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1화 (161/189)

새로운 이벤트

청양 고추 썰어 넣어 얼큰하게 끓인 콩나물 국 때문에 사용도 안하고 냉동실에 들어간 산더미처럼 쌓인

손질된 멸치들. 육수를 우리면 일주일은 마실 양의 멸치를 손질하고 나서야 소희는 소파로 돌아왔다.

자기보다 10살 어린 20살 애인과 부모님과 할머니가 함께하는 가족 식사 자리가 어떤 기분일지 내가 알

리 있나? 내가 평생 느끼지 못할 감정에 전전긍긍하는 소희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주방에서 물을 한 잔

따라 마신다.

“누나, 목이 그렇게 말라?”

“아냐, 미안.”

TV를 보다 말고 30분동안 5번째 반복된 일이었다. 거의 5분에 한번 꼴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모습이 귀엽다 못해 거슬릴 수준. 안 그래도 TV에서 하는 영화가 꽤 흥미로운 상황인데 옆에

서 너무 돌아다니니 정신이 없다.

소파 테이블 위에 주전부리와 마실 것을 챙겨온 소희의 허벅지에 그대로 누워 버린다. 당황했는지 엉덩

이를 비비적거리며 자세를 바로잡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또 5분쯤 뒤에 주방 식

탁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을테고, 영화 결말 부분에서 그러면 짜증이 좀 많이 날 것 같았으니까.

“하늘아?”

“누나, 가만히 좀 있어. 영화 얼마 안 남았는데 왜 그렇게 왔다 갔다 해?”

히어로의 머릿수가 많다 보니 히어로 장르가 사라진 세상. 로맨스에도 초능력자가 나오고 공포 스릴러

장르에서도 초능력자가 나오니 섹스어필이 없는 영화의 경우 매우 흥미진진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보고

있는 스릴러 영화만 봐도 그렇다.

살인 사건을 목격한 주인공, 주변에서 일어나는 으스스한 사건들. 목숨의 위협을 받는 주인공은 과연 진

짜 범인을 찾을 수 있을까? 같은 흔해 빠진 뼈대에 초능력자가 들러붙으니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CCTV에 찍히지 않고 접근했다는 내용에는 공간이동 능력을 지닌 수상한 이웃 사람이 진범처럼 보이고,

증인은 있는데 증거는 사라진 상황에서는 환각 능력을 지닌 전과 3범 사기꾼이 의심스러워 보인다. 그 와

중에 남녀 역전까지 섞여 있으니 보는 재미가 차고도 넘쳤다.

물론 이쪽 세상 사람들에겐 너무 뻔한 영화라 허벅지에 힘을 빡 주고 집중하던 소희가 슬그머니 단말기를

들어 올려서 웹 서핑을 하게 만들었지만 뭐 어때. 내가 재미 있으면 된 거지.

“그래, 차라리 단말기를 해. 얼굴 가리진 말고.”

“알았어.”

보드라운 허벅지를 느끼며 영화에 집중한다. 정말 잘 만든 영화는 아니어서 B급 감성이 풀풀 풍기지만,

서스펜스 스릴러에 초능력이 섞였다 보니 참신한 맛이 난다. 사실 진범은 무능력자로 거짓 등록되어 있

던 경찰이라는 반전과 함께 이웃 사람과 사기꾼이 경찰을 역으로 추적하기 시작했으니까.

B급 감성임에도 배우는 진짜 초능력자여서 그런지 어색함이 없었다.

사실 수상해 보인 이웃 사람은 자기 자식을 걱정하는 애 아빠라서 주인공과 경찰 주변을 돌아다니며 소문

을 수집하는 중이었고, 범인으로 의심받던 환각 능력자인 사기꾼은 살인범을 자기가 잡아 협회에 넘기고

사법 거래를 할 생각이었다는 나름의 반전. 소희는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인지 추격씬이 시작되고 반전이

드러나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명작이라 평가하기는 애매한데 초능력으로 좆밥 싸움이 재미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에 푹 빠져 있으

니 소희의 손이 또 불안하게 꼼지락거린다. 한창 유부남 애아빠가 분리수거 로봇을 진범인 경찰 머리 위

로 텔레포트 시켰다가 아저씨 소리를 듣고 발끈하는 장면이 지나가고 신호등에 환각을 씌워 무단횡단을

방해하는 사기꾼의 모습이 나오는 중이라 집중하고 있는데.

조금 짜증이 나서 단말기를 들지 않은 왼 손을 그대로 내 품에 꼭 껴안으니 어색하게 굳어버린 한 손. 침대

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넙적한 가슴이 좋다고 그렇게 뺨을 문대더니 이럴 때에는 순딩이 같은 모습을 보여

준단 말이지.

결국 도주하던 경찰이 사기꾼과 애 아빠의 합동 공격으로 시야가 가려진 상태에서 다리 밑에 텔레포트 된

장바구니에 발이 걸려 자빠지고 주인공에게 제압당할 때쯤, 소희의 뺨은 시뻘겋게 익어 있었다. 배우로

나온 사기꾼이 금발 양아치 갸루처럼 생겨서 살짝 꼴렸는데 그대로 소파에서 한 번 할까 싶었지만 어느새

단말기에서 알람이 울린다.

삐빅 소리를 듣자 마자 시뻘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소희가 먼저 샤워를 하러 들어간 사이, 마법으로 대충

머리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새록새록 솟아났지만 약속 시간까지 빠

듯해서 포기.

탐욕이 보내준 옷장 구석에 처박혀 있는 맞춤형 정장을 꺼내 입는다. 새하얀 셔츠에 파란 넥타이, 무난한

검은 정장. 면접을 보러 가는 복장을 입고 거실로 나가니 흰 색 웃옷과 검은색 치마로 나뉜 투피스를 입은

소희가 안절부절 못하며 단말기와 휴대폰을 한 손에 하나씩 들고 번갈아 보고 있었다.

“누가 보면 S급이랑 싸우러 가는 줄 알겠네.”

“어, 하늘아... 차라리 이사벨라랑 한번 더 싸우는 게 나을 것 같아...”

구겨진 목 칼라를 단정히 다듬어주자 우는 소리를 하는 소희의 모습이 신선하기 그지없었다. 하긴 치마

차림을 한 소희를 오랜만에 보는 것 같긴 한데. 남녀 역전 세계라 할지라도 복장은 그대로였지만, 험하게

날뛰는 여성 히어로들은 대부분 바지를 입었으니까.

남자가 치마를 입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이 바지를 입고 다니는 세상. 신경을 쓰니까 그제서야 바

깥 풍경이 이해가 갔다. 실용성을 포기하고 노출을 선택한 남자들. 그러니까 날이 덥지도 않은데 3부 반

바지를 입고 다니는 거였네. 치마를 입지 않고 3부 반바지를 입어 무릎과 허벅지를 드러낸 게 다행이긴

하다.

반대로 여자들은 편하다는 이유로 반바지에 후드 티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꾸미는 남자의 수가

적은 것 처럼, 꾸미는 여자가 적으니까 하이힐이나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없는 거지.

치마를 입어본 적 없어서 반바지와 치마 중 누가 더 시원한지 정답은 모르지만, 지들이 편하니까 반바지

를 입고 다니는 게 아닐까? 남녀를 떠나 길거리에서 속옷 노출은 창피하니까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반바

지를 선택한 건가.

뭐, 일단 양아치라고 헐렁한 셔츠 때문에 가슴골이 드러난 금발 날라리 분장을 한 여배우의 모습은 뭔가

뻔하면서도 끌리는 맛이 있었다. 세계가 바뀌어도 금발 태닝 양아치는 유지되는 것인가... 생각해보면 죽

자고 뛰어 다닌 배우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다 바지를 입고 있었지. 치마를 입은 사람들은 대부분 길거

리의 엑스트라였고.

“그래서 누나, 아직?”

“어, 아니, 어, 나가!”

남녀역전 세상의 옷차림에 고찰하기를 10분. 아직도 신발장에서 구두를 신고 있는 소희를 재촉하자 떨리

는 목소리가 되돌아온다. 농담 삼아 건드리긴 했지만 긴장을 진짜 많이 했구나. 그녀가 말하기를 ‘부모님

의 시선이 미묘해서 눈 마주치기가 힘들다’ 라고 투정을 부렸던 거 같은데.

실시간으로 멘탈이 바스라지고 있는 소희의 팔짱을 낀다. 곱게 다린 양복이 구겨진다고 한 소리를 한 소

희였지만 정작 팔짱 자체는 기분이 좋은가 보다. 물론 엘리베이터 내부에서의 이야기였다. 아파트 로비

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마자 느껴지는 몇몇 기자들의 기척. 달달 떨리던 소희도 그 기척을

느꼈는지 살포시 인상을 찌푸리는 와중에 귓가에 낯선 소음이 들려온다.

빠앙- 커다란 경적이 아파트의 고요를 깨트린다. 초능력자가 아니라면 느끼기 힘든 수준의 미세한 기척

이 아니라, 아파트 꼭대기층에서도 쌍욕을 내뱉고 깨어날 수준의 소음. 대체 누가 저런 몰상식한 짓을 하

나 의문이 들었지만 곧바로 의문이 해결된다.

“아 씹... 엄마?”

무의식처럼 작게 짓씹어 내뱉는 소리.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시끄러운 경적 소리와 당황한 기자들의 소음

때문에 놓칠 수 있던 작은 소리였지만 내가 그럴 리 있나. 소희도 그 것을 알아차리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

른다.

“뭐하니, 얼른 타!”

한 손은 운전대에, 한 손은 창 밖으로 꺼내 휘휘 내젓고 있는 중년의 여인이 우렁차게 소리치자 소희의 얼

굴이 다시 한 번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초능력이라도 사용했는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는 기자

들의 모습이 보여 신기할 따름. 세상에, 기자가 줄어도 열 명은 되는데 소희는 초능력 수저인 건가.

“얘, 네가 하늘이구나? 얼른 타렴. 내가 저 귀찮은 녀석들을 오래 잡아 두지는 못하거든.”

머리 속 소희의 부모님은 양복 정장을 입고 오호호, 엇험 엇험 하는 상류층 중년 간지였는데, 여기 있는

건 그냥 잘 차려 입은 동네 아줌마랑 다른 게 없는데? 소희의 손에 이끌려 뒷좌석에 타자 마자 끼이익 타

이어 소리가 날 정도로 급 발진한 자동차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난다. 등 뒤에서는 뒤늦게 움직이기 시작

한 기자들의 고함 소리와 찰칵 소리가 함께 울려 퍼진다.

“아니, 아버지가 안 말렸어요?”

“얘는, 뭘 아버지야. 맨날 엄마 아빠 찾으면서 애인 앞이라고 폼 재니?”

그 이후의 대화는 없었다.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가늠이 되지 않는 가족이네. 차는 어느덧 거주지구

를 빠져나가 히어로 빌딩이 가득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역시 좀 높으신 분들이라 어딘가의 고오급 레

스토랑이라도 예약한 게 아닐까?

아파트에서의 급발진은 꿈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부드럽게 나아가는 차량. 앞에서는 백미러로 이쪽을

흘끗 흘끗 바라보며 묘한 미소를 짓는 아줌마가, 옆에서는 긴장한 것처럼 손을 꼼질거리는 소희가 있어

조금 불편한 분위기가 되었다.

[작품후기]

일요일날은 밀린 과제를 하고 월요일날 조아라에 접속해서 투베를 봤는데 내 글이 있음.

몬가... 몬가 일어나고 있음...!

취미로 쓴 글이 160화를 넘기고 그게 투베에 올라갈 거라고 상상도 못했는데. 최대한 성실 연재를 할테

니 독자님들은 우리 교수님들이 과제를 내지 않도록 빌어주세요! 전공 교수 한 분이 과제가 아니라 복습

을 하라고 시키셔서 지난주는 너무 행복했어요! 이게 옳게 된 강의지 쒸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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