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9화 (169/189)

새로운 이벤트

똑같은 말을 해도 사람이 받아들일 때가 있고, 거부하고 화를 낼 때가 있다. 아니시에이팅으로 시작된 지

금의 상황이 정확히 그렇다. 어차피 대학 생활은 가짜 신분일 뿐이고, 히어로의 정체가 드러나면 그만 둬

야 할 일인 건 맞지.

아마 히어로끼리 술자리에서 치킨이나 뜯다가 ‘야 너, 들키면 대학 때려 치냐?’ 같은 질문을 들었다면 이

대학생도 웃으며 대답할 것이다. 그래도 명문대 졸업장 보다는 A급 히어로 활동 증명서가 낫지 않겠냐고.

어차피 대학을 졸업하던 카페를 영업하건 헬스장을 관리하던 간에, 결국 그들의 직업은 히어로가 될 수

밖에 없으니까. 평생 지켜질 비밀도 아니고 결국은 접어야 할 사업에 불가하다. 적어도 공무원이 생각하

기에는 그게 합당하겠지.

“야, 이거 제대로 조졌는데?”

“누나, 이 정도면 큰 일인가?”

하지만 지금은 가짜 정보라 생각되는 것에 속아 2주 내내 순찰하고 감시하며 뺑이를 친 상황. 심지어 그

말을 꺼낸 것도 잘못된 정보를 물어온 당사자 아니겠는가. 아무리 협회의 공무원들이 히어로를 보조하는

오퍼레이터 업무를 하며 강철 밥통이라 해도 이건 선을 넘은 상태다.

여성 공무원이 들먹이는 이론과 이성은 쓸모가 없었다. 왜냐하면 상대는 짜증이 많이 난 남성이었으니

까. 히어로와 민간인 이전에 사람이 언제 이성적으로만 따지고 살았던가. 짜증난 남자한테 정론을 들이

밀며 팩트라며 주장한다?

말 그대로 좆된거지.

한 사람이 하루에 보고서 하나를 달랑 올리던 연락용 메신저가 불이 난 것처럼 달아오른다. 중간에 헬창

남이 끼어들었기 때문에 항의가 두 배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마 협회의 공무원이 한 말이 심기를 건드린

것 같은데.

혀를 쯧쯧 찬 소희가 작게 히어로들에 대해 설명을 해 준다.

“비공개 히어로들은 명예와 인지도를 포기한 대신, 일상 생활을 선택한 사람들이거든. 이하린 봐봐, A급

히어로가 정체만 드러내서 CF만 찍어도 얼마를 벌 수 있는지 생각해 보고. 연예인이 못 되더라도 인터뷰

랑 CF, 어디 예능 같은 곳에 나가서 마스코트처럼 등장만 해도 얼마나 버는데. 그 모든 걸 포기하고 위장

신분을 선택한 사람들인데...”

슬그머니 설명을 하는 소희의 말까지 들으니, 공무원이 진짜 좆된게 맞는 것 같았다.

근육질 우락부락한 헬창남이야 내 눈에만 좀 거슬릴 뿐이지, 원래 세계 기준으로 치면 헬스장 육덕녀랑

다를 게 없다. 외모도 눈썹 짙은 쾌남이니 방송 한 번 타면 여성들에게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 수 있을 테니

까.

동영상 사이트에서 요가복 입은 쭉쭉빵빵한 미녀 동영상이 인기가 없는 세상이 어디 있냐고. 하다 못해

중세 무림 시절에도 춘화로 그리고 판타지 세상에서도 초상화에 음유시인에 별게 다 달라붙는 것이 글래

머 미녀의 인기다.

그리고 헬창남 말고 학점 걱정을 하는 남대생도 마찬가지. B급 히어로만 되어도 기본금으로 혼자 먹고 살

걱정은 없고, A급 히어로는 정체를 숨겨도 따박따박 월 몇 백만원 지원금이 나온다. 어지간한 대기업 연

봉만큼 받는데 많고 많은 위장 신분 중에서 ‘대학생’을 골라 학점을 따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

누가 봐도 대학생 졸업증을 효도용으로 따는 것 같지 않은가.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이 내 새끼는 대학 물

먹었으면 좋겠다~ 하고 바라는 것은 중세 시대부터 미래 SF 세계관까지 동일한 바람이니까. 설마 A급 히

어로가 대기업 사원으로 취직하려고 공부를 하겠어.

- 말을 가볍게 하시네

- 그래서

- 우리가 돈 때문에 이 짓 하나?

- 돈 벌라면 체육관 때려 치고 방송 나갔지.

- 학점

- 아니출결

- 쇠질 돈 벌려고 하는 줄 아나?

- 채워주냐고요

- 말존나돌리네진짜

- 댇ㅏㅂ안해요?

헬창남의 채팅에 점점 속도가 붙고, 대학생은 이제 스페이스 바가 사라진 상태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담

당관은 상사라도 부르기 위해 사라졌는지 대답이 없다. 이러면 집에 가도 되는 거야, 아닌 거야?

“누나, 그냥 외식 함 하고 집에 돌아갈까?”

“그래? 아직도 안 먹어본 곳이 있나? 슬슬 집 밥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밖에서 하루 죙일 외식으로 식사를 한 소희가 집 밥 타령을 했지만, 생각해보면 집에 있는 밥도 결국 식탐

이 포장해서 보내준 음식이라는 것이 떠올랐는지 조용히 따라온다. 소희의 반응을 보니 슬슬 집에서 놀

고 있는 밥솥이 일할 때가 왔다.

“어디로 가는 거야?”

“지난번 갔던 규카츠 집에 가서 덮밥 먹어보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자연스럽게 내 오른편에 서며 인도 안 쪽으로 밀어 넣는다. 묘하게 뿌듯

한 얼굴인 걸 봐선 애인이 생기면 꼭 해보고 싶던 일 중 하나였을까? 공간 마법 말고 손가방이라도 하나

사서 들고 다니다 맡겨 줘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드네.

음식집으로 향하는 길에 머릿속으로 해야 할 일을 짚어본다.

일단 두 명의 부하가 아퀼라를 제대로 잡을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협회 위 쪽의 썩은 물들, 천사들이

아직 장악하지 못한 부분도 먹어 치우면 좋고. 지하 도시에 있던 연금술사의 흔적과 악마들도 찾지 못한

테러범들의 꼬리를 잡아 초능력자 모드의 보스인지, 마왕의 끄나풀인지 확인도 해야 하고.

결과론적으로 보면 지하 도시 같은 음지의 세력 말고, 양지의 세력을 차지한 다음 소희의 제물이 될 녀석

들을 차례대로 끌고 나오면 끝. 용사한테 성장의 기회만 계속해서 준다면 마왕과의 싸움은 어지간해서

용사의 승리로 돌아가니까.

‘기왕 얼굴 까발려 진 거, S급 히어로의 빌런 퇴치 방송 같은 거나 진행해버려?’

히어로 중 카메라에 얼굴을 비춘 것은 S급 히어로 이사벨라뿐. 그 것도 사탄이 분노조절을 못하고 카메라

앞에서 맨 얼굴로 지랄을 한 극히 일부의 상황이다. A급만 봐도 절반 이상이 정체를 숨긴 비공개 히어로

인데.

S급 히어로랑 A급 사이드 킥이 카메라 들고 다니면서 개인 방송하면 인지도 하나는 제대로 빨아먹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협회가 허락할 지 모르니까 우선 협회의 위 쪽을 처리하던 차지하던 해야 한다. 그러

려면 백아영을 다시 찾아보는게 우선 순위가 되나?

사슬에 묶여 허덕이던 그녀의 나신을 떠올리니 아래쪽으로 슬그머니 피가 쏠린다. 나름 초능력 모드의

주인공이랍시고 피가 참 맛있었는데. 피만 맛있던 것도 아니고. 그래서 숨어 다니는 A급 히어로를 어디서

찾아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소희의 팔짱을 끼고 걷는데, 골목 안으로 두리번거리다 들어가는 수상한 사람이 보인

다. 평범하게 걸어가는데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심장은 쿵쾅거리며, 패션 선글라스 너머의 눈동자는 사

방팔방 열심히 헤엄치는 사람이.

저녁 식사 시간에 가족끼리 나와서 우리에게 단말기 렌즈를 들이대는 인파 사이에서 홀로 역방향으로 사

라지는 모습은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빌런이라 보기에는 너무 엉성한데, 수상하기는 빌런급이다.

“하늘아, 저거 봤지?”

“음... 그림자만 하나 붙여 둘게.”

“어, 그런 것도 가능해?”

소희도 폼만 히어로인 것은 아닌지 인파를 역으로 헤치고 사라지려는 수상한 사람을 발견했는지 귓가에

작게 속삭인다. 그 모습이 퍽이나 로맨틱 해 보였는지 관중들이 웅성거리는 게 느껴진다. 하여간 남의 연

애 사정에 관심이 참 많은 게 당연한 건가.

“그럼, 명색이 흡혈귀고 마법을 쓰는데 위치 추적 하나를 못 하려고? 왜 누나, 찔리는 거 있어?”

“아니, 내가 뭘 너한테 숨기겠냐? 마법보다 그림자가 만능인 것 같아서 그렇지.”

생쥐 모양으로 변한 그림자에 피 한 방울 담아 사람들의 발치 사이로 보낸다. 나보다 키가 조금 큰 소희가

귀엣말을 하기 위해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뺨을 맞댄 모습에 시선이 몰려 있기 때문에 발 밑으로 시선

을 내리는 사람은 없었다.

웅성거리는 인파의 틈바구니로 기어간 그림자 생쥐가 열심히 달려 골목길 안으로 슥 들어가는 수상한 사

람의 그림자 안으로 들어간다. 그림자와 그림자가 이어졌고, 내 피가 묻었으니 오늘 밤에 바로 찾아갈 수

있겠는데.

남자면 먹고, 여자면 먹어야지.

사람은 가끔 군것질을 해야 한다는 엉터리 지론을 떠올림 소희의 뺨에 내 뺨을 괜히 한 번 맞대고 슥 문질

러준다. 새빨갛게 변하는 얼굴과, 작은 감탄성들, 그리고 열심히 찰칵거리는 카메라와 단말기들.

“어, 음, 가자...”

“어휴, 사람들 앞이라고 얼굴 벌개진 것 봐. 언제 당당해지려나.”

부끄러움에 몸서리 치는 소희의 팔짱을 끼고 이끌자 다시 한 번 구경하는 사람들의 환호성 비슷한 감탄성

이 터져 나온다. 이러니까 A급 히어로의 절반 이상이 비공개 히어로로 남는 거 아닐까. 사람들은 연예인

의 수입은 부러워하더라도, 그들을 바라보는 수십의 카메라와 수백의 스태프는 부러워하지 않으니까.

생각해보니까 그 남대생 얌전하게 공부만 하는 범생이는 아닌 것 같은데, 대학교에서 사귀는 사람이라도

있었나? 그러면 공무원의 말 실수가 정말 가볍게는 끝나지 않을 텐데.

[작품후기]

과제 검토를 했는데 교수님의 프로그래밍과 제 프로그래밍에 일치하는 부분이 거의 없더군요. 그래도 결

과값은 같은 게 몇 개 있어서 점수는 먹었지만. 강의 중에 한 문제도 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최소한의

노력은 하라고 말씀하신 교수님 덕분에 희망을 얻었습니다.

제발 전공 포기하고 깔아주세요...

이번 학기는 기도메타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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