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7화 (157/189)

새로운 이벤트

소희의 표정은 참으로 볼만했다.

나태를 흡수해 의식을 반쯤 잃은 상태의 애인을, 성욕을 해소하겠다고 건드린 상황이니까. 물론 피해자

에 해당하는 내가 머릿속으로 ‘왜 소희 출근하는 건 기억해도 면간 플레이는 기억하지 못했는가?’ 로 화

가 조금 나 있을 뿐이지만 소희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라는 거지.

“그래서, 그게 더 취향이야 누나? 오늘부터 나 먼저 자고 있을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소희의 표정은 마치 짓궂은 장난을 치다 걸린 어린아이의 표정과 닮았다는 생

각이 들었다. 뭔가 창피하지만 크게 나쁜 짓을 한 건가 의문도 들고, 그렇다고 대놓고 말하기에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그런 애매모호한 상황.

몸에서 힘을 풀고 그대로 누워 버린다. 다리가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며 자연스럽게 소희의 가슴에 머

리를 기댄다. 그 반동으로 뜨거운 물이 가득 찬 욕조에서 물이 넘실거리다 살짝 넘치지만 그런 것 따위 신

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역시 가만히 있는 게 더 취향인가~”

출렁이는 욕실 물에 몸을 맡기니 다리가 축 늘어지고 팔은 반쯤 떠올라서 해파리 마냥 흐느적거린다. 욕

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 애매한 감각. 등 뒤에서 허리를 휘감아 끌어안는 감각이 느껴지기에 다시 한 번

짓궂게 몰아붙인다.

“바로 거기부터 손 대는 거야? 잠든 남자 상대로는 훨씬 적극적이네?”

대답은 없었다. 다만 격하게 뛰는 심장소리와 함께 소희가 내 정수리에 뜨끈한 물을 부었을 뿐. 느릿하게

올라간 팔을 알고 있었기에 미리 눈을 감았지만, 머리카락을 적시고 시야를 가리는 뜨끈한 욕조물의 세

례에도 웃음은 멈추질 않았다.

피부를 맞대니까 느껴진다. 역시나 용사라는 이름 답게 그녀는 S급 능력을 휘두른 사탄과의 싸움으로 한

층 더 강해졌다. 그것이 바다에서의 싸움으로 얻은 깨달음인지, 나태의 기운을 이겨내고 얻은 성장인지

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손짓 한 번으로 도시를 반으로 가를 수 있을 수준의 초인. 그런 여성이 내 말 몇 마

디에 쩔쩔매는 모습은 언제 느껴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강해졌다는 사실을.

소희가 잠든 나를 만지작거릴 때, 플레이어인 ‘나’는 늘어져라 잠이나 잤지만 흡혈귀의 본능은 강해질 기

회를 놓칠 리 없었다. 이 게임에서 탐욕스러운 것을 꼽으라 하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것이 굶주린 흡혈

귀니까.

소희가 얼굴이 벌개져서 입을 꾹 닫고 나를 씻겨주는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아마 처음에는 챙겨주려는 생각이겠지. A급 초능력자고 흡혈귀니 해도 결국 소파에 드러 누워서 죽은 듯

잠만 자는 것은 그녀의 애인. 아무리 튼튼하고 건강하다 해도 일주일 내내 물 한 방울 마시지 않는 모습은

불안할 것이다.

물컵이나 죽 따위를 입에 가져다 대다가, 흡혈귀니까 피라도 먹여주면 되지 않나? 싶어서 손가락에 피라

도 냈겠지. 잠든지 일주일이지만 섹스 중 흡혈을 한 것은 꽤나 오래 되었으니, 흡혈 본능이 그녀의 손가락

을 쪽쪽 빨아댔을 것이다.

뭐 손가락이 아니더라도 일단 쪽쪽 빨아댔겠지.

흐릿한 기억 속에서도 그렇고 몽유병 걸린 것 마냥 가끔 걸어 다니기도 했으니 몸을 약간씩은 움직이는

상태였을 거고.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있는 애인이, 살짝 살짝 건드리면 잠결에 반응을 해 주니 얼마나 야시

시한 상황이란 말인가?

“안 그래, 누나?”

내 추리를 말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머리카락을 씻겨 내리는 온수 한 바가지였다.

가끔씩 느끼는데, 소희는 약간... 뭐라 해야 할까?

남성성의 덩어리 같은 존재였다. 그러니까 이쪽 세계 기준 말고, 내 기준으로 말이야.

그녀는 털털하고, 직접적으로 사랑을 표현하지는 않지만 행동으로 보여주며, 자신이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무언가를 도와줄 때 세세한 부분은 놓치기 마련이고 은근히 욕망에 솔

직하다.

지금 느끼는 것은 ‘세세한 부분은 놓친다’ 라는 부분. 시장에 대신 가는데 꼭 사야 하는 물건은 사지 않고

오는 남편을 보는 주부의 기분이라 해야 할까. 중요한 사실 하나를 말했지만, 그보다 아주 약간 덜 중요한

사실은 말해주지 않았다.

“누나, 뭐? 반응이 별로 없어?”

“나도 출동 한 번 밖에 안 해서 몰랐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넘어갈 뻔했던 이야기. 협회가 소희를 S급으로 선정할 지 말지 고민을 하고 회의를 하

고 있더라도 발 빠르게 움직일 존재들은 널려 있었다. 무수히 많은 기자들과 그 앞에서 버티고 있는 이하

린.

“저기다! 저쪽이다!”

“아오 씨, 너네 출동 명령도 없는데 왜 지금 나와?!”

무슨 놈의 기자들이 매복 작전을 펼치는 걸까. 바람의 장벽이 아파트 입구를 막고 있어서 오히려 인기척

을 느끼지 못한 건가? 조용했던 아파트 단지가 왁왁 고함으로 가득 찬다. 어째서 A급 초능력자가 아파트

경비원 짓이나 하고 있나 싶었는데 단순히 휘말린 것 같다. 기자들의 외침만 들어도 알 수 있었으니까.

“이하린양! 평소 김소희양과 대련을 자주 하셨다고 들었는데!”

“히어로 TV입니다! 인터뷰 가능할까요?”

복작복작하게 달려드는 사람들. 마이크를 들고 땀을 뻘뻘 흘리는 통통한 아줌마부터, 멋쟁이처럼 잘 꾸

몄지만 이리저리 밀리느라 흐트러진 차림이 되어 가슴골에 손을 얹고 다른 손으로 마이크를 꼭 쥐고 있는

젊은 리포터까지. 들이대고 있는 카메라만 열 대가 넘어 보이고, 개인 카메라와 소형 마이크를 세면 거진

서른명은 되어 보이는 숫자였다.

“S급 히어로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히어로 협회의 관행인데 이번 국제 뉴스에 등장하신 것은 협

회의 태도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뜻하시는 겁니까?”

“김소희양! 모친께서 평소 정치색을 잘 드러내지 않으시는 걸로 유명한데-“

기레기들이 섞여 있는 이 와중에도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천사와 손을 잡은 히어로 협회의 강력한 힘

때문인지, 히어로를 존중하는 이쪽 세상의 문화 때문인지 아직 저 카메라들이 녹화를 시작하지 않았다는

점이리라. 켜지도 않은 카메라를 일단 들이대는 모습은 배려심이 있다고 해야 할지 막무가내라 봐야 할

지 모를 상황이었다.

둥그런 바람의 보호막 너머에서 말려 올라가는 치맛자락도 셔츠자락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에 남녀노

소 자연스럽게 노출을 하는 끔찍한 모습을 보고 나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래, 동네 다섯 블럭 순찰을

도는 히어로도 컨셉을 잡으면 팬카페가 생기는 세상에서 국제 뉴스에 등장한 사람을 언론이 가만 놔둘 리

있나.

“소희 누나, 돌아가자. 입구는 잘 부탁해!”

“뭐, 야, 잠깐만!”

아직 1층에 머물러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들어가니, 창문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온다. 아파트

입구는 아까의 고함소리를 듣고 달려온 경비들이 후다닥 몸으로 막아서고 있었으며 이하린은 둥실 떠올

라 베란다 창문 밖에 매달려 있었다.

“어딜 만져! 어딜 만지냐고! 젖탱이 들이 대지 마!”

“만지긴 뭘 만져요! 협회 허가는 받고 이러는 겁니까!”

창문을 살짝 여니 앙칼진 남자 목소리와 몇 번 인사를 나눴던 경비의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지난번 가방

탈취 사건인지 뭔지 내 그림자 늑대 데뷔전 이후 두 배 이상 늘어난 아파트 경비원들은 훌륭하게 입구를

수비하고 있었다.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아니, S급이랑 싸웠다고 뉴스가 나길래 궁금해서 찾아왔더니 갑자기 기자들이 우르르 나타났어. 초능력

이라도 썼는지 갑자기 나타난 걸 보니까 조건부 광역 은신 같은데. 그래서 일단 입구를 막고 대치 상태에

있었는데 너네가 내려오니까 기자들이 눈깔이 뒤집혀서...”

거실 베란다에서 현관 신발장까지 자연스럽게 비행해 들어온 이하린이 신발을 벗고 다시 들어왔다. 역시

나 복장은 대련할 때 마다 입었던 트레이닝 복에 새하얀 특제 양말, 그리고 운동화. 궁금해서 찾아왔다는

말은 이하린식 번역기를 돌렸을 때 ‘그러니까 한 판 붙어보려고’ 정도가 되겠지.

소희도 요즘 드라마를 찍고 나서 무슨 연애 상담이니 뭐니 공익 후배들만 술자리에서 만났으니까 이하린

과 대련을 한지 꽤 되었을 것이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이 타이밍은 2학기가 시작되는 상황이니 나

름 학교 교관으로 있는 이하린도 바쁘긴 바빴을테고.

자연스럽게 소파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이것 저것 떠드는 두 명을 보고 주방으로 향한다. 대낮부터 맥주

를 주는 것은 좀 그렇고. 고상하게 차를 홀짝일 사람들은 아니었다. 철부지 수준의 이하린이야 그렇다 치

더라도 소희의 입맛은 초딩 입맛이라 봐도 좋으니까.

식탐의 악마가 엄선한 최고급 소고기와 계란물 입혀 구운 스팸의 차이를 못 느끼는 혓바닥인데 홍차니 녹

차니 찻잎 따지고 줘도 그냥 씁쓰름한 물인갑다 하고 후르륵 마셔 버릴 테니까. 적당히 달달한 과자를 하

나 집어 들고 팩으로 포장된 헤이즐넛 아메리카노를 컵에 따라서 대접한다.

일단 귀찮게 구는 일은 있어도 선은 지켜주니까. 우리 나올 때 아파트 입구를 틀어막아 준 것도 있고.

“그런데 너 시가지 비행 허가 받았냐?”

“...아 씨, 찍혔겠지?”

“카메라가 열 개가 넘고 베란다마다 사람들이 다 구경하러 나왔던데 그게 안 찍히겠냐?”

[작품후기]

아메리카노 헤이즐넛이라고 대용량 커피 100ml당 133원이랍시고 크게 파는게 있습니다.

과제하면서 1주일에 두 팩은 마신듯.

카페인 없었으면 대학생들도 없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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