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7화 (167/189)

새로운 이벤트

B급까지 아득바득 기어올라온 두 명을 보니, 원인이 조금이나마 짐작은 간다. 하지만 지금 따질 일은 아

니었고 나쁜 일도 아니었으니 패스. 진화를 한 것이 놀란 거지, 레이스 퀸이랑 구울 로드를 처음 보는 건

아니었으니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때고 그대로 바닥에서 정신을 차린 세 남녀를 바라보았다.

악성 곱슬머리의 흑인 여성, 은발 벽안의 백인 여성, 그리고 갈색 머리의 평범한 백인 남성. 타투는 가지

각색이라 통일성이 없었지만 가슴 쪽에는 브리핑 때 본 뱃지가 있었다.

나이는 대충 서른쯤 되었을까, 인종이 다르면 알아보기 어렵단 말이지. 이 쪽을 노려보는 세 명의 앞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으니 피 섞인 침을 뱉은 은발 벽안이 히죽 웃는다. 잘 관리된 새하얀 이빨을 물들인 핏물

에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흐, 눈치 하나는 빠르네 요 빌어먹을 원숭이 새끼들.”

녀석이 입을 열자 풍겨오는 핏물의 냄새를 맡아보니 B급 중하위권의 육체 강화 능력자. 상위 1%의 초인

의 반열에 들었다 해도 같은 B급이 후려치면 박살 나는 건 마찬가지니까. 아마 이소정의 뼈다귀 무기에

턱주가리가 날아간 녀석이 얘 같은데. 튼튼하긴 한 건지 이빨은 모두 예쁜 모양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나서서 입을 여는 얘가 B급, 뒤에 있는 녀석 두 명은 C급. 카메라에 추가로 등장한 두 명. 다섯 명이 한 조

가 되어서 침투를 한 걸까?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 하는 거고. 문신도 그렇고 하얀 피부에 꽤 예쁘장한

외모도 그렇고 서양 포르노 배우를 보는 기분이 들었는데 좀 아쉽네.

왜, 전투 섹스를 하는 그런 무서운 서양 눈나같이 생겼어. 입도 험하고 섹드립도 바로 박아버리고. 인상

찌푸리면 존나 무섭게 생긴 그런 누님들.

“왜, 알고 싶은 정보라도 있나? 내 아래쪽 입을 가득 채워 주면 위쪽 입이 저절로 벌어질 것 같은데, 어

때?”

음담패설을 내뱉는 한 명과,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두 명. 충성심도 강화된 건지 김세민과 이소정이 발

끈해 나서려 하기에 손을 저어 말렸다. 이런 상황은 익숙하기 그지없으니까. 데이터를 받고 사람 조지는

법을 알려준 우리 선생님의 가르침을 떠올린다.

게임 속에서 어떻게 하면 진짜 미친놈처럼 보일 수 있는지, 고문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는지 알려

주던 그 모습. 생각해보면 현실에서도 그 짓거리를 하고 다닌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교하고 정확한 정

보들.

말을 잘 듣는 학생처럼, 계속 낄낄 웃는 녀석의 손가락을 뒤로 곱게 꺾었다. 검지 손가락의 손톱이 손목에

닿을 정도로. 끅, 끅 하고 비명 섞인 신음소리를 삼킨 녀석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웃는다.

“이 정도? 아무 방식도 없이 고작 뼈나 부러뜨린다고 겁을 먹을, 아악!”

그래서, 다시 한 번 손가락을 접는다. 다른 손가락이 아니라 뒤로 꺾인 검지를 이번에는 손바닥에 닿도록

꾹 눌러서. 한 번 부러진 손가락이라 그런지 강하게 힘을 주니 덜렁거리며 꾹 눌리는 손가락.

“이, 이 미친 새끼가...!”

다시 한 번, 뒤로. 앞으로, 뒤로, 앞으로.

“씨발놈아, 뭘 원하는 거야, 뭘!”

강화된 육체의 피부가 너덜너덜 해 지고 손가락이 덜렁거릴 정도로. 관중들의 시선이 모이고, 분위기를

읽은 김한나의 몸이 발발발 떨린다. 쟤는 지난번에 내 욕망을 읽었을 때도 저러더니, 대체 뭘 읽는 걸까?

“나한테 왜 그러는데! 이 개새끼가!”

눈물 섞인 절규가 터져 나올 때까지, 검지 손가락을 앞뒤로 접었다. 한 번 부러진 부위를 마치 레버처럼

휘젓는 고통이 중첩되는 것 까진 못 참았나 보네. 악기와 독기로 가득한 새파란 눈동자. 벌벌 떨리지만 의

지가 꺾이지 않은 눈을 보니 그녀의 가르침이 절로 떠오른다.

‘사람이 무서워하는 건, 결국 엉뚱한 겁니다.’

‘엉뚱한 것?’

‘우리가 무서워하는 건 인형이 아니에요. 흉가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잘 관리된 인형이죠. 버렸는데 안방

에 있는 인형이에요. 사람의 공포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온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덜렁거리며 부풀어오른 꺾인 손가락. 그걸 내려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플라스틱은, 접으면 새하얗게 변하는 게 조금 신기했어.”

“무슨 헛소리, 아악!”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천천히 손가락을 꺾는다. 여성의 비명이 울려 퍼지자 같이 잡혀온 갈색 머리 남성의

안색이 점점 새하얗게 질린다. 몇몇 놈들도 공포를 느꼈는지 CCTV 화면을 감시하던 쫄따구 몇 명이 살그

머니 관리실 밖으로 향한다.

느껴지는 주변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간다. 물론, 시선은 계속해서 손가락에 집

중한 상태. 멀쩡한 손으로 부러진 손을 감싸길래 힘을 줘서 손을 떼어낸다. 어디까지나 다치지 않도록, 상

냥하게. 눈은 마주치지 말고.

그리고 다시 한 번 손가락을 꺾는다.

“왜, 한 번 접으면 새하얗게 변하고, 반대로 접으면 조금 우둘투둘하게 갈라지지. 그렇게 접는 걸 반복하

다 보면 플라스틱 판이 뚝 하고 잘리는 걸 본 적 없어? 나는 그게 신기하던데.”

툭툭, 부러진 손가락을 양 손 위에 올려놓고 살펴본다. 슬슬 새파란 눈동자에서 독기가 사라지고 원망과

슬픔이 가득 차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 저 원망조차 사라진다면, 빈 자리에는 공포가 가득 차게 될 것이

다.

“사람 손가락도 그럴까?”

“머, 멈춰!”

우드득, 피부가 찢어지고 뼈가 뭉개질 정도로 손가락을 짓누른다. 상처 부위가 짓눌리자 마치 돼지 멱따

는 소리를 내는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구는 녀석. 발버둥이 심해지기에 손을 놔줬더니 바닥에

웅크리고 눕는다. 마치 갓난아이처럼 품 안에 손을 숨기고 앙앙 울면서.

“그만 해, 씨발! 정보를 원하는 게 아니 었어? 말 할 테니까, 제발!”

반응하지 말아라, 애원은 혼잣말이 되어야 한다. 심문 대상자에게서 얻는 정보는 쓸모가 없으며, 처음 손

을 댄 녀석은 어디까지나 보여주기 용 제물로 삼아라. 엉뚱한 이야기를 하되, 논리 있게 말해라. 이성적으

로 미친 사람이 제일 무섭다. 주옥과도 같은 가르침들.

공부는 역시 복습으로 이루어진다. 어렸을 때 플라스틱 재질의 얇은 책갈피를 반으로 접었다가 새하얗게

변해서 버렸던 기억을 떠올린다. 종이 접듯 접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플라스틱은 아니더라.

“그런데 플라스틱은 평평한 걸 반으로 접고, 다시 반대로 접는 건데... 사람 손가락은 원래 안으로 접히는

모양이지? 그러면 앞 뒤가 아니라 양 옆으로 꺾어야 하나? 옆으로 꺾으려면 다른 쪽 손가락이 거슬리는

데.”

“하지 마, 하지 마 미친 새끼야! 그만 두라고 씨발!”

송어를 썰던 나이프를 가져와 부러지지 않은 손의 중지 손가락을 반쯤 썰었을 때가 되어서야 뒤에서 울먹

이던 남성이 고해성사를 하듯 외치기 시작했다. 아퀴라가 보내서 왔으며, 몇 명이 왔고, 어째서 왔는지 등

을. 흑인 여성도 백인처럼 새하얗게 질린 상태로 추가 설명을 덧붙인다.

그 뒤로는 간단했다. 정보가 멈추면 은발의 손가락을 썰었고, 정보가 나오면 칼질을 멈췄다. 중간에 두 명

정도가 추가로 잡혀와서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다 내가 하는 짓을 보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은발 벽안의 여성이 열 손가락 대신 두 손가락을 가지게 되었을 때, 나는 새로 들어온 녀석들 중 초능력 등

급이 높은 녀석에게 딱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있지, 손가락 좀 보여 줄래?”

그러자 내가 원하는 정보가 나왔다.

아퀼라는 행동대장이라는 이름과 다르게 꽤나 신중하고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고 한다. 용맹을 상징하는

아퀼라(독수리)라는 이름과 전혀 다른 모양새. 지금만 봐도 공간 조작으로 포탈을 열어 놓고, 포탈 너머

에서 무장을 한 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부하들만 보내서 정찰과 밑 작업을 하게 하고, 본대는 포탈을 통해 역습이 오는 것을 방어한다. 아주 훌륭

한 전략이었다. 보내는 부하들도 대부분 C등급이고, 높으면 가끔 B등급까지 섞여 있으니 안심할 수 있었

겠지.

포탈 열린 곳이 지하 도시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지하 도시는 한국의 기묘한 상황 때문에 생긴 기형적인 동네다. 총기와 마약, 매춘이 엄격하게 불법이 된

동네. 인구의 1%가 B급 초능력자라는, 다른 몇몇 국가의 3배에서 10배는 되는 고위 초능력자의 어마어

마한 비율. 좁아 터진 땅덩어리와 초능력자에 대한 엄격한 가중 처벌이 만든 도시.

클럽과 매춘, 마약을 즐기기 위해 밖에서 안으로 몰래 방문하는 손님들을 제외한다면, 지하 도시의 주민

들은 60% 이상이 초능력자였으니까. 길거리에서 꼭지 가리개 나시티를 입고 대흉근을 어필하는 남창부

터, 뒷골목에서 권총을 파는 양아치까지 기본 D급, C급의 초능력자였다.

아무리 C급 세 명에 B급 두명이라는 강력한 전력이 있다고 해도, D ~ C급 수백명의 추격을 따돌릴 수 없

었다. 심지어 내 명령을 듣고 발로 뛰는 조직의 보스 였던 구울들은 대부분 B급의 초능력자였고.

“다른 애들은 필요 없고, 너희 둘 만 따라와. 얘들은 여기서 잘 감시하고 있어. 도망치려 하면 다리는 부러

뜨려도 된다. 그런데 손가락은 건드리지 말고 놔 둬.”

김세민과 이소정만 데리고 나가며 끝까지 손가락 이야기를 하자 히익, 하고 울먹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온

다.

[작품후기]

손가락(매운맛)

B급 = 상위 1% = 롤 다이아

대단하긴 한데 뭔가 미묘하게 대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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