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벤트
어색하고도 기묘한 침묵 속에서 차량은 한적한 도심지를 주행했다. 고른 숨소리와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
가 어색한 차량 속 공기를 좀먹고 나서야 멈춘 차량. 새하얀 담장에 감싼 넓은 마당이 있는 집. 아무리 봐
도 식당은 아니어서 살짝 눈치를 보니 소희의 표정이 살짝 희게 변한다.
식당이 아니라 집이구나? 하긴 식당에서 이야기하기는 좀 그런가?
드라마에서 나오는 재벌 집 같이 생긴 담장 철문이 자연스럽게 열리고 차량이 마당 안 쪽으로 들어간다.
솔직히 말하자면 현대 모드에선 맨날 초고층 아파트나 펜트 하우스 같은 곳에 살아서 정원 딸린 저택은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 마차를 타고 정원에 들어간 적은 있어도 자동차를 타고 집 정원을 가로지르는 건
거의 처음이라서.
잘 다듬어진 정원 한 구석에 깔린 자갈밭. 우드득 소리를 내며 자갈밭 위로 차량이 지나가니 벨소리 하나
없이 차고지의 문이 열린다. 슬그머니 멈춘 차량에서 소희가 먼저 내리더나 반대편으로 돌아와 문을 열
고 나를 에스코트해준다.
낮은 기계음을 울리며 올라가는 차고의 문과 자연스럽게 차고 속으로 들어가는 고급 자동차. 차고 자갈
길에서 옆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와 잘 다듬어진 정원의 잔디들. 이전 세상 아이돌로 플레이 할 때 정원 딸
린 집 관리가 얼마나 귀찮은지 들어 보기만 했는데 이렇게 보니 참 예쁘기 그지없었다.
말이 부쩍 없어진 소희의 손을 잡고 차고로 이어진 자갈길에서 정원의 곱게 꾸며진 정원길을 걷는다. 둥
글둥글한 돌로 만들어진 길에는 물자국이나 이끼 따위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매일 가꾸는 걸까, 아니면
정원 관리사를 따로 둔 걸까. 아마 관리자가 있으려나.
“아버지, 저 왔어요.”
정원을 지나쳐 새하얀 현관으로 향하니 감시카메라 렌즈가 이쪽을 슥 스캔한다. 달칵, 문 열리는 소리와
코 끝으로 파고드는 진한 고기 냄새. 갈비찜이라도 한 건지 넓은 집 안에 달짝지근한 향이 감돈다.
“그래, 어서 오렴. 네가 하늘이구나?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소희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다르게 내가 생각하던 이미지와 똑같았다. 단정하게 차려 입은 회색 정장에
하얀 셔츠, 녹색 넥타이. 잘 빗어 넘긴 머리카락이 단정히 정리되어 있어서 한 눈에 봐도 지식인이라는 느
낌이 와 닿았다.
“네 엄마는 어디로 갔니?”
“주차하러 가셨으니까 곧 오실거에요.”
“같이 들어오지 그랬어. 식사 준비되려면 조금 남았으니까 네 방 구경이나 시켜주고 있으렴.”
떠밀리다시피 거실을 지나 소희의 방으로 향한다. 투덜대더라도 가족 관계가 나쁜 것은 아닌지 소희의
방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컴퓨터 한 대. 뻣뻣한 종이 때문에 읽지 않은 게 확실해
보이는 오래된 자기계발서들 몇 권.
“음, 앉을까?”
나는 책상 의자에 앉고, 소희는 침대에 앉는다. 양복 웃옷을 벗어 두라는 말에 넘겨주니 자연스럽게 소희
가 자신의 옷장에 집어넣는다. 그 뒤로 한 마디도 없이 달달 다리를 떠는 게, 어지간히 부담스럽나 보다.
제국에서 귀족들과 시종에게 둘러 쌓인 귀찮은 맞선보다 이게 훨씬 낫다고 생각하며 소희를 계속 바라보
고 있어도 그런 시선을 느끼지도 못하는 소희. 긴장한 모습으로 달달 떠는걸 보니 슬슬 식사 시간이 다가
온다. 대체 어떤 소리를 들었길래 저리 긴장한걸까?
※
소희의 가족은 뭐라 해야 할까, 정말 ‘생긴 대로 논다’ 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가족이었다. 털털한 어머니
와 얌전하고 지적인 아버지, 무뚝뚝한 할머니까지. 사람이 왜 관상을 믿는지 알게 될 정도로 눈에 보이는
세 가족.
“그래? 이 년이 그런다고? 그래도 남자 하나는 잘 만났네!”
초능력의 경지는 조금 낮은 건지, 식사에 곁들여진 약주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소희의 어머니가 껄
껄 웃으며 잔을 내려놓는다. S급에 도달한 소희와 소희 할머님은 술을 병째 비워도 취하지 않을 것이고,
소희 아버지는 술잔이 오가니 얌전히 소희 어머님 곁에서 시중을 들다시피 한 결과였다.
“야 소희야, 따라 나와봐라.”
“왜요, 어머니.”
“어머니는 무슨, 이럴 때만 어머니지. 나이 서른 먹고 잘만 엄마 엄마 찾았으면서.”
“아, 엄마!”
그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소희의 어머니가 소희를 잡아 끌고 나간다. 그 직후 식탁 위에 널브러진
술병 몇 잔을 들고 자연스럽게 소희의 아버지가 퇴장하자 테이블에는 나와 소희의 할머니만 남게 되었
다.
“얘, 아가.”
피부를 짜릿하게 만드는 목소리. 아마 술에 취해서 막무가내로 데려간 것도 이런 이유였을까? 역시 지난
번 테러 사건때에 느낀 거지만 장난 아닌데. 소희가 후다닥 달려오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식탁을 감싸는 무형의 기운 안에서, 백전연마의 노파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소희가 잘 해주니?”
순간 손에서 힘이 빠져 물잔을 깨트릴 뻔했지만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아니, 온 가족 다 물려 놓고
식탁에 소희가 느끼지 못할 보호막까지 쳐놓고서는 묻는 게 고작 저거인가? 술기운 하나 없는 두뇌를 최
대한 굴린다.
“네, 누나는 늘 잘 해주죠.”
“그래... 애가 가끔 험한 모습을 보여주더라도 심성은 착한 아이란다. 여자는 커서도 애라는 말이 있는데,
나이 상관없이 네가 잘 돌봐주면 좋겠구나.”
허공에서 술잔을 집어든 그녀가 입술을 적실 정도로 홀짝이며 말한다. 일종의 무력 시위인가 싶었지만
주름 가득한 인자한 인상과, 총기가 가득한 눈동자에는 적의가 아닌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 고마움과 미
안함, 그리고 약간의 걱정.
‘... 아, 테러 사건 때 뒷정리를 이 할매가 했던가?’
고등학교 테러 사건 때, 소희는 나를 구하기 위해 테러범을 사살했다. 공식적인 발표로는 S급 초능력자인
할머니, 전희민이 공간 조작으로 인질을 구출. 그 와중에 반항하다 좌표가 휩쓸린 일부 빌런이 사망했다
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그래, 심지가 굳은 아이구나. 그러니까 영웅의 길을 걷는 거겠지.”
실제로 소희는 많은 빌런을 죽였다. 용사로 각성하는 여파 때문에 힘조절을 못해서 좀 잔인하게 죽인 애
들도 있었지. 레이저로 깔끔하게 절단하거나 꿰뚫는 게 아닌, 타인의 초능력을 흡수했다 방출하는 식으
로.
꼬챙이에 꿰인 시체부터 반으로 갈라져서 죽은 시체, 불에 녹은 시체까지 다양하게 양산했으니까 걱정이
좀 되었나 보다. 걱정의 대상은 하나가 아니라 두 명 전부. 소희도, 나도 그녀가 보기에는 어린 나이니까.
생각해보면 동네 공익이 10명 넘는 사람을 직접 죽였으면 정신상태를 걱정하는 게 우선인데, 게임 감성
에 너무 찌들어 있었다. 용사로 각성한 소희와 익숙한 내가 넘겼지만, 그녀의 가족들은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겠지.
자기 딸내미가 테러에 휩쓸렸다가 사람을 10명이나 죽이면 일단 걱정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어쩌면 꽤 몹쓸 짓을 소희에게 했단다. 지금 생각해 보면 헛된 걱정이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
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겨운 트라우마로 남을 게야. 아가, 내가 그 때 느끼기로는
소희가 네 앞에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니?”
3년 전의 일을 떠올린다. 피투성이가 된 복도, 강간당하는 남학생들, 지루해서 멍하니 바라보던 시계, 복
도에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빌런들, 호기롭게 달려들다 반으로 갈라져서 죽은 빌런과 역한 고기 타는
냄새.
‘좆도 상관없긴 한데...’
제가 사람 뒤지는 모습에는 많이 익숙하다고 말하자니 분위기가 너무 깨질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물고 고
개만 살포시 숙였다. 지금 눈 마주치면 웃을 것 같아.
“그래, 그래도 소희 옆에 있어줘서 고맙구나. 어쩌면 네가 있어서 저 아이가 굳건하게 버틴 걸지도 모르
지. 저 녀석은 죽어도 인정하지 않지만, 무른 부분이 너무 많거든. 그 때문에 히어로가 되는 걸 막았는데
돌고 돌아서 일이 이렇게 되어버리니.”
술기운 가득한 한 숨이 퓨 하고 흘러나와 노파의 주름진 얼굴을 지나쳐 사라진다.
“아가, 다시 한 번 잘 부탁한단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해 오는 모습에 마주 고개를 끄덕인다. 그와 동시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소희
가 성큼 성큼 다가오더니, 내 팔짱을 끼고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아니, 누나?”
“식사 잘 했어요! 나중에 뵈요 할머니!”
일단 거스르지 않고 따라서 현관으로 향해 신발을 신으니, 흐뭇하게 웃는 소희 할머니와 어머니의 모습
이 보인다. 대체 무슨 상황이길래 저러나 궁금해하는 와중,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소희의 아버지가 내 정
장과 무언가를 같이 들려준다.
“얘, 아무리 급해도 네 남편 될 사람 물건은 챙겨 줘야지. 우리 애 좀 잘 부탁해요.”
그와 동시에 거실에서 툭 튀어나온 아버지가 끼어들어 소희를 놀린다.
“그럼 그럼. 임마, 남자도 여자 하기 나름인데 잘 챙겨야지. 10살 차이가 나는데 니가 연하도 아니고.”
낄낄 능글맞게 웃는 목소리에 소희가 고개를 팩 돌리고 현관에서 나가자, 차키가 휙 하고 날아온다. 얼떨
결에 받으니 웃음을 그친 소희 어머니가 가보라며 손사래를 치며 말한다.
“갈 때 운전해서 가고. 어차피 초인이라 취하지도 않았을 거 아니야. 아니면 어디 오붓한 곳에 데이트나
가던가.”
이 사람, 역시 안 취했었네. 술냄새가 나고 얼굴이 붉지만 심장 뛰는 소리와 피 흐르는 게 정상이었다. 대
체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소희가 저런 반응을 보일까. 그리고 양복 사이에 있는 이 두툼한 건 뭘
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소희는 씨근덕거리며 차를 출발시켰고, 등 뒤에서는 세 가족이 단란하게 우리
를 배웅하고 있었다.
[작품후기]
교수님들은 과제를 낼때 짜고 치는 걸까요. 왜 모든 강의 진도가 다른데 과제를 주는 기간은 겹치는 것이
지? 뭐지? 사실 교수들끼리 내통하며 학생들의 고통을 위해 타이밍 맞춰 과제를 주는 것인가? 왜 진도가
늦은 강의와 진도가 빠른 강의가 동시에 과제를 주는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