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5화 (165/189)

새로운 이벤트

회의가 끝났고 히어로들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같은 디자인의 새카만 차량에 운전사를 하나씩 달고. 나

와 소희는 나온 김에 간만에 걸어 가겠다고 거부하고 걸어서 돌아가기로 했다. 차량으로 수십 분 운전해

서 도착 한 거리지만, 우리가 그걸 걸었다고 지칠 일은 없으니까.

‘까놓고 말해서 얼굴 보기 껄끄럽겠지...’

흐트러진 옷차림에 달아오른 상태로 짜증을 내며 현관 문을 여는 두 남녀. 어지간히 눈치 없는 사람이 아

니고서야 뭐. 찬 바람을 맞으며 달빛 아래를 거의 1시간을 걷고 나서야 소희는 조금 진정을 한 것 같았다.

“그러면 뭐, 아침부터 돌아다니자.”

결국 팔자에도 없는 뺑이를 치게 생겼지만, A급 히어로들은 그다지 불만이 없었다. 나와 소희야 지난 달

까지 B급 순찰 업무를 돌았다지만, 급하게 모인 베테랑 A급 히어로들은 그런 업무를 안 한지 꽤 오래 되

었으니까.

심심했는데 몸이나 풀자는 반응을 보이며 뿔뿔이 흩어진 다른 히어로들이 긴급 회의의 이름으로 위치 정

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하기야, 발견했는데 지원을 못 부르는 답답한 상황이 있으면 얼마나 짜증나겠

는가?

민소매를 입은 헬창 근육녀는 체육관에서 쇠질을 하는 대신 순찰 코스를 따라 조깅을 하기 시작했고, 금

발 태닝 양아치는 자연스럽게 제 구역 유흥가에서 적당한 여자를 꼬시며 헌팅을 핑계로 돌아다니기 시작

했다.

나와 소희는 대충 정리한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데이트를 하는 것처럼 시가지를 돌아다니기 시작

했다. 회의에 모인 히어로들은 언론에 얼굴이 아직 노출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소희와 나는 아니니까. 국

제 뉴스에 떴다가 국내 뉴스에 진출했으니 은밀한 순찰이고 뭐고 없었다.

“그러면 누나, 어디로 갈까?”

“이번에 새로 나온 영화 보러 갈래? 너 지난번에 보던 영화 후속편이야.”

그러니까, 나와 소희는 일종의 시선 분산용 허수아비라 봐야 하는 거지.

[야 S급(진) 지금 순찰 코스에 떴는데?]

└ A도 안 하는 순찰을 S(진)이 왜 함?

└ 진 ㅇㅈㄹ ㅋㅋㅋㅋ 어떤 새끼가 저래 부름?

소희가 바라보는 단말기 화면에 곧바로 우리들의 소식이 갱신되었다. S급 떡밥은 히어로 커뮤니티에서

인기가 있는 게 당연한 떡밥.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곧바로 사람들이 우리를 구경

하기 위해 거리로 몰려든다.

이렇게 나와 소희가 데이트를 명분으로 사람들 사이를 휘젓고 다니면, 나머지 부분을 비공개 A급 히어로

들이 뒤지는 식으로. 아퀼라 라는 녀석이 아무리 무식하다 하더라도, S급 이야기가 나오는 소희의 구역에

서 일을 꾸미지는 않을 것이다.

등잔 밑은 어둡지만 S급 초능력자의 인지 범위는 어두운 곳이 없을 테니까.

소희는 무식하게 힘만 키우거나, 유리 대포처럼 화력에만 집중한 초능력자가 아니다. 인신매매 사건 당

시 납치당한 나를 구하기 위해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른 모습이 화재가 되기도 했고. 연락도 닿지 않는 위

치로 찾아가는 것은 소희의 능력이라고 알려졌으니까.

도시 단위를 탐지해 위치를 찾아 내는 것이 초능력이 아니라 용사의 직감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다 맞는

말이다. 그러니까 아킬라인지 아퀼라인지 하는 녀석은 우리가 있는 곳에는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결국 하루 종일 야외 데이트를 하는 꼴인지라, 한 달 정도 방구석에 처박혔던 소희는

기분이 꽤 풀린 것 같았다. 협회에서 압력을 가했는지 아파트 현관에서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도 사라졌

으니까.

“형아 잘 생겼어요~”

“사진 찍어도 괜찮죠?!”

장난기 삼아 던져지는 꼬추 새끼들의 비음 섞인 괴성을 제외하고는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사진이야

이미 뉴스도 탄 마당에 거리낄 것도 없었고. 소희와 이사벨라의 싸움으로 팬이 되었다며 다가오는 사람

들 사이에 기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섞여 있지만, 직접적으로 길을 막아버리지는 못하니 패스.

결국 B급 때의 순찰처럼 사람들을 몰고 다니며 공개 데이트를 하는 꼴이 되었다. 길을 가다 만나는 사람

열명 중 네 명 정도는 우리를 알아보는 수준.

영화관에 가서 TV에 아직 등록되지 않은 최신 영화를 보며 팝콘을 나눠 먹고, 로봇 셰프가 인간조리사를

부리는 서양식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스트리머를 만났던 오락실에도 다시 한 번 가 보는 둥 우리는

다양한 데이트를 즐겼다.

“누나... 이거 언제까지 해야해?”

“그러게... 슬슬 그냥 집에 처박혀 있고 싶은데.”

2주일 내내.

영화관, 수족관, 오락실, PC방, VR 캡슐방, 미술관과 박물관과 음악회까지. 육체의 피로가 아닌 정신의

피로가 우리에게 들이닥친다. 나는 태생이 게임 캡슐에 처박혀 일생을 살아온 사람인지라 이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에 약했다.

“음... 권고 사항 내려온 거 있어?”

“한 자리에 4시간 이상 있지는 말라는데. 진짜 계속 돌아다니라는 소리인가? 이 정도면 사람들도 슬슬 이

상하다고 느낄 텐데 무슨 생각이지?”

소희 또한 운동부였다는 이점은 있지만, 14일 내내 하루도 쉬지 못하고 데이트를 하게 되니 나를 이끌어

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살살 올라온 것 같고. 나와 소희의 일상은 집에서 뒹굴 거리다 자연스럽게 들러붙

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렇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제로 집 밖에 있어야 하니 슬슬 할 일이 떨어져

간다.

“슬슬 비상 소집 해제 안 하려나?”

“그러게... 그냥 집에서 맥주 한 캔 마시면서 소파에 눕고 싶다. 오늘은 그냥 만화 카페 같은 곳 들어가서

쉴까? 아... 어차피 4시간인가?”

집돌이와 집순이 두 명에게 14회 연속 강제 외출은 참으로 강력한 벌칙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슬슬 짜증

이 나는 것은 다른 히어로들도 마찬가지. 차라리 자유롭게 추적을 하면 몰라, 정해진 구역을 빙빙 돌고 있

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헬창녀는 슬슬 유산소 말고 다른 운동을 하고 싶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금태양은 집 밖을 싸돌아 다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진득하게 호텔에서 놀겠다는 것도 방해하냐며 역정을 내고 있었다. 다른 히어로들도

언제까지 이 일에 A급 전력이 전부 매달려 있을 것인지 의문을 품은 것 같고.

그렇게 담당 구역에 쥐새끼 한 마리도 안 보인다는 역정 섞인 히어로들의 말에, 나는 문득 어떤 생각이 들

었다.

“누나, 나 좀 다녀올 곳이 있어.”

“... 그래? 몸 조심해서 다녀와.”

소희 또한,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띠딕 띠딕 전자 시계의 시간이 흐르는 미세한 소리마저 거슬리는 상황에 연거푸 냉수를 들이켠다. 불안

한 마음에 1층으로 향했다가, 요란한 클럽 음악 소리에 학을 떼며 다시 3층 사무실로 올라오기를 몇 번이

나 반복했다.

“씨발, 아무 일도 없다고? 정말로?”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보고는 아무런 특이점이 없었다지만 믿을 수가 있나. 지금만 해도 등골이 벌벌 떨

리고 팔뚝에 소름이 올라오는데. 갑작스레 들이닥친 불안한 감정은 심장부터 시작해 온 몸을 얼음으로

만든 칼날로 난도질하는 느낌을 맛보게 하고 있었다.

그 미치광이 흡혈귀 소년이 지하 도시의 중간 관리자들의 목을 뽑았다 붙였다 하며 시체 병사로 만들 때,

나를 품평하던 것과 비슷한 불안함. 차라리 그 흡혈귀가 클럽에 와 줬으면 하는 기이한 감각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무슨 일, 없었냐?”

덜컹, 하고 큰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에 화들짝 놀라 의자를 밀치며 일어나니 한심한 것을 바라보는 소년

의 얼굴이 코 앞에 있었다. 안도감과 불안감이 반반 뒤섞여 격렬히 호흡이 떨리자, 별 이상한 년이라는 것

처럼 바라보며 매도의 눈길을 보내오는 소년.

“있, 있어야 하는데 없습니다!”

“뭔 개소리야, 똑바로 설명해.”

안심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내 능력을 잘 알고 있는 부하 녀석들도 대부분 인상이 펴지고, 헛짓거리

는 아니었나 보다 하고 안심하고 있었으니까. S급 히어로를 정면에서 견제할 수 있는 사이드 킥과, 뉴스

에서 보여준 그 모습이 전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더.

“아, 그러니까... 갑작스럽게 제 능력이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명확하지가 않고 좀... 두루뭉실하

게, 방향성을 건드릴 수 없게 징징 울리는 상태여서 놀고 있는 모든 녀석들을 전부 순찰로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이 작은 흡혈귀가 지하 도시에 입성하는 것만으로 사라졌다고 구태여 말할 필요는

없겠지. 목이 뜯겨 나가고 흡수된 지하 도시의 모든 중간 관리 조직원들이 순찰을 돌아도 사라지지 않던

불안감이, 고작 한 명으로 해결된 것이다.

“야, 거리 순찰하는 애들 싹 다 돌려서 빈 창고같은 공간 확인하라 해.”

“예, 네? 알겠습니다.”

상황을 대충 보고받은 소년이 명령을 내리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녀석들. 내 명령을 듣는다 하더라도

목을 뜯었다 붙인 것은 소년이기에 충성심이라도 가진 건가. 지금 명령을 듣고 움직이는 조직 보스들이

시체 병사라는 걸, 다른 년들은 꿈에서도 모르겠지.

유일하게 자신만이 그 사실을 알고 살아 남는 게 허락받았다는 것이 마치, 거대한 괴물의 등 위에 올라타

는 것을 인정받은 기분이 들었다.

[작품후기]

프로그래밍 서적 50페이지 분량을 직접 따라 코딩하고 결과값 보내는 과제를 했습니다. 결과값만 15페

이지 14,000자에 그래프 30장 첨부하니 정말 사람 할 짓 아닌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번주에는 제발

과제가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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