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벤트
거칠게 일렁이는 파도, 불규칙하게 몸을 뒤트는 하늘 끝까지 뻗어 올라간 용오름. 흔들리는 선체 위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고 카메라 렌즈를 난간 너머에 걸친 여성의 시야 끝자락에는 아름답게 흩날리는 빛의 잔
해가 보이고 있었다.
‘미친... 이게 S급과 A급의 싸움이라고? 둘 다 S급 아니야?’
얼굴 하나로 앵커가 된 사내놈은 이미 배 아래로 대피한 지 오래. 베테랑 선원들도 아니고 그저 뉴스 취재
를 한답시고 배를 몰던 선원들도 다들 선실 안으로 대피해서 숨었지만 오직 카메라 우먼 한 명만이 자신
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5m가 넘어가는 파도 속에서 선상 갑판 위에 굳건히 서 있었다.
‘이런 병신같은 능력이 도움이 될 줄 몰랐는데...’
다른 사람들이 거세진 풍랑에 전부 숨었음에도 그녀가 굳건히 갑판 위에 버티는 것은, 어디 높으신 분이
은근 슬쩍 찔러준 정보와 뒷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요 근래 히어로 커뮤니티에 화재가 된 초능력자를 두
눈으로 보겠다는 너드의 집념이 섞여 있었지.
C급 판정을 받은 중력 계통의 초능력. 벽이던 천장이던 발 디딘 곳에 서 있을 수 있는 능력은 그녀가 카메
라 우먼으로 생활하는 것에 도움이 된 적이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고작해야 출근길에 늦었을
때 골목길 담벼락을 밟고 지나가는 것 말고는 쓰인 적 없는 능력이었지만 갑판이 50도가량 치솟는 상황
에서는 무엇보다 든든한 목숨 줄이었다.
“아아아아악!”
미처 선실로 대피하지 못하고 굴러 떨어져 난간에 허리를 콰직 소리가 나게 들이 박은 뒤 파도 속으로 사
라진 선원을 보면 지금만큼은 최고의 초능력이라고 찬사를 보낼 수 있으리라.
빛의 날개를 단 여성이 새파란 하늘 아래를 활공한다. 마치 거인이 날벌레를 때려잡으려 하는 것처럼 바
다에서는 파도가 일어나고 용오름이 허리를 기괴하게 꺾으며 그 여인을 쫒아가지만, 빛의 날개는 부서지
는 바닷물을 반짝거리는 보석처럼 보이게 하는 빛의 잔해만을 남기고 이리 저리 회피하는 비행을 완벽하
게 행한다.
새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끝자락에서, 태양을 등진 여인이 빛의 날개를 접고 바닷바람을 가르며 아래로
내려 찍는다. 고작해야 C급의 능력자인 그녀의 눈에는 용오름을 피해 구름과 함께 창공을 날아다니던 여
인이 반짝 하더니 어느새 파도 끝자락까지 내려온 것처럼 보인다.
풍압에 으스러지는 파도 사이로 빛의 검이 내뻗어지자, 아지랑이가 보일 정도로 강력하게 응축된 염동력
의 방어막이 그것을 막아낸다. 그 직후 빛의 날개를 으스러트리려는 바닷물의 손아귀를 피해 다시 위로
날아오르는 여인.
찬란하게 빛나는 빛과 아름답게 부스러지는 파도의 포말을 보며 감탄하는 카메라 우먼의 시야에 흐릿하
지만 기묘한 무언가가 보인다. 검고 붉게 도색해 둔 요트를 타고 기어올라가는 길쭉한 무언가. 그 중 하나
는 무언가 사람처럼 보이는 것을 휘감고 있었다.
‘...문어 다리가 선원을?’
※
어색하게 잡힌 컨셉은 보는 사람들을 괴롭게 만들며 눈을 돌리게 하지만, 잘 잡힌 컨셉은 묘한 중독성이
있어 계속해서 찾아보게 된다. 컨셉의 숙련도가 중요한 이유는 내가 죽자고 하는 게임이 ‘RPG’였기 때문
이고.
롤 플레잉 게임에서 컨셉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컨셉만 잘 잡으면 엉성한 실력도 커버가 되니까. 실제
로 그런 방식으로 방송을 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실력파 방송에는 범접할 수 없는 괴물이 세 명 있으니까,
캐릭터성을 확실하게 잡고 잔잔하게 모험을 하는 스토리를 짜서 인기를 끄는 사람들.
“이까짓 그림자!”
“누나, 최대한 잡아 볼게요!”
그림자를 풀어 꾸물꾸물 배 아래에서부터 감싸 올라간다. 만들어 내는 것은 커다란 문어 다리. 촉수로 표
현되는 고대 옛 신 부터, 수십종의 크라켄 짝퉁 바다 괴물까지 다양한 문어의 모양으로 등장하였기에 모
양새를 흉내내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아직 완전히 이성을 잃지 않았는지 정말 염동력만 사용하는 이사벨라 덕분에 그림자의 이점인 속도를 포
기하고 느리고 둔중한 문어 다리를 연기하였음에도 꽤나 먹혀 들어 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여덟 다리 중
하나는 선원을 붙잡고 있어서 휘두르는 것은 일곱.
느릿한 촉수에 숫자도 모자라지만 날아다니는 소희와 달리 이사벨라는 염동력으로 움직이고 있으니까
적당히 방해를 할 수 있었다. 거기에 배에 있는 그녀의 선원들이 계약자라도 되는 건지, 염동력의 일정량
을 자신의 배를 보호하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 배를 느리게 완성된 나의 그림자 촉수가 휘어 감는다.
“으아아악! 이건 또 뭐야!”
‘인질로 잡기는 좀 애매한가?’
그림자로 만든 만큼 끈적이는 점액질까지 구현하지는 못했지만, 사람 몸보다 굵은 촉수가 꿈틀거리며 십
수m 길이를 이용해 배를 휘어 감는 모습은 뱃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주기는 충분했다. 초능력과 첨
단 과학이 존재하는 시대라 할지라도 미신은 여전히 존재하니까.
안에 있는 선원들 지키랴, 배가 우그러지지 않게 버티랴, 날아다니는 소희의 공격을 방어 하랴. 이사벨라
의 염동력이 바쁘게 오가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것이 오히려 내게 불안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무언가를 신경 쓰며 싸운다는 것은 말 그대로 그녀가 아직 제정신임을 뜻하니까. 용사인 소희야 악마 군
주와 죽자고 싸워도 죽지 않고 그 상처를 바탕으로 다시 강해진다지만 최선은 다치지 않는 것 아니겠는
가.
애정을 느끼고 있는 캐릭터에게 자해를 시키는 가학적 취향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슬슬 눈치를 보며 이
번 일을 부탁한 두 악마의 명함을 슬그머니 손에 쥐었다. 여차하면 카메라를 부수고 찢어버려야 하니까.
아직 분노의 악마는 제대로 분노하지 않았다. 우리들에게 맞긴 두 악마들도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화만
나면 자꾸 용으로 변하려 들어서 곤란하다고. 대악마라는 양반이 마법도, 육체능력도 사용하지 않고 온
전히 염동력만 쓰는 것만 봐도 그렇다.
진짜 화나는데 컨셉을 유지하는 놈이 어디 있어. 이성을 잃으면 컨셉이 깨지는 게 당연하지.
“아니, 이, 날파리 같은 새끼가! 야! 너 어떤 새끼 권속이얏!”
후욱, 용오름 사이로 유황 냄새가 훅 풍겨온다. 갑작스레 등장한 지옥의 불길에 파도가 증발하고 용오름
이 바스라지며 뜨거운 수중기가 온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그 타이밍에 맞춰 그림자 촉수로 허리를 다친
선원을 대충 방송국 배에 던져버린 뒤, 아직까지도 카메라를 들고 버티는 여성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수증기가 가라 앉으니 그 곳에는 S급 초능력자 이사벨라가 아니라 악마 사탄이 있었다.
새빨간 비늘이 돋아난 손이 검게 물든 삼지창을 꾹 쥐자 염동력이 아닌 불길이 넘실거린다. 발 걸음 걸음
마다 유황내 물씬 풍기는 불길이 일어난다. 그 위압적인 모습에 소희가 긴장하며 양 손으로 검을 고쳐 잡
으며 자세를 바로잡는다.
“쥐새끼마냥 알랑거리기나 하는 빌어 처먹을 년! 가랑이를 찢어 발겨서 평생 남-“
“입 한번 더럽네, 악마 새끼가!”
새하얀 빛의 날개와 대비되는 검붉은 파충류의 날개의 여인이 서로를 노려보며 대처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울리지 않는 발소리가 들린다. 사방을 가득 채운 수증기 속에서 들려오는 가볍디 가벼운 발소리.
찰박 찰박, 맨발이 옅은 물기를 가르는 소리. 그 가벼운 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희와 사탄이 맞붙어
무기를 몇 합 주고받는 사이, 고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이미 전투에 푹 빠진 두 명은 듣지
도 못하고 계속 전투를 이어갈 뿐.
“아 진짜... 적당히 해 두라니까 왜 또 그러고 있어? 한 발 대줘?”
반팔 반바지에 맨발로 수증기를 밟으며 색욕이 걸어 나온다. 손에 들려 있는 둥그런 것을 보고 순간적으
로 ‘이 와중에 비치발리볼을 왜 들고 다니지?’ 라고 생각했지만 증기와 마찬가지로 반 투명하게 일렁거리
는 것을 보고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여자들이란, 정말... 단순한데 귀찮게 굴고 말이지.”
톡, 남성의 손 치고는 가느다랗고 새하얀 손 끝이 허공을 가르자 마치 밤 안개를 뭉쳐 놓은 것처럼 생긴 기
묘한 구체가 느릿하게 날아가다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 곳 근처에 툭 떨어져 터진다. 팡 소리와 함께 스물
스물 흘러나오는 검은 기체.
그 장면을 보고 있으니 눈이 피로해짐을 느낀다. 코 안쪽이 지끈거리며 하품이 나오고, 눈물이 시야를 가
린다. 뻑적지근한 목이 불편해 양 손을 뻗어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니 기립성 현기증 마냥 머리가 몽롱해
지고 시야가 어둑어둑 물들어간다.
반쯤 감긴 눈 사이로 날개를 튜브 삼아 바다 위에 둥실 떠 있는 소희와, 난간에 빨래처럼 걸쳐진 상태로 검
은 공을 걷어 차려다 자빠져서 그대로 잠든 사탄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옆에서 아득바득 일어나 이 이
상한 상황을 카메라에 담으려다 내 옆에 같이 누워 버리는 카메라 우먼의 모...
슬슬, 눈을 뜨고 있기도 귀찮아졌다.
[작품후기]
온라인 시험 하나와 모든 과제를 끝마쳤습니다.
그리고 제 학점도 끝난 것 같네요.