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벤트
남자 친구의 화는 가슴을 만지게 해 주면 풀린다는 우스갯소리와 같이, 결국 왕성한 성욕은 모든 것을 무
찌르게 되어 있었다. 애국심이나 충성심으로 가득 한 요원도 결국 미인계에 넘어간다는 점을 생각해 보
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발에 채여 떨어진 이불 위에 대충 던진 회색 속옷이 툭 하고 떨어진다. 멋은커녕 디자인도 없이 그저 가슴
을 가리기 위한 목적에만 충실한, 이 세상의 여성다운 브래지어가. 팔꿈치로 슥슥 기어 내려가 풍만한 가
슴 아래로 파고든다.
뺨에서 느껴지는 매끈한 복근의 감촉, 누운 자세 때문에 머리 위를 살며시 눌러오는 묵직한 가슴의 감촉,
그리고 얇은 고무줄 반바지 아래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소희의 열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희는 말 한마
디 없이 계속 단말기를 붙잡고 있었다.
그런 플레이다, 이거지?
간만에 호승심이 돋아나는 상황에 그대로 입을 맞춘다. 입술 너머로 느껴지는 달아오른 피부는 소희가
분명 달아올랐음을 보여주지만, 그녀는 별 일 없다는 것처럼 조용히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단말기 스크린 움직이는 미세한 기계음만이 가득한 안방에서, 나는 소희의 반바지 너머로 입을 맞췄다.
나와 소희의 단말기에서 동시에 알람이 울리기 전 까지.
※
달리는 차 안은 불쾌한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나다니는 차량 하나 안보일 정도로 야심한 밤, 조용한
도로를 달려 협회에 도착할 때까지. 아마 소희의 머리 속에서 천사들에 대한 이미지가 수직 하락하지 않
았을까?
“자세한 내용은 회의실에서 들으시면 됩니다.”
아파트 앞에서 계속 기다리던 운전수가 고개를 움츠리고 후다닥 차를 몰아 달아났다. B급과 A급에 익숙
한 협회 고위직으로 보였지만, 화가 난 용사의 여파는 견디기 힘겨웠나 보다. 하기야 단말기의 알람이 온
타이밍을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지.
고무줄 반바지를 끌어내리고 속옷을 옆으로 제쳐 젖어 들어가기 시작하는 살두덩이에 입을 맞추는 타이
밍에 긴급 출동 메시지가 왔으니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심지어 히어로가 출동 명령을 무시하고 못 들었
다는 변명을 막기 위해, 긴급 출동 명령은 무음 모드로 돌려 놓을 수도 없었다.
쩌렁쩌렁 돌림 노래 마냥 울리는 알람 이중주 소리에 급하게 옷을 걸치고 현관으로 나오니 안내인이 대기
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익숙한 회의실로 들어가니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회의실은 죽어가는 천사를 맛나게 먹었던 그 공간의
입구인 회의실 쪽이고,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위 능력자와 담당자들은 천사의 계약자들이었으니까.
‘뭘 야려, 씨발년이.’
내가 악마와 계약한 것이 보이는지, 초능력자의 등 뒤에서 눈을 옆으로 기분 나쁘게 째고 노려보는 모습
에 짜증이 좀 날 뻔했다. 어차피 신의 명령이 없으면 기계 마냥 할 일만 처리하는 놈들이니까 불이익이 생
길 일은 없겠지.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말이다.
물론 먼저 공격하면 히어로 빌딩에서 남의 동네 대기업까지 허공에 불덩이를 쏴 재끼며 무력 행진을 하는
또라이 집단으로 변신하지만, 이미 천사 하나 죽었다고 저 지랄이 난 걸 보고 다시 건드리는 놈은 없을 거
다. 겨우 잠잠해진 벌집을 다시 건드릴 정도로 멍청한 놈들이면 악마들이 이미 찾아냈지.
“전부 모이셨으니, 시작하겠습니다.”
테이블 한 가운데에서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조직도가 떠오른다. 맨 위의 보스부터 아래의 중간 보스나
회계 담당, 돈 세탁이니 행동 대장 등 다양한 하부 조직들로 잘 짜여서 테이블 부터 화면을 가득 채울 정
도.
“유럽 쪽 히어로 협회 본부에서 협력해 준 자료입니다. 다국적 빌런 조직, 카모라(Camorra)가 아시아 쪽
마약 유통에 손을 뻗으려 하는 정황이 포착되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일본 야쿠자와 마찰이 일어났다는
정보와, 중국 해안을 따라 침투한 서양인의 정보가 있으니 신빙성은 꽤 올라갔다고 봅니다.”
멋들어진 챙 모자를 쓴 양복의 중년 여성과 다양한 빌런들. 예쁜 년 못난 놈 가지각색으로 다 모여 있었지
만, 한 가지는 통일되어 있었다. 잘 차려 입은 양복과 가슴 깃에 달린 뱃지. 다국적 빌런 연합이지만 이탈
리아 마피아를 모티브로 삼은 녀석들인가?
“그래서, 지금 우리를 소집한 이유는 뭔데?”
껄렁껄렁한 금발 태닝 양아치가 질겅질겅 씹던 담배를 뱉으며 말했다. 남녀 역전 세계에서도 금태양이
살아 움직이는 꼴을 보니 기분이 묘하네. 단단하게 단련된 근육질의 어깨나 쫙 빠진 허리를 보면 격투기
에 능숙해 보이는 인상인데, 이쪽 세상에서는 공포 영화 초반부에 섹스하다 칼 맞고 뒤지는 이미지라니
참.
껄렁한 금태양의 말에 몇몇 사람들이 동조하고 나선다. 그 중에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는 소희도 포함
되어 있었다. 소희가 생각보다 짜증이 많이 난 모양이다. 하긴 나 같아도 여자가 한번 쪽 빨아주고 본방
들어가려는 순간 사건이 터지면 못 참는 건 마찬가지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채운다. 급 높은 사람들만 모았는지 10명 조금 넘는 숫자지만 야밤에
현관문 앞에서 노크하며 데려오는 일에 짜증이 잔뜩 나 있었는지 목소리가 조금씩 커진다. 심지어 우리
가 있는 곳은 서울-경기 내륙 지방의 한 가운데인데 갑자기 해안가 치안 이야기를 하니 짜증이 확 치솟은
모양.
“자자, 진정들 하시고. 저희가 아무 이유 없이 이 야밤에 모셨겠습니까.”
홀로그램이 확대되며 조직도의 중간 지점을 크게 늘인다. 악성 곱슬머리가 심각한 라틴계열의 여성. 까
무잡잡하게 탄 피부와 새카만 머리카락이 묘하게 어울리지만, 이쁘다고 말하기는 힘든 인상이었다. 굳이
인상을 따지자면 고생을 많이 한 인상이라 중남미 농부같이 생겼다고 해야 할까.
“이제, 이해가 조금 되신 것 같군요.”
아퀼라(Aquila)라는 이탈리아식 이름 옆에는 짧은 단어 세 개만 존재하고 있었지만, 이 곳에 모인 사람들
이 입을 닫기에는 충분했다.
행동대장 아퀼라, A급, 공간 조작.
희귀하기로 유명한 공간계 초능력자가 A급까지 되어 있으니 모여 있는 사람들이 놀라는 거지.
초능력자가 썩어 넘쳐나고 트럭이랑 몸싸움으로 승리하며 화력을 집중해서 63빌딩을 단숨에 소각시키
는 B급 초능력자들이 인구의 1%를 차지하는 이 미친 세상에서도 공간에 관한 초능력자는 희귀하기 그
지없었다.
대부분 단순하게 육체 강화나 원소를 다루는 능력이니 발전소나 인명 구조, 치안 유지 일자리만 만들어
두면 녹아들 수 있을 수준으로. 하지만 적다는 것이 없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당장 소희의 할머니인 전희
민만 보더라도 S급 공간 조작 능력자로 초능력 양성 교육 기관에 딱 자리잡고 있으니까.
그제서야 사람들의 눈가에 진지함이 깃든다. 대부분의 빌런의 경우 일반 모드의 테러리스트나 강도와 다
를 게 없었다. 육체 강화야 맞붙어 싸우는 히어로도 마찬가지니까. 결국 숨길 수 있는 폭탄이나 총을 들고
다니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막말로 폭탄 조끼를 입은 광신도가 자폭을 하는 것과, 화염 계열 빌런이 자폭을 하는 것은 거의 다를 게 없
으니까. 육체 강화부터 원소를 다루는 능력, 독과 관련된 초능력들이 그랬다. 하지만 몇몇 특수한 능력은
취급이 전혀 달랐다.
자폭을 하면 시민을 보호하면 될 일이고, 독을 뿌린다면 육체 강화 능력자가 진입하면 되며, 최악의 경우
시민의 안전을 우선시하고 재물을 포기하면 된다지만 그것조차 힘들게 만드는 다양한 초능력들.
인질을 세뇌해서 즉각 빌런 조직의 말단 병사로 써먹거나 히어로가 시민을 공격하게 만들 수 있는 정신계
능력, 독도 버텨낼 정도로 강화된 육체와, 뛰어난 과학력으로 인한 제독 장치도 무시하며 육체와 정신을
좀먹는 저주 계열의 능력, 그리고 수사 방법의 방식을 완전히 바꿔야 하는 공간계 능력.
“에이 씨, A급 공간 능력자면 어딜 가도 억대 연봉 빵빵하게 받으면서 다닐 텐데 왜 저 지랄이야.”
“그래서, 저 년이 어쨌다는 거요?”
짜증을 내며 의자에 푹 걸터 앉는 금발 태닝 양아치의 옆에서, 목소리가 우렁우렁한 여성이 내 머리통만
한 주먹을 꾹 쥐며 으르렁 거리듯 말했다. 딱 봐도 육체파 헬창이라는 점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목
소리에, 설명하는 사람이 목소리를 살짝 떨며 못다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간다.
“그... 아퀼라의 부하들이 중국과 일본을 정찰하듯이 돌아다녔는데 해안을 감시하는 히어로들이 저 녀석
들의 움직임을 감시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지금 드러난 두 명의 모습도 히어로 협회의 감시가 아닌, 카모
라와 적대적인 움직임을 보인 빌런 조직에서 얻게 된 자료구요.”
움직이는 것은 한, 중, 일 세 곳의 협회에도 들키지 않았으며, 실질적인 분쟁이 있었음에도 그 것을 직접
싸운 당사자만이 알고 있을 정도의 은밀성. 이 곳에 모인 사람들도 나름 빌런과 싸운 베테랑 들인지라 그
게 무슨 뜻인지 충분히 이해했다.
수십명의 인원이 그 정도로 은밀하게 움직인다면, 결국 A급 공간 조작 능력자가 행한 일이라고.
특히나 중국은 정신 수양으로 인해 뛰어난 초능력을 보유한 티베트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학살한 이후,
하나의 중국에 반대하는 초능력 집단을 견제하기 위해 얼마나 돈을 쏟아 부었는지 국제 정세에 관심이 있
는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우스갯 소리로 길가에 있는 가로수 나뭇가지의 수만큼 CCTV가 존재한다는 나라인데, 아무리 봐도 영상
은 시가지에서 수십명의 난투극을 벌이는 모습이었으니까.
“그러니, 지금부터 협회의 모든 A급 인원들에게 특별 수색 업무가 할당됩니다. 평소의 순찰 업무와 달리
평범하게 거리를 돌아다녀 주십시오.”
감지 능력이 있다면 변장한 사람을 찾으라 하고, 감지 능력이 없다면 사진 기사나 개인 방송인 처럼 수상
한 사람을 찍어 보내라는 요청을 듣고 사람들이 우르르 흩어진다.
[작품후기]
선작수가 급격히 늘어 4천을 넘다니 생각도 못한 일이네요.
추천글 덕분에 신규 유입 독자님도 많아지고, 질문도 달려서 대충 대답해봅니다.
Q&A로 본편 먹는건 너무 날로 먹는것 같으니까요
1. 남녀 역전인데 초반에 왜 여고생이 강간당할 뻔 하는가?
스캐빈저나 부랑자, 떠돌이들이나 아포칼립스를 보면, 예쁘장한 소년들도 우락부락한 여자들에게 따이
는 걸 생각해서 쓴 부분입니다. 주인공이 처음 해보는 남녀 역전 세계 모드를 못 알아 차리게 하기 위한 부
분이구요.
2. B급 초능력자가 딱밤으로 트럭도 날리고, 63빌딩도 태운다는데 1%면 많은게 아닌가요?
작품 내에서 '초능력은 하나에만 특화된 기술' 이라고 게임 풍으로 설명을 했는데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
지 모르겠네요. 아마 게임과 엮어서 설명을 드린 것 같은데. 딱밤으로 트럭을 날려도 누군가 뒤에서 얼음
화살을 박아넣고, 화력을 집중해서 불을 지르다 육체 강화 능력자한테 주먹 한 번 꽃히면 죽습니다. 능력
에 따라 육체 강화의 정도가 다르다고 설명한게 이 부분입니다.
거기에 초능력자가 많은 이유는 미국의 총기를 떠올리고 잡은 컨셉입니다. 미국 사람들 다 총들고 다니
는데 기분에 따라서 총을 막 쏘지 않죠. 왜냐하면 쟤도 총이 있으니까. 이 세상의 치안은 그렇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지하 도시로 도망친 사람들 처럼, 아무리 강한 총이 손에 쥐어져 있어도 남한테 쏘는 사람은 한
정되어 있거든요. 초인의 기준인 B급 초능력자를 국가마다 0.1~1%대로 잡았으며, 이 정도 숫자면 명동
한복판에서 지랄하는 순간 나도 다른 초능력자한테 죽을 수 있다는 걸 몸으로 느끼는 수치라 생각했습니
다. 화나서 손에 화염구 만들었는데 그거 보고 빌런이라 오해한 용감한 시민이 등 뒤에서 쑤시면? 하고
스스로 참는거죠.
3. 북한은 어떤 꼴인가요?
제가 1구역(서울)부터 5구역(제주)까지 잡아둔 것과 군대 이야기로 북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작중 북한
은 지금의 북한에 초능력 스킨만 입혀둔 상태입니다. 초능력자였던 김일성이 초능력자를 신격화하며 세
운 나라. 초능력자는 백두 혈통에게 선택 받은 우월한 일꾼이라고 세뇌 받고 있는 주민들이 있습니다. 따
라서 자연스럽게 초능력자에 의한 일반인 차별이 은연중에 자리 잡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 초능력자의
존재로 인해 무력 도발은 줄어든, 얌전한 북한입니다.
4. 용사에 대하여
작 중 용사는 성검을 뽑은 선택받은 고결한 사람! 이라기 보다는, 혼자 확장팩 하는 테스터 유저에 가깝습
니다. 초능력자 애들은 만렙이 30렙이라 첫 인던 돌고, 천사 악마 애들은 패치 후 50, 70레벨 던전을 돌고
있을때 용사와 마왕만이 만렙 110레벨 찍고 있는 모양새라 보면 이해하기 편하실겁니다. 30렙 따라지들
아무리 모아봐야 공성전에서 마왕의 목을 따려면 같은 110레벨이 와야겠죠? 그 때문에 마왕은 용사만,
용사는 마왕만이 죽일 수 있는 존재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무튼간에 이런 소설 선작이 4천이 될 때 까지 다들 따라오셔서 감사합니다. 원래는 소설 속에서 자연스
럽게 녹여야 하는 내용이지만, 지난번에 말했듯이 캐릭터를 잡고 사건 위주로 글을 적는 모양새다 보니
사소한 설정을 등장시키지 못하고 있네요.
궁금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코멘트 다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