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화 (156/189)

새로운 이벤트

나태의 군주는 제 모습을 유지하는 것도 귀찮아서 마치 꾸물거리는 부정형의 육체로 자주 등장한다. 매

우 드물게 인간 모습을 한다면 손이 적게 가도록 자그마한 아이의 모습으로 변한다. 주름살이나 나이를

먹은 모습을 연기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그리고 힘을 제어하는 것 또한 귀찮아 하기 때문에 나태의 영토에는 나태함이 기체, 혹은 액체의 형태로

둥둥 떠다니는 기묘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다른 악마들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순식간에 강해질 수 있

지만, 어차피 근처로 가면 나태가 옮아 그대로 굶어 뒤지니 별 문제는 없고.

나태의 영역에서 멀쩡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악마 군주가 힘을 잔뜩 끌어 올렸을 때, 그러니까 황금을 훔치

려던 탐욕이나 발정 상태의 색욕 같은 상황이다. 사탄이 제압당했다는 소리는 아직 진정으로 분노하지는

않았다는 뜻이겠지.

그런 설명을 하는 게 들린다. 김샛별의 목소리?

불룩 솟아오른 색욕의 반바지와, 민망하다는 듯 눈을 내리 까는 소희의 모습이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뭘

보냐며 소희를 끌어안고 싶었지만... 지금은 소파에서 일어나기도 귀찮았다. 테이블에 악마 군주들이 대

부분 모여 있으니 알아서 처리하겠지.

“얘 상태 왜 이래?”

“흡혈종이니까. 그림자를 통해서인지 안개와 동질화 되었는지 몰라도 나태를 어느 정도 들이 마신 것 같

은데?”

소파에 널브러진 나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악마와 용사. 몇 시간동안 길게 이야기를 했는데 머리에 담

아두기도 귀찮아서 제대로 들은 부분은 거의 없었다. 이대로 있으면 소희가 알아서 정리를 해 주지 않을

까?

입 안에 가끔 들어오는 달달한 것을 대충 씹어 삼키며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어느 순간 뺨따구에 익숙한

폭신함이 느껴진다. 호텔의 소파와 같은 재질이지만 예민한 흡혈귀의 감각은 특유의 향을 느끼며 이게

우리 집 소파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푹신한 소파에서 기지개를 펴며 일어나니 드문 드문 끊긴 구간이 잔뜩 있는 기억이 머리 한 구석을 맴돈

다. 악마 새끼들이 용사랑 손잡는 이야기로 뭐시기 머시기 말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상황.

“일어 났어?”

“응 누나... 언제 집에 온 거지?”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보니 역시나 고급스러운 룸이 아니라 우리 집 마루의 소파였다. 소파의 감촉이 너

무 똑같아서 눈치 채지를 못할 뻔했네. 정확히 말하자면 나태에 먹혀서 기억하는 것조차 귀찮아 했기 때

문이지만.

내가 나태의 기운을 먹었다는 말을 누군가 했었는데, 그게 어떤 악마가 했던 말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

다. 흡혈귀라고 해서 7대 죄악에게 이렇게까지 물든 적은 없는데. 역시 용사의 피가 섞인 게 문제인 걸까?

“무슨 소리... 아니다, 그럴 수 있다 했지. 배 안 고파?”

“음, 꽤 고프네?”

그제서야 뱃가죽을 울리는 허기진 꼬르륵 소리에 이상함이 느껴진다. 삼일 밤낮을 굶어도 쌩쌩한 흡혈귀

가 이 정도로 허기를 느끼는 건 당연히 이상한 일이니까. 옅은 안개로 가려진 것 같은 기억을 애써 떠올려

본다.

소희가 나를 왕자님 안기로 들고 우리 집까지 데려와서 나를 일단 소파에 눕힌 기억. 빌런 제압 출동 명령

이 내려왔다고 다녀온다며 이마에 입맞추는 소희. 악마 놈들이랑 이야기한다고 거실에서 명함을 찢고 사

라진 소희.

이상하게도, 기억이 술 마신 다음날 필름처럼 끊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희는 몇 번이고 밖으로 외출을

했다.

“아니 설마...”

“알겠으니까, 일단 흡혈 먼저 해.”

내밀어지는 매끈한 목덜미에, 나는 참지 못하고 그대로 고개를 처박았다.

굶주린 짐승 마냥 달려들어 흡혈을 하다, 그대로 쾌락에 몸을 맡긴 지 몇 시간.

“그래... 오늘이 딱 13일째야.”

“13일... 되게 애매한 기간이긴 하네.”

“그건 그렇지?”

샤워를 한 번 해서 몸의 오물을 흘려보내고 욕조에 몸을 담궈 느긋한 한 때를 즐긴다. 마법 한 번이면 지워

진다 하지만 몸을 움직일 때 마다 조금씩 우드득 소리가 나는 게 거슬렸으니까. 그건 그렇고 13일이라는

시간은 참 애매하다고 생각된다.

“무슨 일 일어난 거 있어요?”

“아니, C급 초능력자 세 명이 창고 털다가 내게 잡힌 거 말고는 아무 일도 없어.”

“악마 쪽에서도 무슨 말 없었고?”

“그렇지, 큰 일 하나 한지 2주도 지나지 않았는데 뭐가 또 터지진 않았지.”

나태에 먹히고 1년이 지났다! 같으면 화들짝 놀라겠는데 고작해야 13일이었다. 나와 같이 나태의 여파에

휩쓸린 소희는 그날 바로 떨치고 일어났고 악마들도 사탄을 집어 들고 사라진 상황. 빌런 전담반으로 차

출되었지만 고작해야 13일동안 S급에 맞먹는 거대 범죄자가 등장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생각해보니까 누나, S급이랑 싸우는 거 전 세계에 방송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이리 조용하지? 뭐라

도 반응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안 그래도 그걸로 연락이 조금 왔어. S급 히어로랑 비등하게 싸웠다고 해서 S급 취급을 해야 하는가 아

닌가로 말이야. 그런데 그 기준 때문에 자기들끼리도 뭔가 말이 많아서 아직까지도 결정을 못 내린 것 같

은데?”

역시나, 13일은 애매하게 짧은 시간이었다.

초능력자의 등급이 게임 속 스탯처럼 59부터는 C, 60부터는 B 이렇게 딱딱 나뉘어 진 게 아니다. 나름대

로 초능력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초능력자의 능력을 분석해서 순간 파괴력부터 지속력 같은 전투 능력부

터 이 초능력자가 사회에 미칠 영향력까지 계산해서 내리는 것이 등급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흔해 빠진 초능력자들과 단순한 초능력은 등급 판정이 매우 빠르고 간결하게 나온다.

악력이 로랜드 고릴라 수준까지 늘어났다 해도 그 사람이 대한민국과 전 세계에 미칠 영향력이 얼마나 되

겠는가. 손에서 불꽃이나 얼음조각이 나온다 해서 경제를 뒤흔들 수 있을까? 반대로 암기력이나 전자기

기에 관련된 것들은 조금 높은 등급이 잘 나오는 편이고.

하지만 S급 부터는 말이 달라지지.

A급만 되어도 국가의 대표 얼굴마담이 된다. 이하린만 봐도 영화, 드라마, CF를 찍으며 대한민국 히어로

의 얼굴마담으로 행사를 다니는데 멈추지 않고 히어로 국제 교류에도 대표로 참석하는 인물이다. 하는

짓거리가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보여서 그렇지 명함만 따지자면 한류 천만 배우, 히어로들의 대표, 대한

민국 초능력계 외교관 정도의 직위를 가지고 행동하는 상황.

그런 와중에 한 등급 더 올라간 S급은 대체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지금 하는 행동만 봐도 소희는 어마어

마한 위치에 있었고, 그 성장세가 인터넷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아마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소희

가 테러리스트 진압한 걸 아는 사람은 있을 정도.

그런 사람을 대한민국의 S급으로 올리는 데 13일의 회의는 공무원에게 있어 부족하다 못해 각박한 시간

이었다. 더군다나 소희의 할머니와 부모님도 정치계에 끗발 좀 있는 사람이니까 더욱 더 그렇겠지.

‘드러 누워 있는 동안 지들끼리 엄청 난리가 났겠구만.’

원래 있는 놈이 더 가지려 들면 비슷하게 가진 놈이 목숨 걸고 발목을 잡는 게 세상 살아가는 꼴 아니던가.

그게 정치인과 엮인 일이라면 더욱 더.

정치적인 이유로 20대 초반에 히어로가 되지도 못하고 인생을 낭비하던 소희인데, S급으로 순탄하게 올

라갈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소희는 자신의 인생이 타인에 의해 조금씩 미뤄지는 게 익숙한 여자였다.

“그야 뭐, B급 초능력자로 빌런 전담반에 들어가는 것도 방해를 받다 너를 만나고 나서야 거의 5년 넘게

걸려서 이뤄낸 성과인데, S급 초능력자가 되는 건 1주일도 안 걸리면 아마 억울해서 홧병 걸릴 것 같긴 하

거든. 일단 너 자는 동안 가족끼리 모여서 식사 한 번 하기는 했어. 축하하다는 말만 듣고 어색하게 끝나

기는 했지만.”

“가족끼리 식사라... 뭐 하지 말라는 말은 없었다며?”

문득 그 어색함이 S급 초능력자가 되어버린 소희를 보고 빌런 전담반에 들어가는 걸 막은 미안함 때문일

지, 10살 어린 고등학생과 동거를 하기 시작한 자식에게 뭐라고 훈계를 해야 할 지 모르는 부모의 어지러

운 속마음 때문일지 궁금해졌다.

말하면 삐지겠지?

언제나처럼 등 뒤에서 부드럽게 감싸 안아오는 이 따듯하고 보들보들한 촉감을 무시하고 입을 나불대는

것은 우뚝 솟아버린 남성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나야 반쯤 졸면서 몽유병 걸린 환자처럼 보내 기

억이 없다지만, 소희에게는 강제로 13일의 금욕 시간이 아니었던가.

한창 성욕이 폭발할 나이에, 어린 애인과의 동거인데 거의 2주간 아무것도 못하고 금욕 생활을 하다니.

남성으로서의 감수성으로 나는 소희의 고통을 짐작했다.

“어휴, 누나... 나 잠든 동안 외로워서 어떻게 참았대?”

“어... 음...”

등 뒤에서 두근 하고, S급 초능력자와 전력으로 싸워도 잘 뛰지 않던 소희의 심장이 쿵쾅거리는게 느껴진

다.

“...했구나? 나 자는 동안.”

“그게...”

“했네.”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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