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0화 (160/189)

새로운 이벤트

언론들이 한국의 새로운 S급 히어로인 소희에 대한 기사를 쏟아내고, 그 덤으로 나와 관한 온갖 찌라시가

돌며 인터넷이 떠들썩 하더라도 우리들의 보금자리는 늘 고요했다. 아무리 기자들이 열정적으로 미치더

라도 도시를 레이저로 긁는 초능력자의 심기를 이유 없이 건드릴 정도로 미치지는 않았으니까.

뭐, 가끔 가족들과 통화하는 소희의 목소리에 감사함과 창피함이 뒤섞이는 걸 들어보면 가족들이 힘써준

걸지도 모른다. 나름 어디의 협회장이니 이사니 각종 명함을 달고 있다는 소희의 부모님과, 미성년자 초

능력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할머니의 힘이라면 가능하겠지.

존재를 숨기는 것도 아니고, 선을 넘는 발언만 정리하는 거니까.

그런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제 슬슬 영화도 다 본거 같은데... 드라마나 한 번 볼까.”

“그, 하늘아, 눈 괜찮아?”

문제가 있다면 이 지루한 일상.

빌런 전담반이 되지 평소의 순찰 업무가 사라지고 방범 업무가 생겨났다. 순찰 업무는 각 구역을 돌아다

니는 것이라면, 방범 업무는 확인된 빌런 조직이나 범죄자들을 소탕하는 업무를 뜻한다. 당연하지만 ‘확

인된 빌런 조직’이 없다면 그 구역 빌런 전담반은 늘 대기 상태로 휴식을 하는 것이다.

국제 뉴스에서 S급 히어로와 정면 승부를 하고 인신매매범을 잡기 위해 폐 창고 지역의 건물 천장을 레이

저로 지져버린 소희의 구역에서 남아 있을 빌런이 있다면 말이지.

이름값 높은 히어로들이 등장하면 마치 호랑이에게 쫓겨나는 산짐승 무리처럼 경범죄자나 가벼운 빌런,

양아치 조직들이 영업장을 슬며시 옮기는 것이 이 세상에서는 비일비재 하다고 하니 뭐라 할 말이 없었

다.

이런 식으로 이리 저리 영업장을 옮기고 사무실을 옮겨 도망 다니는 삶이 싫은 놈들이 지하 도시에 와서

마음 놓고 살아가는 것이라니까 더 할말이 없고.

내가 경범죄자가 되어 게임을 한다고 쳐도 지하 도시에서 B급끼리 땅 따먹기를 하고 말지, 범죄를 저지를

때 S급 히어로가 강림하는 것을 감수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너무 심심해.

“그러게... 히어로의 삶이 생각이랑 너무 다르긴 하다.”

깨끗이 정화한 소파에 늘어져 있는 나와, 주방 식탁에서 콩나물 대가리를 따고 있는 소희. 결국 둘 다 너

무나 심심하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여름이 완전히 가고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왔건만 마치 정체기라도

되는 것처럼 모든 일이 멈춰버렸다.

소희 또한 빌런 전담반의 히어로가 되어 빌런과 싸우며 대한민국의 평화를 지키는 게 어릴 적의 꿈이었다

고 말했지. 그녀가 꿈꾸던 히어로는 빌런과 싸워 시민들을 구하는 영웅이지, 평화가 가져온 한 달간의 강

제 휴가에 온몸을 비트는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 치안, 생각해 보면 되게 좋은 편이지.”

“그치, 국토 대비 능력자 비율도 꽤 높은 편이고, 협회도 잘 정돈 되어 있고.”

S급 히어로에 대한 회의는 이제 2주를 넘어 딱 한 달째.

내가 나태에서 벗어나고도 2주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뉴스에 나온 국회에서는 S급 히어로와 관련된 초능

력자 등록 법안이 개정되어야 한다 말아야 한다고 싸우고 있었고 인터넷에서는 소희가 S급중 어느 정도

의 위상을 지녔는지 자기들끼리 상상을 하고 싸우고 있었다.

그렇게 여론이 시끌시끌한 와중에도 빌런 조직들은 전부 조용하기 그지없는 상황. 첫 번째 이유라면 S급

히어로의 데뷔전 제물이 되기 싫다는 생각일 것이고, 두 번째로는 고등학교 테러 이후 한국에 커다란 놈

들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겠지.

생각해보면 싹 다 죽였으니까.

‘...아니 지금 생각해보니 진짜 미쳤네.’

치안이 좋은 것으로는 상위권에 들어갈 대한민국의 상황과, 사람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히어로 사회. 잘

정비된 개인등록제도와 초능력자에게 거의 무한정으로 일자리를 쏟아내는 친-능력자적 정부. 민간인과

능력자의 차별지수가 낮은 초능력 선진국.

대충 이쪽 세상의 대한민국이 가진 위상이었다.

세계 최강 대국이냐 물어보면 그건 아니고, 군사 대국이냐 물어보면 그것도 아니다. 하지만 차별지수가

낮은 것 등 좋은 쪽의 지표를 따진다면 언제나 5위에서 10위안에 들어가는 나라. 나쁜 점도 분명히 있지

만 뽕 맛은 존재하는 그런 나라.

게임 모드를 만든 놈 대부분이 일단 한국인이니까...

그런 나라에서 고등학교에 인질극이 벌어졌다는 이유로 학교 건물 두 개를 무너트리고 잠입한 빌런들은

생포가 아니라 사지육신을 토막내서 고기조각으로 만들었으니, 어떤 빌런이 이 나라로 오고 싶겠는가?

‘생각해 보면 할머님이 파워가 좀 있네...’

대비를 못하고 카운터를 맞아 학생들이 인질이 되어 PTSD 증세를 보이거나 마음이 꺾여 히어로를 포기

한 애들도 많았고, 빌런들 대부분을 찢겨 죽거나 건물에 깔려 죽었는데 반년도 되지 않아 잠잠해지지 않

았나? 나도 조용하길래 그냥 넘어갔고.

심지어 이번에 소희가 S급이라는 것이 터지면서 과거가 재조명되었는데도 빌런을 찢어 죽인 과거가 언

급되지도 않고 있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잊혀서 나도 잊어버릴 뻔했네.

아무튼 그런 잡생각을 머리 한 구석으로 치운 나는 오늘도 예능을 틀었다. 최신 영화는 몇 주 내내 전부 시

청했기 때문이다. 홈 시어터랍시고 영화를 챙겨 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지금도 소희는 계속 TV만 보니

까 심심하다는 이유로 콩나물 꼬다리를 뜯고 있었다.

저녁은 간만에 직접 요리를 해 주기로 했으니까. 수제 요리를 대접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심심해.

지난번에 소희가 한 번 출동을 했던 것도 있고, 우리가 지내는 아파트가 한밤중의 난투극으로 유명세를

탄 사건도 있어서 근방에 범죄 행위가 하나도 없었다. 있어봐야 비행 청소년들이 오락실에서 싸움을 하

거나 담배를 몰래 사려다 판매로봇에게 걸린 수준.

아무리 그래도 고삐리가 담배를 피웠다고 S급 초능력자가 긴급 출동하는 건 너무하지.

콩나물 꼬다리를 다 떼고, 멸치 똥을 전부 제거한 소희가 고민을 하며 주방에 있는 마늘을 바라본다. 저러

다 다진 마늘까지 만들게 생겼네. 단순 작업에 재미가 들렸는지 좋다고 식칼 옆면으로 마늘 두드리는 걸

보니 말리기도 좀 그렇고.

TV에서는 광고가 흐르고 예능 토크쇼의 최신화가 나오고 있었다. 정신 줄 놓고 TV 앞에 있다 보니 어느

새 다른 방송이 시작된 것이다. 무심코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돌리려다 손을 내려 놓는다. C~B등급 특이

초능력자 특집이라는 것이 흥미를 잡아 끌었기에.

대체 오늘 저녁으로 무엇을 만들어 달라는 건지 예상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멸치와 콩나물, 마

늘을 학살한 소희가 싱크대에서 손을 씻고 내 옆으로 다가온다.

“오, 이 프로그램 재밌지.”

“아... 저 사람이 지난번에 이야기하던 그?”

녹화를 할 때는 아직 여름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긴 청바지에 나시티를 예쁘장하

게 걸친 남자 아이돌 MC가 눈웃음을 지으며 커다란 마이크를 양 손으로 쥐고 있다. 그 옆에서는 바람잡

이로 분위기를 띄우는 통통한 여자 MC가 과장된 손짓으로 히어로들을 안내한다.

샌들에 반팔 반바지를 입은, 소희보다 더 피부를 태운 여자. 치렁치렁한 푸른 두루마기를 입고 퓨전 한복

처럼 꾸민 남자. 그리고 새카만 후드티를 입은 단발의 중성적인 사람 하나. 나머지 둘은 알 바 아니었지만

제일 먼저 자신만만하게 나온 사람은 조금 흥미가 갔다.

나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히어로 관련 커뮤니티에서 꽤나 핫한 사람이었으니까. 이전에 소희가 이하린과

열띤 토론을 하던 주제의 그 여자다. 바다 위에서만 강해지는 여자.

남자 아이돌이 살랑거리고, 여자 개그맨이 분위기를 띄우고, 허허 멋쩍게 웃은 히어로가 손사래를 치며

점잖게 대답한다. 헐렁한 셔츠 너머로 봉긋한 가슴골이 살며시 드러나지만 여자의 가슴에 신경을 쓰는

사람 따위는 없었다.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의 초능력은 오래된 물건의 기억을 읽을 수록 능력이 강해지는 한정적인 사이코메

트리 능력자. 피해자가 애지중지 여긴 골동품의 기억을 읽어 4구역 무역지구에 숨어든 일본 출신의 빌런

을 소탕했다는 내용이 나올쯤, 소희의 단말기가 요란하게 울린다.

S급 소식 이후 소희의 인맥들이 문자를 정말 홍수처럼 쏟아냈기에 별거 아닌 줄 알았는데 옆에 기대고 앉

은 소희에게서 술렁이는 기척이 느껴진다. 이미 초능력자의 벽을 넘어 완벽한 용사에 가까워지는 소희가

이토록 당황할 일이 뭐 있나 싶어서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같이 식사나 하는게 어떠니. 집에 있을 아가도 데려 오렴.]

별 거 아닌 문장이지만 소희가 침을 꿀꺽 삼키는 게 느껴진다. 그야 보낸 사람이 할머니니까 당연한 반응

이려나. 나야 누가 뭐라 해도 소희 옆에 붙어 있을 생각이지만, 소희는 아무래도 부담이 되는 모양새였다.

하긴 17살 고삐리랑 27살 공익요원이랑 동거를 하면 사회의 시선이 누구에게 쏟아지겠는가? 가출청소

년과 히어로 공익이라면 더 매콤한 시선이 날아오겠지. 그래도 어영부영 넘어가는 모습이 있었는데 이번

뉴스에 나도 짧게 등장해서 그런지 담판을 지으려는 모습이 보인다.

그 의지를 소희도 눈치챘는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가, 새하얗게 질렸다가, 내 눈웃음을 보고 다시 핏

기가 쭉 가신다. 하기야 지난번 면간 사건 이후로 소희를 좀 많이 놀려먹긴 했지?

“하늘아... 할머님 앞에서는.”

“에이 누나. 아무리 그래도 시댁 가족 앞에서는 안 그러지.”

살며시 웃어 보아도 소희의 심장은 고장 난 것처럼 쿵쾅거린다.

[작품후기]

추천글을 링크따라 가서 보고 왔읍니다. 며칠 지난거고 게시글도 뒷페이지라 감사 인사를 남기기도 뭐

했지만... 남녀 역전 글에서 제 소설을 제일 재밌게 봐주셨다는 댓글이 있어 참으로 기뻤읍니다.

그런데 제목이 '남녀 역전 소설 9개 추천' 이래서 기대했는데 댓글에 있는 1개 포함 총 10개, 그중 제꺼

빼고 9개가 전부 본 소설이라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베스트에 있는 파란노블 남자가 게임을 잘함도 재밌

게 보고 있으니 10개 추천받아서 10개 다 이미 본 내용이네요.

남녀역전은 죽었다!

하긴, 아마하라 작품도 눈동자에 안올라오는데 옛날옛적에 죽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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