알아서 B급 언저리까지 진화했는데, 딱 봐도 싸움 꽤나 할 것

같은 녀석과 머리 잘 쓰는 녀석을 붙여서 네 명으로 만들면 더 잘 진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

까.

책상에 앉아 있는 백정아는 딱 노는 언니 스타일이었다. 금발로 염색하고 치마를 줄여 입는 이소정이 금

발 갸루 캐릭터였다면, 백정아는 검은 긴 생머리에 쓰레빠 끌고 다니는 동네 노는 누나처럼 생겼다고 해

야 할까.

나름 일진 놀이를 하면서 놀고먹은 건 아닌지 군살 없이 쭉 빠진 몸매에 적당히 붙은 가슴과 엉덩이의 살

집. 조금 허름한 교복 대신 쫙 붙는 삼선 레깅스에 굽 높은 슬리퍼 신고 깨진 아이폰 들려주고 싶게 생긴

날카로운 외모. 거기에 백아영과 자매 사이여서 그런지 은은하게 불 그을린 냄새가 난다. 나름 숨기고 있

는 것이겠지만 C등급 정도는 되는 화염계 능력자겠지.

옆에 있는 심백림은 노는 누나가 아니라 그냥 강한 누나였다. 강한 여성과 왜곡된 성욕을 찾는 근육 매니

아들이 보면 데이터를 팔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만한 전형적인 아마죠네스 여성. 키는 소희보다 큰게

적어도 180은 되어보이고, 팔뚝의 펌핑된 근육이 내 허벅지 정도 되는 것 같다.

저 정도로 알아서 단련할 정도면 진짜 굴라로 만들고 싶은데.

“복수라고? 뭘?”

“글쎄, 네 조직을 망가트린 빌런 놈들에게? 아니면 네 자매를 위해 잡아다 넘겨서 공을 쌓아도 좋고. 집에

가서 발 닦고 자느냐, 스스로 복수해서 마약 판매범을 잡으러 가는가의 차이지.”

물고기를 낚는 어부의 심정으로 살살 미끼를 던진다. 막무가내로 덮쳐도 반항할 수 없겠지만 어지간해서

주인공 관련된 NPC는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긁으면 꽝만 있고 당첨은 없는 위험 천만한 복권을 긁는 취

미는 없으니까. 살살 구슬려서 아군이 되면 빨대를 꼽을 수 있지만, 적이 되면 이득이 하나도 없다.

그렇게 백정아를 바라보고 있으니, 옆에서 팔 운동을 끝낸 심백림이 갑자기 말을 건다.

“고작 고등학생 두 명을 데려가려고 하는 걸 보니, 어떻게든 우리를 써먹을 방법이 있나 본데?”

“맞아, 너희가 원한다면 초능력 등급을 올려줄 수 있어. 마약 같은 것도 아니고, 신체적 후유증도 없지. 다

만 진화 방식이 조금 운에 따라서 원하는 대로 변하지 않을 수 있지만.”

부작용으로는 절대적인 복종심이 심겨지고 성노예 비슷하게 변하며 강해지는 만큼 내게 대가를 지불하

게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서 너처럼 운동만 한 여자도 몸 쓰는 초능력이 아니라 머리 쓰는 초능력이 생길 수 있지? 나도

만능은 아닌지라 그 정도 부작용은 어쩔 수 없어.”

실제로 한 평생 기사가 되겠다고 육체 단련만 했던 기사의 종자가 마법 계통의 언데드로 진화한 적도 있

긴 했었다. 그러자 심각한 얼굴로 숙덕거리는 두 명. 귓속말로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귀를 기울이

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요즘 순찰만 계속 돌아서 조금 심심했으니까. 이런 건 은근 쪼는 맛이 있어야 해.

“너, 능력이 흡혈귀가 되는 능력이라 했던가? 그러면... 우리를 깨물어서 능력을 나눠 주는 거야?”

“오, 알고 있네? 맞아, 나는 흡혈귀의 힘으로 너희를 강화시켜 줄 수 있어.”

금괴를 주고 갔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딱히 얼굴을 안 가렸더니 능력까지 조사를 해 놨구나. 매스

컴에 방송된 능력은 그림자를 다루는 능력인데 흡혈귀를 운운하는 걸 보니 학교 쪽이나 협회 쪽의 공식

정보까지 손을 댄 걸까?

점점 유능해 보여서 마음에 드는데.

무능력자가 B급이 되는데 거진 3년의 시간이 흘렀으니까, C급 능력자가 B급이 되는 것에는 1년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실전에 조금만 데리고 다니며 피를 나눠 준다면 A급도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몰래 숨겨둔 A급 4명이라, 숨김패로서는 꽤나 쓸만한 전력이지.

[작품후기]

전공 과제에서 후반부 문제를 손도 못대서 학점 조졌다고 자괴감에 찌들어 있었는데, 교수님이 문제를

잘못 낸거였네요. 손도 못대고 C뿌리기 당하는 줄 알았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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