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0화 (170/189)

새로운 이벤트

소희와 식사를 하며 방금 봤던 그 수상한 사람을 떠올린다. 수상하다 못해 도를 지나쳐서, 오히려 수상하

지 않아 보이는 사람. 기만책이라 해야 할까, 너무 대놓고 쓰면 오히려 의심을 못하는 그런 것들이 있지

않던가?

푹 수그린 어깨, 움츠린 목, 사방팔방을 살펴보느라 바쁜 눈동자, 선선한 날씨에 과도하게 입은 긴 코트와

그 안에서 흐르는 식은땀. 인파를 홀로 거슬러 올라가는 움직임부터 골목길에 들어가기 직전 다시 한 번

두리번거리며 들어가는 꼴까지.

누가 보면 개그 영화에 나오는 과장된 동작의 스파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심각한 움직임이었다.

“하늘아, 아까 그건 집 가는 길에 잡아보게?”

“음, 집에 도착한 다음 다시 나가도 될 것 같아.”

그 엉성한 몸놀림은 용사의 직감을 가진 소희가 걱정조차 하지 않도록 만들 정도. 거의 날 것 수준으로 나

온 규카츠를 뜨겁게 달궈진 석판 위에 살살 지지며 이야기를 나눈다. 나야 할 이야기가 별로 없어서 이럴

때는 소희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는 상황.

지난번의 그 모태솔로 친구 그룹부터, 중학교 운동 이야기, 히어로 공익 이야기. 별 것 아닌데 참 다른 세

상이라는 것을 느끼게 만드는 잡다한 이야기들. 특히 소희가 직접 다녀온 것은 아니지만 친구에게 들은

군대 썰이 참 재미있었다.

“다른 남자들은 군대 이야기 싫어 한다 던데.”

“왜? 나는 재미있는데.”

전국에서 엄선된 미치광이들이 모인 곳이 군대 아니겠는가? 군대 이야기가 재미 있는 이유는 내가 가보

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현실에서도, 게임 속에서도. 물론 노예 징집병이나 농노 출신으로 끌려간 적은 많

긴 하지만 그건 군대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전쟁 이야기였다. 남한과 북한이 통일되지 못한 신기한 세상

에서 군대에 끌려간 청춘들의 이야기.

초능력자와 히어로, 빌런이 있는 세상에서 남녀 역전까지 되어 있다 보니 소희가 들려주는 MSG 조금 섞

인 썰들이 어지간한 인터넷 유머글보다 재미가 있었다. 초소에서 경계 근무를 서던 일병이 근처에서 남

자 히어로가 빌런과 싸우는 걸 보기 위해 탈영을 했다가 전투의 여파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공포탄을

갈겨서 빌런 체포를 도운 썰 같은 것.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야?”

“뭘 어떻게 되긴. 무장 탈영에 공포탄 발포까지 했으니 교도소 갈 뻔 한거 히어로가 선처해 달라고 부탁

해서 영창에 휴가 제한으로 끝난거지. 히어로들이 치안 유지 쪽도 담당하다 보니까 은근 입김이 강해.”

역시 이쪽 세계에도 지 취미 생활하겠다며 탈영하는 놈들, 아니 년들이 있구나. 현대 버전을 할 때, 군필

남성 인맥들의 80%는 술자리 군대 이야기를 하는데 어째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조금 다른 것은 가슴 크

기와 골반 때문에 팬티는 훔쳐가도 브라자는 안 훔친다는 말이 있다는 점?

한국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A컵들은 가슴이 작은 것도 서러운데 군대에서 속옷 도둑도 많아서 서럽다

는 말에 씹던 규카츠를 조금 뱉을 뻔했다. 활동성을 중시한 스포츠 브라에 브리프 팬티를 보급하기 때문

에 팬티 도둑이야 늘 있지만, 브라자는 가슴 크기가 비슷한 년끼리 훔쳐가기에 잘 들킨다고.

“그래서, 아마 외출도 이제 쉴 수 있을 것 같은데... 뭐라도 사서 들어갈까?”

“아냐, 그냥 가자. 어차피 대부분 배달할 수 있으니까.”

두 번 방문했다는 이유로 규카츠집에 소희와 나의 싸인을 자연스럽게 1장의 A4용지에 끼적인 다음, 우리

는 밖으로 나섰다. 퇴근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도 슬슬 허기를 느낄 타이밍인지 길거리를 걷는 사람보다

식당 안으로 들어간 사람이 더 많았다.

평화롭긴 더럽게 평화롭네.

진창 가득한 전쟁터 참호나 피 묻은 병장기를 들고 쏘다니는 무림인들을 떠올리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이런 말끔한 시내 풍경이 가끔 어색하기도 하다. 데이터 팔이 때문에 늘 전쟁에서 뒹굴었는데.

이 쪽 세상에 떨어지기 전에는 혼자 술을 마시다 인터넷에서 말싸움을 하고서, 아이돌 데이터로 으쌰으

쌰 놀아서 그런지 더욱 더. 평화로운 모드는 가끔 휴식하려고 돌리는 거지 이렇게 연속으로 돌려 본 적이

없었다.

씨발, 게임을 하다 쉬려고 게임을 한다는 중독자스러운 문장에 한숨이 나올 것 같은데.

“많이 피곤해? 아니면, 아까 그 사람?”

“아냐, 좀 우울한 생각이 나서.”

안색이 흐려지자 귀신같이 옆으로 들러붙어오는 소희에게 팔짱을 낀다. 팔뚝 너머로 느껴지는 말캉한 감

촉에 바로 기분이 좋아진다. 마찬가지로 소희도 내 넙데데한 가슴에 기분이 좋아졌겠지. 아무것도 달린

게 없는 남자 가슴에 대체 무슨 매력을 느끼는 건지 모르겠지만.

조금은 줄어든 인파의 시선을 받으며 집에 도착한 나는 소희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춘 뒤 그대로 창문 밖으

로 날아올랐다. 어느새 떠오른 달빛 아래에서, 우리 집 주변을 맴도는 기자 몇 명의 머리 위로.

그 누구도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수상했던 사람의 인기척은 나를 꽤나 익숙한 곳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 뭐냐, 인상적이던 근육녀를 포함

한 고딩 조직이 있던 쪽으로. 불량배 아지트가 잔뜩 있는 동네에서 기시감을 느끼며 안개로 바꾼 몸을 천

천히 흐트러트린다.

‘또 여기라면... 진짜 게임 스토리라도 진행되나?’

이 세상이 게임인지 아닌지 정말 판단을 못 내리게 만드는데. 현실 같다, 현실이다 생각해도 자꾸 주인공

NPC 닮은 애들이 순서대로 시나리오를 진행시키니까. 물론 초능력자 이벤트보다 악마를 먼저 만났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스토리 진행 순서가 조금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길거리에서는 서너 명 모여 있는 발랑 까진 남학생들이 통을 줄인 바지를 입고 발목과 빵뎅이를

과시하며 담배를 피운다. 여학생 무리들은 지들끼리 음담패설을 내 뱉으며 강해 보이기 위해 허세를 부

리고 남학생 무리의 눈치를 보고 있고. 학생 구역 보다는 거의 동물의 왕국 구역 같은 동네.

소주병이 허공을 휙휙 날아다니는 뒷골목 패싸움을 지나, 아줌마에게 돈을 받고 무인 모텔로 들어가는

남학생과 각목을 들고 몰래 뒤따라가는 여학생들을 지나니 목표물이 보인다. 퀴퀴한 곰팡이 내음 가득할

것 같은 시멘트 계단으로 내려가는 녀석.

아무리 사람 한 명 분의 밤 안개가 눈에 안 띈다지만, 저런 밀폐된 공간은 이야기가 다르다. 바람에 흐트

러지는 것도 아니고 지하실에 안개가 끼면 누가 봐도 이상하니까. 그래서 일단 문 앞까지 가서 안개화를

풀었다.

곧바로 코를 찡하게 만들며 폐부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는 냄새. 언젠가 느껴본 적 있는 냄새에 문고리에

손을 얹고 고민을 한다. 익숙한 냄새는 아니지만, 분명 맡아본 적 있는 냄새였다. 향기나 악취라고 할 수

없는, 묘하디 묘한 냄새.

‘마약?’

지하 도시의 의뢰를 받고 전멸시킨 마약 거래 조직을 사냥할 때 맡았던 냄새.

‘고작해야 이딴 녀석들이?’

분명, 마약 조직은 내가 전멸시켰는데. 고작해야 B급도 되지 못하는 버러지들이 머리수만 잔뜩 모아서

지하 도시의 수뇌부에게 깔짝거렸던 이유로. 사실 지하 도시와 엮인 정치적 이야기가 서류에 있었는데

그 때는 귀찮아서 읽지도 않았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도 안 읽은 걸 떠올릴 수 없지.

아무튼 간에 같은 종류의 마약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상황이었다. 여기는 엄연히 고딩들이

노니는 장소니까. 경찰이 신경을 껐다 해도 낡은 A.I.의 허점을 이용해 고딩들이 술, 담배를 구매하는 수

준일 뿐, 히어로 협회의 영역이긴 했다.

고작해야 원조교제나 하는 녀석들이 수십억 단위의 마약을 가지고 다닌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뒷

골목 불량배들이 싸구려 대마초를 피우지, 1 그램당 십만원을 넘기는 마약을 즐기겠냐고. 1 kg에 억 단

위, 가방 하나 가득 채우면 수십억 단위로 거래되는 최첨단 과학 기술이 섞인 마약을 달동네 고등학생들

이?

방 안에 있는 것은 약에 취한 네 명과, 취하지 않은 한 명. 전부 여성이고, 취하지 않은 놈이 내가 따라온

그 수상한 녀석이다. 기척부터 냄새까지 B등급은커녕 C등급도 없는 것 같은데 망설일 필요는 없겠지.

그대로 문고리를 열고 들어간다.

문을 열자 마자 보이는 것은 팬티에 셔츠 차림으로 소파에 널브러져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는, 전형

적인 마약중독자의 얼굴을 한 여자였다. 누렇게 때가 탄 셔츠 목 깃을 보면 진짜 고등학생인지 입을 게 없

어서 교복을 입은 건지 모르겠네.

다른 둘은 테이블에 앉아 카드 놀이를 하고 있다가 이 쪽을 보고 벌떡 일어난다. 눈이 풀리고 침을 흘리는

소파 위의 녀석과 달리, 눈동자가 좀 흐리멍텅 하지만 이성은 있는 모양. 화들짝 놀라 이 쪽을 보며 몽둥

이와 맥주병을 집어 든다. 마찬가지로 같은 치마를 입고 있는 걸 봐선 진짜 교복인가?

그리고 취하지 않은 한 녀석.

“다, 당신은? 금괴!”

누군지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금괴를 준 조직에 있던 녀석인가 보네. 내 얼굴 본 녀석이면 수뇌부라 해

야 하나?

[작품후기]

PC방 간다고 탈영하는 놈들이 있는데 히어로 보겠다고 탈영하는 년들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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